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284화-단주패 (3)
강렬한 빛과 소음.
순식간에 눈과 귀를 강타한 엄청난 충격은 갑작스레 찾아온 것만큼이나 빠르게 희미해졌다.
그렇게 희미해지는 충격 속에서 구목은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찰나와 같은 강렬한 충격과 함께 사라진 흉악한 기세.
그 뒤에 보인 것은.
“아, 턱도 없네.”
살짝 흠집이 생긴 단주패를 보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청년이었다.
자신이 전투태세로 들어갔던 것이 실수였나 싶을 정도로.
‘……허.’
그 기세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한량과도 같이, 흘러가는 구름과도 같이.
자연스럽고 허(虛)하다.
“응? 누님?”
“천위, 뭐 하는 거냐?”
“단주패에 이름 새기는 연습이요.”
“……검기(劍氣)로?”
“혹시 몰라서 해 봤는데, 턱도 없네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설천위.
그 모습에 단주패를 바라본 구목은 헛웃음을 지었다.
검기로 흠집이라도 낸 시점에서.
‘……기초 하나만큼은 확실하군.’
부단주급으로는 합격 이상이다.
백운(白隕)이라고 불리는 저 철은 그만큼 단단한 물질이니까.
그것에 검기만으로 흠집을 남겼다는 것은 검기의 날카로움이 거의 극에 이르렀다는 명백한 증거다.
“훌륭하구나.”
“이렇게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초생단주(草生團主)님.”
구목의 한마디에 드디어 그를 향해 포권을 취하는 설천위.
그의 인사에 구목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딱딱한 인사는 됐네. 부하의 동생이 이번에 큰일을 했다기에 축하하러 온 것뿐이야.”
“언제나 누님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
전에 본 설천강, 그 아이도 저런 식으로 인사하진 않았는데.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누나를 챙길 겨를 따윈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공자, 손님들을 밖에서만 맞이하실 건가요?”
“아, 그렇군. 죄송합니다.”
유예린의 한마디에 작게 고개를 숙인 설천위는 곧바로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아미타불, 오랜만에 뵙습니다. 구 단주님.”
“무해 대사 아니십니까?”
“대사라니요. 스님으로 충분합니다.”
“허허, 무해 대사를 대사라고 부르지 못하면 이 무림에 대사라고 불릴 만한 스님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안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무해는 구목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무해는 현 적수단주(赤手團主) 무진의 사제(師弟)다.
무자배에선 가장 젊은 막내.
기행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나, 기행도 기행 나름.
이 무림에서 불살(不殺)을 실천하는 그의 기행은 무림에서도 인정하는 정도(正道)다.
실력의 고하와 상관없이 많은 무인들의 존중을 받고 있는 이가 바로 무해란 소리다.
설천위가 그를 처음 봤을 때, 남궁선은 그를 땡중이라고 칭하긴 했으나 실제로 그를 땡중이라고 칭하는 이는 극히 소수다.
물론, 그 소수는 그가 범죄자들을 두고 하는 기행을 봤기에 그리 칭하는 것이지만.
‘……미치긴 했지.’
무해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설천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해를 바라봤다.
첫 만남은 그 외모에 놀랐지만, 두 번째 만남은 그 기행에 놀랐다.
아니, 붙잡은 적을 감화시키겠다고 경전을 읽는 미친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상대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 처먹지도 못할 텐데.
거기다 경전이란 건 직접적으로 깨달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부처가 무슨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서 이리 됐다.
뭐, 지옥에는 뭐가 있고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어떻게 해결됐다더라.
등등.
배경 지식 없이 들으면 못 알아듣는 게 정상인 내용이 적혀 있다는 소리다.
괜히 설법이란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무해의 기행을 떠올린 설천위는 구목의 눈동자에 담긴 존경의 빛에 작게 침을 삼켰다.
뭐, 그건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를 광경이니 말을 아끼자.
“천위, 너를 단주님께 인사시키고 싶어 이리 찾아왔다.”
“아하.”
나이스 누님.
때마침 들어온 설란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구목을 바라봤다.
“배울 것이 많은 후배이니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에 보아하니 내가 가르칠 것이 딱히 없어 보이는데, 무슨 지도 편달을 한단 말인가?”
“부족하다는 것은 제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구 단주님.”
시작된 겸손의 시간.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 설천위.
그 미묘한 어색함을 감지한 설란과 유예린은 작게 웃었고, 무해는 깊게 고개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
“허허, 무슨 소린가. 나는 진심이거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구목의 날카로운 시선이 설천위를 훑었다.
“자네, 왜 새길 수 있으면서도 새기지 않았는가?”
의문.
할 수 있으면서도 왜 하지 않았느냐.
그 의문에 설천위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구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천위는 어색했던 미소를 치우고 진심으로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족함이 많아 단주님 앞에서 보일 재주가 아니었기에 그랬습니다.”
솔직한 대답.
그 대답에 설란은 작게 놀랐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 것을 알고 급히 기술을 바꾼 건가?’
만약 그러하다면, 작은 의문점이 해소된다.
설천위가 힘을 해소하기 직전, 그가 끌어올린 기세만으로 단주님이 전투태세에 들어갔던 것이.
고작 단주패에 흠집 정도만 남길 공격에 단주님이 위기감을 느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기세가 흉흉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랬다고 하기엔 확실히 결과물의 위력이 약하긴 했다.
그리고 이건 다른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사실을 증명한다.
‘……천위야.’
너는 대체 무엇을 손에 넣은 것이냐.
기세만으로 단주님을 위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대체 어떻게?
믿기 힘든 동생의 성장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설란은 이내 짧게 속으로 숨을 삼켰다.
뭐가 됐든,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다.
자신의 동생은 이제 스스로 가야 할 길을 가기로 정했으니.
다만.
“천위.”
“네 누님.”
“집에 간 지는 얼마나 됐니?”
“…….”
침묵.
“시간이 나면 꼭 찾아뵙거라.”
“……네.”
설란의 짧은 충고 뒤로 구목의 호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술상을 준비해 왔습니다.”
어느새 사라졌던 유예린이 간단한 술상과 함께 들어오자, 구목은 빙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고.
“하하! 내 궁금한 게 정말 많네! 설 동생! 아, 부단주의 동생이니 사석에서는 편히 부르겠네.”
“물론입니다. 구 단주님.”
“됐네. 그냥 선배라고 부르게.”
“예, 구 선배.”
“으허? 으하하하하! 그래그래! 호탕하구먼! 자, 일단 입술부터 축이고 시작하자고.”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
구목은 풍문으로만 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설천위에게 물어보고, 실체화된 패융까지 구경하면서 모두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물론 그러면서도 꾸준히 설천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1년간 무림맹에서 일해 온 유예린도 참고가 될 정도로 심도 깊은 조언도 있었다.
그렇게 술자리는 밤까지 이어졌다.
* * *
“안 주무십니까. 설 시주.”
“예. 저희 집안은 대체로 술에 강해서요.”
누님도 뭐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자러 간 것뿐이지 딱히 취하진 않았을 거다.
구 선배는 꽤 취한 것 같지만.
술자리 내내 옆에서 채소볶음과 차만 마시던 무해는 취했을 리가 없을 테고.
유예린은 뭐, 할 일이 있는지 장원을 나간 것 같고.
밤공기가 워낙 시원해 살짝 산책이나 나왔더니 이렇게 무해 스님과 만나 버렸다.
“시주.”
“네.”
“단을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유.
이유라…….
무해의 질문에 잠시 그를 바라본 설천위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은은하게 빛나는 보름달.
이젠 꽤나 추워진 계절.
설천위로 살아간 지도 벌써 삼 년 정도 됐다.
뭐, 조금 더 길거나 짧을 수도 있겠지만, 얼추 그 정도쯤 됐다.
정말 알찬 시간을 보내면서 확실하게 알게 됐다.
자신은 많은 것을 바꿨다.
그리고 앞으로도 바꿀 것이다.
게임 속에서 설천위는 애초에 단(團)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단(團)에 소속되지도 못하는 말단 중의 말단인 대(隊)에 들어가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가 우연히 백화단의 임무에 끼게 되고.
거기서 영력의 재능을 발견해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장한다.
무인 생활을 십수 년을 한 술사 주제에 체력이나 근력 스탯이 웬만한 술사만도 못한 충격적인 스펙.
이게 말이 되냐고 욕하는 게이머들도 많았지.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재능의 몸뚱어리로 여기까지 왔다.
고작 삼 년 만에.
그 성장의 원동력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천마라는 말도 안 되는 스승의 존재.
보통의 스승과는 달리 끊임없이 자세를 지적하고 고쳐 줄 수 있는 영들의 존재.
본래는 배우는 것도 힘들었을 최상급 무공을 몇 가지나 배웠고.
레벨업과 업적, 이벤트 보상으로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챙겼다.
특히, 업적.
계(癸)로 시작한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짜 많은 것들을 얻었지.
그렇게 얻은 것들로 진짜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 냈다.
그래.
진짜 너무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 버렸다.
게임 속에서 원래 들어가는 대(隊)에 들어가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실력 낭비로 여겨질 정도로.
다른 단(團)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시간의 낭비로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길을.
비극투성이인 육도(六道)의 길 위에서.
해피엔딩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스님.”
그리고 이것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엇다.
“저는 제가, 그리고 제 주위의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크나큰 대의를 위해서?
에이, 정녕 그런 것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영웅, 아니 성인(聖人)이라고 불러야겠지.
그런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박한 꿈을 이루려면 꽤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더라고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필요한가.
그 물음에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이다.
“평화(平和).”
이 세상이 평화로워야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행복할 수 있다.
참으로 슬프게도.
작은 것을 바라기 위해선 큰 것을 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저는 저와 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단(團)을 만드시는 것입니까?”
“에이, 그건 목표가 잘못됐죠.”
“허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 결과,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좀 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거겠지요.”
“……아미타불.”
불호와 함께 고개를 숙인 무해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슬픔이 담긴 눈으로 설천위를 향해 물었다.
“그 노력 속에서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시더라도 말입니까?”
과연, 그 많은 살업을 쌓고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업(業)이라는 것은 결코 쉽사리 지울 수 없는 것인데?
슬픔이 담긴 무해의 눈동자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피가 묻으면 씻어 내면 됩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피라면, 씻어 낼 수 있습니다.”
“그건 오만입니다. 사람의 피는…….”
“피가 아무리 물보다 진해도 결국 씻겨 나갑니다.”
잔잔하게 웃으며, 설천위는 옷에 묻은 이슬을 털어 냈다.
“그럼, 저는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아미타불, 편히 주무십시오. 시주.”
“예, 스님도 편히 주무세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설천위.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무해는 이내 천천히 걸으며 나지막이 경전을 외웠다.
그리고 며칠 뒤.
설천위를 조금이라도 더 설득할 기회를 노리던 무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했고…….
* * *
붉은 피로 흥건한 땅.
피와 섞여 질척이는 흙은 마치 늪처럼 사람의 발을 붙잡았다.
산채처럼 보이는 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
그 안에서 퍼져 나오는 것은 신음 소리와 혈향뿐.
인세에 이런 곳이 정녕 존재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스님.”
“……아미타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 없이 불호를 외운 무해는 두 눈을 감았다.
“저는 납득했습니다.”
차마, 저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