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280화-절망과 절망 (4)
혼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죽는 순간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 강한 원한을 품을 것이라는 착각.
언뜻 보면 맞는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나약하면서도 생각보다 끈질긴 존재다.
그 생명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고, 육체는 기술만 있다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사지가 절단되어도 살아남는 이들이 있듯이.
화염에 휩싸여 피부의 절반을 잃어도 살아남는 이들이 있듯이.
인간은 생각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허나, 과연 정신력까지 그러할까?
그럴 리가.
모든 인간의 정신력이 그토록 끈질겼다면, 고문 같은 쓸데없는 행동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거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절망하고, 굴복한다.
굴복한 마음은 원망조차 잊어버린다.
그저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바라게 될 뿐.
그렇게 죽으면, 제대로 된 원령이 되지 못한다.
그저 찌꺼기처럼 남은 슬픔과 절규가 구천을 떠돌 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처럼.
[살……려…….]
[제……발…….]
이성도, 자각도 없다.
그저 한결같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갈망할 뿐.
망가지고 찢긴 영혼.
“스님.”
그 영혼들을 눈에 담으며 설천위는 무해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한 약속, 못 지킬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설 시주. 일단…….”
“아뇨.”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무해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그의 뜻이 움직이자, 그를 휘감는 영력이 움직인다.
걸어가는 설천위를 따라 흐르는 영력에 절규하는 혼의 파편들이 몸을 싣는다.
그의 몸을 휘감고 흐르는 혼의 절규 속에서 설천위는 걸어갔다.
“제 길은 제가 정해서 갑니다.”
* * *
“무림인 같던데, 괜찮나?”
“마을 외곽에 있는 마구간에 데려다 놨는데 무슨 상관이야?”
“음, 그렇겠지?”
지하실.
달콤한 향과 야릇한 냄새, 거기다 기이한 악취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런데 그 젊은 녀석은 꽤나 값이 나가겠던데, 포기할 필요 있나?”
“에라이! 스님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 몰라?”
“하지만…….”
“만약 소림사의 스님이면? 천벌 받아, 이 인간들아!”
“소림사의 스님들은 엄청 번듯한 가사를 입고 다니지 않나?”
“그렇게 해진 가사를 입고 다니는 소림사의 스님 얘기는 들은 적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촌장은 손사래를 쳤다.
“됐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사람을 굴비처럼 엮어 온 인간이 무림인이 아니면 뭐겠어?”
“쩝, 알겠수. 촌장 말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어차피 요즘 벌이도 좋으니 뭐…….”
촌장의 칼 같은 말에 결국 미련을 접는 사람들.
한껏 풀죽은 얼굴로 몸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며 촌장은 혀를 찼다.
인간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요.
이 정도면 풍족하게 잘 먹고 살고 있는데.
하나둘 자신의 구역으로 가기 위해 일어서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던 촌장은 발밑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놔! 이것아!”
“야…… ㄱ…….”
말조차 제대로 못 하고 축 늘어진 여자.
거적때기조차 걸치지 않은 그녀의 힘없는 손을 가차 없이 발로 차낸 촌장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일어섰다.
“꺼져, 이년아! 이젠 쓸모도 없는 것이…….”
너무 막 굴리긴 했지.
꽤 괜찮았는데.
이젠 반응도 없고, 슬슬 죽을 때가 된 것 같다.
잘 태워서 보내야지.
그나저나.
‘흠, 슬슬 새로운 노리개가 필요하긴 한데.’
마을 놈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자신도 솔직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뭐, 한동안 저기 저 쓸모없는 쓰레기로라도 참게 하면…….
딸랑!
종소리.
자신의 집 근처로 누군가가 왔다는 그 신호에 촌장은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이 지하실은 마을 사람들만 아는 곳.
외부인에게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그렇게 후다닥 밖으로 나온 촌장은 얼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촌장, 안에 있나?”
‘……어린놈이.’
싸가지 없게.
반말로 자신을 부르는 그 어린놈의 목소리에 속으로 욕을 내뱉은 촌장은 이내 웃는 얼굴로 문을 향해 달려갔다.
“예예! 무슨 일이십니까, 나리?”
웃으며 활짝 문을 여는 촌장.
여기서 괜히 어중간하게 쫄면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하게 보인다.
애초에 외부인이 찾아왔다고 쫄 이유가…….
“어,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요? 저야 시골 무지렁이라서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요.”
헤헤 웃으며 가슴 앞에 손을 모으는 촌장.
그 모습을 짧게 바라본 설천위는 웃으며 안으로 발을 넣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차! 이거 제가 실수했습니다요! 죄송합니다! 자자, 어서 들어오시죠.”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설천위를 맞이하는 촌장.
그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 설천위는 자리에 앉았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꽤나 큰 탁자.
그곳에 앉은 설천위는 차를 타겠다며 부엌으로 가는 촌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촌장, 최근에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이 안 왔나?”
“실종자를 찾는 분들이요? 그야 자주 오지요. 이 무림에 사라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요?”
설천위의 물음에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며 차를 끓이는 촌장.
“저희 마을은 무림맹을 향하는 중간에 있으니 꽤 많은 분들이 찾아오십니다요.”
“그게 무슨 소리지?”
“무림맹으로 간다고 하고 연락이 끊긴 자식들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요.”
“그래?”
“예. 길목에 있으니 혹시라도 이 마을에 들렀다 갔나 싶어 찾아오는 분들이 많지요.”
혀를 끌끌 차며 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마을에 들르셨던 분이라면 어디로 향했는지 대강 알려 드릴 수 있는데, 들르시지도 않은 분들은 참…….”
고개를 저으며 일전에는 누가 찾아와서 자신의 딸을 찾는데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촌장.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한숨을 푹푹 쉬는 촌장의 설명이 끝날 때쯤, 물이 끓었다.
“참, 슬픈 일입니다요.”
끓는 물에 찻잎을 넣어 가져오는 촌장.
“무림이 워낙 넓으니 이 산에서 객사했는지, 어디서 해코지라도 당한 건지 당최 알 수 없으니 갑갑할 수밖에요.”
“그렇지.”
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이건 무슨 차지?”
“그냥 저희 마을 근처에 있는 향 좋은 풀을 말린 것이라서 저도 이름은 잘…….”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촌장.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에 가져가 입술에 닿는 그 순간.
“맞다. 촌장.”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촌장은 갑작스러운 설천위의 질문에 필사적으로 당황한 마음을 숨겼다.
“예, 예. 또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요?”
“혹시 무림인에 관한 소문 좀 아나?”
“아우, 나리께서 아시는 것보다 훨씬 모를 겁니다요. 이런 시골에서 무림인분들의 이야기를 어찌 듣겠습니까요?”
“그래?”
촌장의 대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혹시 흑룡성(黑龍星)이라고 아나?”
“예? 흑룡성 말입니까? 아, 그 무림학관에서 유명한……!”
“그래, 최근에 유명해진 젊은 무인이지.”
촌장의 말에 웃으며 설천위는 말을 이었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검과 도를 차고 다닌다는 것.”
설천위의 말에 촌장의 눈이 스르륵 내려갔다.
멈춘 곳은 설천위의 허리춤.
검과 도가 매달려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혼을 보고 다룰 수 있는 술사라는 것.”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촌장은 주먹을 꽉 쥐며 떨림을 멈췄다.
“그, 그렇습니까요? 그, 그것 참 대단하, 하신 부, 분 같습니다요.”
아니, 멈추지 않았다.
떨린다.
으슬으슬 떨리는 육체.
마치 추운 겨울날 맨몸으로 밖에서 한 식경은 있었던 것처럼 몸이 마구 떨려온다.
그제야 촌장은 깨달았다.
자신이 긴장으로 말을 더듬은 것이 아님을.
“촌장.”
“예, 옙!”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무, 무슨 말씀…….”
“사지가 잘려 천천히 죽어 가는 것과 저주에 걸려 천천히 죽어 가는 것.”
천천히 도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설천위는 물었다.
“너는, 무슨 선택을 하고 싶나?”
“저, 저는…… 아,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저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다?”
“그, 그렇습니다! 저, 저는……!”
“촌장.”
촌장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는 도를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놨다.
“너는 방금 그나마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
* * *
설천위가 떠난 직후, 어쩔 수 없이 포로들의 혈을 다시 짚어 재운 뒤 따라온 무해는 절로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미타불…….”
문 너머로도 느껴지는 짙은 피 냄새에 절로 올라오는 슬픔을 삼킨다.
그리고 천천히 여는 문.
그곳에 보인 광경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끄륵! 끅!”
잘린 손목을 움켜쥔 촌장.
그 잘린 손목에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찻물을 붓고 있는 설천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몸을 굽힌 채 꿈틀거리는 촌장의 모습에 무해는 다급히 설천위를 불렀다.
“설 시주! 아무리 그래도 무공도 익히지 않은 일반인에게……!”
“스님.”
경악이 담긴 무해의 외침을 끊으며, 설천위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촌장과 대화하는 사이, 혼들이 찾아낸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
“마침 잘됐습니다. 저도 아직 듣기만 했으니 함께 보러 가시죠.”
“보러 간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무해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설천위는 촌장의 목덜미를 잡은 채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망설임 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설천위의 모습에 무해 또한 결국 불호를 외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기이한 악취가 콧속을 파고든다.
그리고 희미하게 퍼지는 고통의 신음.
계단 끝에 있는 문에 도착한 설천위가 문을 열자, 보인 것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약을 달라고 애원하는 여자를 구타하며 웃고 있는 이들.
손을 뻗으면 가슴을 차 내고.
다시 기어오면 뺨을 쳤다.
“아, 아미타불……!”
순간 끓어오른 분노를 겨우 잠재운 무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헐벗은 여인을 괴롭히는 이들 중에는 여인 또한 포함돼 있었다.
절망하는 여자를 보며 웃는 이들 사이에 여자도 껴 있었다.
단순히 남자들이 성욕에 미쳐 벌인 짓거리가 아니라는 소리.
심지어 꽤나 어려 보이는 이까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
‘마을 전체가……!’
전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알고 묵인하는 수준은 된다는 소리였다.
대체 왜?
강렬한 슬픔과 함께 떠오른 의문에 무해가 자신도 모르게 경전을 외는 순간.
“스님.”
촌장을 집어던지며, 이쪽으로 몰리는 시선들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말했다.
“저 이건 못 참습니다.”
무해는 본인조차 숨이 막힐 정도의 살기에 겨우 눈을 떴다.
참혹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어떻게든 외쳐야 했다.
저들이 죗값을 치르는 방식이 결코 죽음이어선 안 된다고.
그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고.
죽음을 맞이한 죄인 뒤에 남는 것은 풀어지지 않는 피해자의 슬픔과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의 죄책감뿐이라고.
말려야 했다.
어떻게든.
그렇기에 무해가 필사적으로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천천히 돌아간 설천위의 고개에 그 두 눈을 마주한 무해는 오랜만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분노.
그리고 그 밑에 깔린 깊디깊은 슬픔.
스스로를 악인(惡人)이라고 말하는 선인(善人).
‘……아미타불.’
차마 말릴 수가 없다.
저 분노를 잠재울 자신이 없다.
저 슬픔을 위로할 자신이 없다.
정녕 오랜만에 느끼는 자신의 부족함에 무해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너, 너희는 뭐야?!”
“뭐, 뭔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치는 이들을 향해 설천위는 걸어갔다.
저들은 원인이 없는 절망이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고,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타인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그런 절망.
그렇기에.
“절망.”
나 또한 저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리라.
“나는, 너희의 죗값이 만들어 낸 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