제286화
285화-선택 (1)
장원 생활에 적응하며,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내는 설천위.
이것저것 실험하며 단주패를 깎을 준비도 하고, 해야 할 일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장원에 찾아와 몇 번이나 술자리를 가졌지만.
뭐, 그 정도야 문제없지.
다만, 정말 일이 바쁜 몇 사람은 오지 못했기에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기에.
“여, 천위.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요. 누님.”
정녕 오랜만에 찾아온 남궁선의 모습이 꽤나 반가웠다.
전에 백화단주가 찾아올 때도 일이 있다며 안 오더니, 이렇게 혼자 찾아왔네.
그것도 술도 마시기 애매한 대낮에.
뭐, 남궁선의 성격이라면 낮이든 저녁이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웃으며 남궁선을 맞이한 설천위는 항상 손님을 받던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자연스럽게 그 방 안에서 차를 마시며 명상하던 무해와 조우.
남궁선과 무해가 빠르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흘러가는 대화.
그 속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유예린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남궁선이 스스로 술상을 거부했으니까.
즉.
“그럼 누님, 슬슬 본론을 얘기해 주실래요?”
술을 마신 상태로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닌,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소리다.
짧은 안부 인사가 끝나자마자 대뜸 던지는 설천위의 물음에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길게 끌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
짧게 숨을 고른 뒤, 남궁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처리한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
꼬리를 잡았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무해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또한 설천위에게서 대강의 사건을 들은 유예린 또한 내용의 핵심을 파악했다.
“어디 있대요?”
한없이 차갑게 굳어진 설천위의 얼굴에 무해는 속으로 불호를 외며 기도했다.
제발 그들이 저 청년이 납득할 수 있는 죄를 짓지 않았기를.
저 청년이 거침없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기를.
무해가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사이, 설천위의 표정을 본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적극적이어서. 내가 나서기에는 조금 애매해서 네가 시작한 일인 만큼 네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답인가 보네.”
품에서 꺼낸 서신을 내미는 남궁선.
“반 시진 있다가 출발해.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들어.”
“감사합니다. 누님.”
“일 짬 때리는 건데, 고맙긴. 그럼 몸조심해라.”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남궁선은 그대로 방 밖을 나갔다.
그렇게 방에 남은 설천위.
그는 무해를 보며 물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미타불……. 짐을 챙겨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짧게 끝냈던 그 여행은 아직 끝난 게 아닌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무해가 방을 나서고 유예린은 가만히 앉아 설천위를 바라봤다.
“공자.”
“응.”
“굳이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어요.”
“알아.”
“소 잡는 칼이 될 뿐이에요.”
“알아.”
남궁선은 그럴 의도가 아니겠지만, 설천위가 끼어든 순간 그는 소 잡는 칼이 된다.
준비된 도축대 위에서 내려치는 칼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설천위는 괜찮았다.
“유 매.”
“네.”
“무 소저는 어때?”
“……설마 데려가시려고요?”
무 소저.
그 지옥에서 구해 온 여인.
이름을 스스로 버린 것인지, 아니면 잊은 건인지 그녀는 자신을 무명(無名)이라고 칭했다.
물론, 그것이 마음에 안 든 설천위는 그녀를 무요(武曜)라고 부르기로 했지만.
그녀는 거창한 이름이라고 싫어했으나, 강행했다.
애초에 그녀는 아직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약 기운에서 벗어나면서 말을 못 하게 된 건지, 안 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상처의 치료는 끝났고, 약의 배출도 거의 끝난 상황.
그녀는 설천위에게서 새로운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물론 그 출처는 천마이지만.
그녀는 현재 이 장원에 머물며 무공을 익히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기초 체력 단련을 하고.
점심에는 짧게 식사 후, 무해와 함께 경전을 읽는다.
두 시간 정도.
그리고 나면 다시 수련을 시작한다.
이번엔 설천위가 알려 준 초식 연습.
그것을 저녁까지 반복하고.
식사 후에 다시 경전을 짧게 읽고 잠이 든다.
다른 것 따윈 일절 생각할 겨를이 없는 아주 빡빡한 하루.
마치 무공을 익히는 것만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하루.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그녀는 천천히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저는 좋지 못한 생각 같아요.”
그렇기에 유예린은 딱 잘라 말했다.
그것은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할 거라고.
이제 마음의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사람이다.
“망가질 거예요.”
마음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지금, 피와 살육으로 그 구멍을 채우면 사람은 망가지고 만다.
흉악한 범죄자들은 불운한 과거를 지닌 이들이 많다.
어린 시절, 즉 마음에 아직 빈틈이 많은 시절에 그 틈이 고통과 절망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 고통과 절망을 참아 내고 끝내 다른 감정으로 그것들을 밀어내고 채워 넣는 이들은 분명 있으나.
나약한 이들은 그 고통과 절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런 마음은 자신이 받았던 고통과 절망을 다른 사람에게 줘도 된다는 뒤틀린 생각이 되고.
이내 그 뒤틀린 생각은 쾌락이 된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가학성은 대체로 이런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
모든 악인이 물론 후천적인 영향으로 잘못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무 소저에겐 일러요.”
무 소저는 그 후천적인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살육이 난무할 장소에 그런 그녀를 데려가는 건…….
“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른데.”
유예린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드물게 설천위가 반대 의견을 냈다.
“사람은 성과 없는 고행을 견디지 못해.”
“지금 그녀에게 수련은 그 자체로 치유입니다. 충분히…….”
“아니. 그건 가라앉힐 뿐이지.”
염증으로 부풀어 오른 피부를 토닥여 가라앉힐 뿐이다.
염증의 원인이 되는 상처는 아직 하나도 낫지 않았다.
나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과거의 일을 되새기며 그 속을 파헤쳐 염증을 긁어내고 살을 다시 봉합해야 하는데.
그 일을 그녀는 아직 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를 털어 낼 때가 됐어.”
그렇기에 그 시작점에 서야 할 순간이 왔다.
좋은 기회다.
동기부여로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도.
“유 매, 나는 똑바로 마주 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당사자의 의견을 묻고 결정하죠.”
이 이상 길게 이야기해 봤자 평행선이란 것을 깨달은 유예린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설천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안다.
다만, 설천위가 원하는 방향대로 되면 좋겠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경우 생길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그녀가 피와 살육에 빠지면.
그땐 어찌 대처할 거란 말인가.
“유 매.”
유예린의 걱정이 오랜만에 표정으로 드러났기에 설천위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 소저, 꽤 강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걸?”
* * *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무요.
그녀의 동의가 떨어졌기에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자.”
“…….”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는 무요.
그녀의 모습에 설천위는 작게 턱을 긁적였다.
“짐은 안 챙겨?”
“…….”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무요.
아니, 옷가지 정도는 챙겨야…….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의 방구석에서 무언가를 쑥 꺼내는 무요.
마치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은 작은 봇짐에 설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준비하고 있었어?”
“…….”
이번엔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는 무요.
그 모습에 설천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뭐, 본인은 준비됐다고 하니까.
저게 언젠가 집을 나가려고 싸 놓은 짐인지, 자신을 따라가려고 싸 놓은 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무요가 준비됐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조금만 기다려. 나도 짐 챙겨서 올 테니까.”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무요.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선 설천위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무요도 원하고 있고, 괜찮을 거야.”
“걱정이 앞서는군요.”
암은단을 나올 예정이지만, 아직까진 암은단의 업무를 맡고 있는 유예린이기에 그녀는 이번 일에 동행할 수 없었다.
나올 거니 일을 대충 처리한다는 건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이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도, 무 소저의 상태도.”
“응.”
“솔직히 저는 지금도 무 소저의 동행은 막고 싶은 심정이지만…….”
작게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설천위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본인도 원하니 이번엔 믿겠습니다.”
“응.”
“무해 대사도 계시니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 그것도 그렇지.”
무해 그 사람, 그런 부분에서는 꽤나 도움이 되지.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 * *
무림맹에서 사흘 정도를 이동해 도착한 숲.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흐음.”
창천단의 단원이 내민 지도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웬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적의 본거지.
일단 산적들의 산채는 아니었다.
주변에 제대로 된 길이 없으니 산적질로 먹고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다른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소리.
“여기서부터 놈들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숲을 걷던 중, 창천단원의 말에 설천위는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나뭇가지를 칼로 쳐 낸 흔적.
순찰을 돌며 길을 만들어 낸 흔적이다.
땅에도 사람이 걸어 다닌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러므로 여기서부턴 적의 영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소리겠지.
물론.
“철저하진 않네.”
빈틈투성이지만.
우연히 걸어 들어왔는데도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경계라.
물론 안으로 들어갈수록 당연히 경계가 삼엄해지겠지만…….
갈수록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었다.
이놈들이 제대로 된 음지의 조직일 거란 가능성이.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중간 업자,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장사하는 놈들.’
이 넓은 무림에 범죄 조직이 어디 혈교나 혈사련만 있겠는가?
당연히 작은 규모의 범죄 조직도 있다.
꼭 거창한 신념이 있어야만 사람을 죽여 금품을 갈취하는 게 아니니까.
남궁선이 움직이지 않은 시점에서 이럴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는 소리지만.
애초에 그런 놈들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상관없다.
아무렇지 않게 놈들의 영역을 걸으며 설천위는 창천단을 바라봤다.
긴장한 이들도 있는가 하면,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는 이들도 있다.
창천단 3번 대라고 했나.
신참도 껴 있는가 보네.
이들의 긴장을 풀어 주고 싶지만, 딱히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흡!”
“스님, 열정적이시네요.”
저기 앞에서 정찰조를 제압하고 있는 무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적들의 본거지가 꽤나 가까워진 것 같아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무해가 제압한 이들을 창천단이 재빨리 붙어서 손발을 묶고 혈을 짚는다.
아마 하루 이틀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저러고 있을 거다.
뭐, 그동안 맹수한테 걸리면 그대로 잡아먹히는 거지.
무해가 그런 잔인한 처형 방식을 선택하진 않을 테니 빠르게 정리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는 소리겠지.
이쪽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게 하려고.
내가 무저항의 인간을 굳이 쫓아가 죽이진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저러는 거겠지.
뭐, 나야 편하니 좋긴 하네.
어깨를 으쓱이곤 담담히 걸어가는 설천위.
그 뒤를 무요가 얌전히 따랐다.
설천위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한들 그녀의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하진 않았다.
아니, 분명 많이 늘었지만 겨우 이류 수준.
몸 상태와 심리 상태를 고려하면 사실 이류 정도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상태.
무요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자신은 전력상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도 설천위는 자신을 데려왔다.
‘……생각, 있어.’
분명 노리는 것이 있기에 자신을 데려온 것일 터.
자신은 그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해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면 된다.
무요가 자신의 방식으로 전장의 공기에 적응해 나가고 있을 때.
“하?”
어느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마을, 대충 산채라고 부르자면.
그 산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설천위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산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환호성, 욕설.
비명, 기합 소리.
“……이 새끼들 봐라?”
투기장을 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