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282화-단주패 (1)
여행을 짧게 마무리하기로 결정한 뒤.
설천위는 무해와 함께 곧바로 무림맹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만, 무리하게 움직이진 않았다.
내공을 금제한 포로들도 있었고.
“…….”
“여기요.”
이제 겨우 약 기운에서 벗어나고 있는 여인의 상태도 보살필 필요가 있어서다.
무해가 포로들을 상대로 경전을 외우는 사이.
금단증상으로 부들부들 떠는 여인에게 곡물 죽을 넘겨준 설천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모닥불을 바라봤다.
“약 기운은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가실 거예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설천위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떠오를 겁니다.”
약 기운을 빼서 부작용을 없앨 순 있었다.
금단증상도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없앨 수 있었다.
다만.
그 쾌락의 기억은 없앨 수 없었다.
약에 취해 얻었던 쾌락은 고통 없이도 갈구할 만한 것이기에.
그것만큼은 스스로의 의지로 끊어 내야 한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설천위는 여인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는 불합리와 무지의 시대다.
이 여인이 겪었던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이 여인을 조롱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는 채 조롱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수치와 치욕스러움이 그 끔찍한 기억을 되살릴 것이다.
허나.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겨 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 같은 건 해 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괜찮아질 리가 없지 않은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악몽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무림에서 도망쳐 어디 인적 드문 곳으로 가서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과 아이들로 인해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음속에 새겨진 공포와 충격을 지우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과연 과거의 끔찍했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 속에서도 끝없이 공포에 떨면서 살아간다.
이겨 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겨 내지 못한 어둠으로 인해 흠칫거리며 살아간다.
만약 눈앞의 여인이 평범한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억누르고 살아가는 길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는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지가 그리 다양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한 가지 선택지가 더 남아 있다.
“무인(武人)으로 살아가십시오.”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가르친 스승이 있다는 소리다.
동네 무관인지 아니면 작은 중소 문파인지, 그것도 아니면 작은 가문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약에 절어 있어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해서 손발의 힘줄도 끊어 놓지 않았다.
아마 노예로 팔아 버릴 생각이기에 굳이 끊지 않은 것이겠지.
상처 없는 물건이 더 값어치가 나가니까.
그러니 무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단련을 거듭해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다.
“살아갈 마음이 남아 있다면.”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본 설천위는 어느새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여인을 보며 웃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보세요.”
* * *
이른 새벽.
왠지 모르지만, 눈이 떠졌다.
끔찍한 악몽에 깨고 잠들길 반복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해가 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해가 뜨기도 전에 정신이 들었다.
‘……예전처럼.’
새벽에 일어나 수련할 때처럼.
다시 잠들 것 같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여인은 몸을 일으켰다.
모포를 걷어 내며 일어섰다.
그러자 보인 것은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을 모아 놓고 경전을 외고 있는 스님과.
“일어나셨군요.”
마보를 하고 있는 설천위였다.
스스로를 설천위라고 소개한 젊은 청년.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인상적인 사람이다.
자신과는 다른, 진짜 무림인이라는 느낌.
마보를 한 채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자신을 보며 욕정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다.
이 더럽혀진 몸엔 손을 대는 것조차 싫을 텐데, 자신을 감싸 안고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남자.
웃으며 자신을 챙겨 준 남자.
그 남자가 눈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뭐 해요?”
그러곤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서 마보 해요.”
……에?
그게 무슨…….
“아미타불……. 설 시주, 아무리 그래도 환자한테 마보는…….”
“에이, 몸은 멀쩡해요. 약 기운이 조금 남아 있고, 상처가 좀 있을 뿐이지.”
아니, 보통 그런 상태를 환자라고 하는데.
설천위의 대답에 반박하려던 무해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여인을 구해 낸 뒤 설천위가 취한 의료적 조치는 그의 지식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무해는 여인의 상태에 대해 왈가불가할 자격이 없었다.
무해가 입을 다물고, 설천위가 웃으며 눈짓을 계속하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마보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마보.
너무 쉬어서 그런가.
금세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가 뻐근해져 오기 시작했다.
고통.
그런데.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이다.
땀이 흐르고,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힘들지 않다.
“그대로.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그저 멍하니 마보를 하던 여인은 자신의 앞에 선 설천위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허나.
그런 여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설천위는 작게 웃으며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조금 뒤로.”
자세를 가르치며, 설천위는 움직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인이 얼마든지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천천히 알려 준다.
오로지 자신만이 갈고닦는 무(武)를.
그저 눈앞의 여인이 악몽을 어서 털어 내고 밝은 길을 다시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 * *
“……하.”
무림맹 창천단의 단주실.
그곳에서 보고를 받은 남궁선은 머리를 짚으며 되물었다.
“그게 왜 우리 쪽에 와?”
“그게…… 당한 이들 중에 무림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는 이들은 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즉, 홀로 다니는 상인 같은 이들이 주를 이룬다.
돈이 부족하면 악으로, 깡으로 그냥 혼자 돌아다니는 거다.
그 외에는 낭인이나 여행객인데.
여행객들은 보통 재력이 있기에 호위를 끼고 움직인다.
그렇기에 일반인이 노릴 수 있는 표적은 극히 제한적인데.
그걸…… 젊고 경험 없는 무림인을 노리는 것으로 해결하다니.
심지어 무림맹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맹점을 정확히 찔렀다고 볼 수 있었다.
자고로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
솟구치는 화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남궁선은 지시를 내렸다.
“일단 애들을 보내서 싹 다 잡아 와.”
“단장님.”
“왜, 관과 마찰이 일어날까 봐?”
부관은 칼같이 들어오는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벌의 대상이 무림인이 아니라면 관에서 불만을 토해 낼 것입니다.”
최근 관과 무림은 기이한 대치 관계에 있었다.
물론 세력이 압도적으로 큰 관이 더 우위에 있는 건 맞으나.
무림의 강함은 세력의 크기와는 별개이기에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
이런 문제는 사소하면서도 꽤나 중요한 알력 다툼인지라 섣불리 움직이는 건…….
“협업해.”
“……협업 말씀입니까?”
“그래.”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우리가 양보해서라도 잡아. 싹 다 뜯어고쳐.”
양보해서라도.
그 말에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남궁선의 의도가 뭔지 확실해졌으니까.
자존심, 알력 다툼 그딴 건 상관없으니.
오로지 악(惡)을 멸하는 데만 집중하라.
창천(蒼天)은 결코 악(惡)을 용납하지 않으니.
“존명.”
고개를 숙인 부관이 나가고, 가만히 앉아 생각하던 남궁선은 이내 서신을 다시 읽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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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 가능성 전무.
조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확실하게 움직여 섬멸해 주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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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말이 되나?
설천위의 성격을 생각하면 확실하게 손을 써 뒀으니 이런 말을 적어 놓은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무할 리가.
얘가 흥분해서 너무 막 움직인 거 아니야?
살짝 걱정되는데.
잠시 고민하던 남궁선은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일반인을 붙잡고 처벌하는데, 자신이 움직일 순 없었다.
자신은 대기 인원.
진짜 자신의 힘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움직여야 하기에 이런 일은 부하에게 맡기는 게 옳다.
문파 하나를 박살 낸 후의 뒤처리 같은 거라면 몰라도.
이런 일은 직접 움직일 명분이 안 된다.
그러니.
“그 녀석들한테라도 알려 줘야겠네.”
듣자 하니 설천위가 받은 장원에 가 있다는데.
얘들은 뭐 하다가 떨어져서 이렇게 됐는지 얘기를 들어야겠어.
* * *
“그래서 설 공자는 따로 오는 거야?”
“네!”
서하영의 힘찬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앞서 걸어가며 일행을 바라봤다.
철백과 철백의 가족.
서하영.
그리고…….
‘……또 여자.’
웬 정체 모를 여자.
이름이 백영이라고 했나.
듣자 하니, 암영의적 선배와 연관된 문파의 문도라는데.
설천위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오는 길에도 조금 배워서 그걸 갈고닦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설마 이 여자도 장원에서 같이 살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모두를 안내한 유예린은 설천위의 장원에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와!”
“이게, 정말……?”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담의 끝이 잘 안 보인다.
“설 공자가 받은 장원이에요.”
“……이렇게 큰 걸 받았다고요?”
“네, 황실에서 준 특별 보상이니 사실 이만한 규모도 작은 편이죠.”
아니.
다들 황실, 황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서하영과 철백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할 때.
“와! 오빠, 우리 그럼 이제 여기에서 사는 거야?”
한껏 흥분한 철유의 목소리에 유예린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요. 워낙 넓어서 같이 살아도 충분하지요?”
“와! 와!”
“그럼 들어가서 확인할까요?”
“네! 예쁜 언니!”
진심 어린 철유의 칭찬에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유예린.
그녀의 뒤를 따라 일행은 하나둘 들어갔고.
그렇게 사람들은 장원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마님.”
“마님.”
그리고 가는 내내 마님이라고 인사하는 하인들의 모습에 서하영은 음흉하게 웃으며 유예린의 곁에 붙었다.
“벌써 다 준비가 끝나셨네요. 마님?”
“……그러다가 혼난다.”
“에잉, 있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관리를 안 하면 너무 더러워지니까 하인들을 고용해서 관리했을 뿐이야.”
“에에……. 뭐……. 그렇지요오오?”
히히 웃으며 말꼬리를 늘리는 서하영의 모습에 유예린의 손이 그녀의 귀를 낚아챘다.
그리고.
“아갸가가가!”
“혼나.”
“이미 혼나고 있어요! 언니!”
한껏 빨개진 귀를 붙잡은 서하영은 이내 히히 웃으며 유예린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장난스러운 눈빛을 계속 보내는 서하영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고개를 저으며 미리 정해 놓은 건물로 향했다.
철백과 그의 가족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을,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채.
보통 손님들이 머무는 용도의 건물이지만, 그중에서도 꽤나 안쪽에 있어서 본채와도 가까운 별채였다.
“짐은 이곳에 풀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하인들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언니!”
“저야 안내만 했을 뿐인데요.”
고개를 숙이는 철백의 어머니를 재빨리 붙잡은 유예린은 웃으며 그녀와 함께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철백 가족의 별채 탐방이 이어질 때.
“어? 손님 와 있네?”
“……남궁 단주님.”
“사석에선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휘적휘적 찾아온 손님인 남궁선은 웃으며 철백과 철백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유 동생, 이거.”
“……뭔가요?”
“이상하리만치 늦게 오는 네 낭군님 소식.”
남궁선이 내민 서신을 받아 든 유예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신을 개봉했고.
“……다행이네요.”
멀쩡하다는 내용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이 무림에서 절대 안심이란 건 없으니까.
안도하는 유예린의 얼굴에 히죽히죽 웃은 남궁선은 유예린의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그래서 진짜 이제 암은단(暗隱團)에서 나갈 생각?”
“네.”
“이야, 진짜로?”
가문에서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암은단을 나와?
대단하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궁선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대감에 입꼬리를 올렸다.
새로운 단.
초임 단주와 부단주의 실력과 재능이 역대 최고라고 손꼽히는 수준.
거기다 단주의 인맥으로 들어갈 인재들도 훌륭하기 그지없는 상태.
과연, 그들이 고착되어 있는 구단(九團)의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묘한 기대감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며칠 뒤.
설천위가 도착했고.
“왔는가?”
그는 무림맹주와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