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80화 (280/624)

제280화

279화-절망과 절망 (3)

노숙.

꽤나 자주 하지만, 할 때마다 새로운 것.

아마 게임만 하던 때의 천희였다면 하룻밤도 못 버텼을 거다.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어서 목이 한껏 굳은 상태인데 노숙 같은 걸 했다간 그대로 목이 나가 버릴 테니까.

무인으로 살면서 여러모로 유연성을 높이고 근육량도 늘리다 보니 지금은 할 만하지만.

솔직히 그래도 뻐근한 건 뻐근한 거다.

운기 좀 해 주고, 운동 좀 해 주면 풀리지만.

여하튼.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가볍게 운기하고, 몸을 풀고 있는데…….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훈계 아니겠느냐?]

[설법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구나.]

아니, 저게 무슨…….

가볍게 기초 초식의 연습으로 시작한 아침 운동.

마보와 그 외에 기타 등등의 훈련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시간.

밖에서 하는 훈련이고, 혹시 모르니 짧게 했다곤 하지만.

“……진짜 대단하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일중생해(一眾生解) 무수중생해(無數眾生解) 평등고(平等故) 욕득불가설차별해(欲得不可說差別解) 방편지광명고(方便智光明故)…….”

[화엄경이구나.]

[17권의 내용이다.]

“예?”

뭐라고?

17권?

미친, 그럼 내가 자고 일어나서 운동하는 동안 16권 분량의 경문을 읽어 준 거야?

[네가 일어나기 전부터 일어나 경문을 읽더구나.]

“……진짜요?”

아무리 내가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고 해도 경문 읽은 소리를 못 들었다고?

[널 배려해서 기막까지 치고 읽더구나.]

……독하다, 독해.

물론.

“효과는 없을 것 같은데…….”

[음, 반도 이해 못 하지 않겠느냐?]

천마의 긍정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경전이란 건 본래 상당히 어려운 서적이다.

원래 깨달음이란 것이 딱 정해서 말하면 왜곡되기 쉽다.

그 유명한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정리했다고 논어도 그 뜻풀이에 논란이 있다.

하물며 신(神)적인 존재인 부처의 깨달음을, 그것도 번역해서 가져온 경문이라면?

저렇게 본문을 그냥 들어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생을 끼고 사는 중들도 노년에 읽으면서 그 뜻을 새롭게 깨우친다는 것이 경전인데.

괜히 설법(說法)이라는 행위가 등장한 게 아니다.

어려운 경전의 뜻을 풀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 설법이니까.

뭐, 현대에서 교회의 목사님들이 하는 것이 그 비슷한 일이고.

물론.

그렇기에 자기 해석을 더해 사람들을 흔드는 사이비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혹 그걸 경계해서 저리 원문을 읽어 주는 거라면…….

“……아닌데.”

아니, 내용을 곡해하고 뭐고 이해 자체를 못 할 텐데 저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를 실천하고 있는 무해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아미타불. 설 시주님, 수련은 끝나셨습니까?”

“무해 스님은 수련 안 하십니까?”

“지금 마음의 수양을 쌓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설마 여기서 이 인간들의 정신을 고치기까지 며칠이나 노숙할 건 아니죠?”

“아미타불, 물론입니다. 일단 가까운 마을로 가서 비를 피할 곳은 찾고 짧게 머물 생각입니다.”

“……짧게 그게 돼요?”

“무슨 일이든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고?

거, 고급지게도 말씀하시네.

이게 바로 종교적 화법인가?

부드럽게 웃으며 붙잡은 녀석들의 마혈을 푸는 무해를 가만히 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 녀석들을 그냥 풀어 줄 게 아니라면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무해랑 적당히 좋은 관계만 만들고 무림맹에 도착하면 될 일이다.

솔직히 교화라는 행동의 의미를 설천위는 이해 못 한다.

죄를 지었다?

그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면 된다.

현대에서야 뭐 가두는 것만으로 벌이 된다며 노역을 금하고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며 여러모로 챙겨 주지만, 지금 이 시대가 어딘가?

무림(武林)이 있는 중세 시대다.

중범죄로 걸린다?

대체로 죽는다.

사형 선고가 떨어지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뭐 집행도 금방금방 이뤄진다.

만약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다?

그럼 뭐, 대체로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노역장으로 끌려간다.

그냥 가둬 놓으면 밥만 축내니까.

오히려 이 두 가지가 더 힘드니 차라리 사형을 바라는 죄수도 있을 정도고.

경범죄?

곤장 맞고 엉덩이가 곪아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재범률?

높을 리가.

다시 사회로 나가서 범죄를 저지를 놈들의 반수 이상이 죽는데.

범죄자 먹여 살릴 세금으로 생계에 쫓겨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게 우선이다.

당장 굶어죽을 빈민이 어디 한둘인가?

물론, 이 시대엔 그런 일도 잘 안 일어나지만.

중간에 착복하는 새끼들이 좀 많아야지.

여하튼, 설천위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시대에 교화란 별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현대에도 교화의 실효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는데, 과연 여기에서?

아니, 물론 무해에겐 그만의 독특한 힘이 있긴 하지만…….

“시주, 가시지요.”

“아, 네.”

생각에 빠졌던 설천위는 자신을 부르는 무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쫓았다.

열한 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묶어서 데리고 가는 무해.

그 뒤를 따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 * *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시주.”

“아뇨! 아뇨! 이런 곳밖에 못 내어드려서 제가 죄송하죠.”

“비를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무해를 따라 도착한 작은 마을.

그곳의 젊은 촌장에게 마을 외곽에 있는 버려진 마구간을 안내받은 무해와 설천위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미타불, 설 시주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음.”

“따로 계획하신 것이 없으시다면, 함께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함께하자.

그 말에 설천위는 구석에 몰려 앉아 있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워낙 시끄러워 자신이 직접 아혈을 짚어 입을 다물게 한 놈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놈들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는 거다.

조직에게서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받았을 녀석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다.

“……좀 지켜볼게요.”

“아미타불, 좋은 선택입니다.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견문을 넓혀 주는 훌륭한 스승이 되는 법이지요.”

설천위의 결정에 흐뭇하게 웃은 무해는 다시 포로들의 앞에 앉아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작은 글자가 빼곡히 차 있는 경전 모음.

보다가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그 경전은 조심스럽게 넘겼는지 귀퉁이만 닳아 있었다.

“욕어일체묘해(欲於一切妙解) 대해무량해(大解無量解) 정위해중(正位解中) 득여래해탈(得如來解脫) 무장애지고(無障礙智故)…….”

아침에 했던 것처럼, 그저 경문을 읽어 나갈 뿐인 행동.

그 뜻을 풀어 주지도, 이해시켜 주지도 않는다.

그저 읽고, 또 읽는다.

마구간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는다.

감긴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어둠뿐.

그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무거우나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그저 차분하게 스며든다.

소리가 스며든다.

그런 느낌이 든다고 느꼈을 때, 이미 그 기분 또한 차분해지고 있었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천천히 흘러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서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발아래를 내려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그건, 붉게 물든 연못이다.

아니, 피로 물든 연못이다.

여태껏 무시해 왔던,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피로 이루어진 연못.

인지한 순간, 짙은 혈향이 콧속으로 파고든다.

그 말도 안 되는 불쾌감이 본능을 자극한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지만, 그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는 피의 향연만이 펼쳐진다.

새빨갛게 변한 시야.

피의 연못에서 올라오는 것은 죽은 이들의 얼굴이다.

목이 베인 자.

가슴에 베인 자.

팔이 베인 자.

갖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기억.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죽음의 기억.

그 속에서 설천위는.

‘나는.’

그 죽음들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피의 연못에서 올라오는 얼굴을 발로 짓밟는다.

죄책감?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그것이 발을 묶는 족쇄가 되진 않는다.

자신이 만들어 낸 죽음이 그들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들이 만들어 낼 가능성이 한없이 죄에 가깝다면.

자신은 기꺼이 그 죄를 끊어 낼 것이다.

자신이 죄를 짓더라도.

자신과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설천위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을 때.

처음 산적들과 마주했을 때.

유예린이 죽음 직전까지 몰린 것을 마주했을 때.

자신은.

“아미타불…….”

죽음을 받아들였다.

“……시주, 내려놓지 않으신 것입니까?”

“스님.”

씁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해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그 하늘을 짧게 바라본 설천위는 다시 무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스님처럼 스스로를 희생할 그릇이 못 됩니다.”

“스스로를 희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주님 본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스님, 저는 혼을 봅니다.”

죽은 이들을 볼 수 있다.

사실 패령안이 완성되고 자잘한 혼들을 엄청 많이 봐 왔다.

웬만한 혼들은 알아서 성불되기도 하고, 자신의 압도적인 영력에 말도 못 거니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누군가는 남은 자식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남은 부모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남은 형제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남은 친구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남은 연인을 걱정한다.

그리고 그 걱정의 끝.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죽어서 사랑하는 이들을 걱정할 바에 살아서 피의 웅덩이를 걷겠습니다.”

“……아미타불.”

씁쓸함이 가득 담긴 불호와 함께 무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주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 말을 아끼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후에 있을 후환이 귀찮아 생명을 빼앗진 말아 주십시오.”

“자비를 보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적을 향한 자비가 아닙니다. 설 시주, 본인을 향한 자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나를 향한 자비.

그 말에 잠시 고민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설천위의 대답에 옅은 미소를 지은 무해는 다시 앉아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졌어.’

조금 전의 스며드는 그 감각이 사라진 것을 인지한 설천위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무해의 스킬이 작용하고 자신의 부동심이 그걸 이겨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의 그 상황은 썩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효과, 장난 아닌데?’

자신의 부동심을 가지고도 그렇게 길게 시간을 끌 정도로 무해의 스킬이 강력한 건가?

하긴, 上中(상중)이면 강할 만하지.

적들이 교화될 만도 하네.

대충 무해의 능력에 대해 감을 잡은 설천위는 다시 가만히 앉아서 무해가 경전을 외는 것을 지켜봤다.

아무래도 저 경전을 읽는 동작이 패시브를 강하게 활성화시키는 것 같은데…….

게임에서는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생각, 저 생각을 따라 가만히 무해를 지켜보길 잠시.

“음?”

뭔가 묘한 감각에 설천위는 자세를 좀 더 바르게 고쳐 앉았다.

그리고 집중한다.

무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무언가.

내공은 당연히 아니고.

영력에 가까운 무언가다.

다만, 영력과도 달라 여태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공보단 영력에 가까운 것 같으니 어떻게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한 설천위는 천천히 영감을 끌어올렸다.

평소에는 잡령의 잡념까지 전부 잡아내기에 시끄러워서 일부러 억눌러 놓는 영감.

거기에 더해 패령안의 힘까지 더하자.

[제……발…….]

[차라리…….]

[나를…….]

피를 차갑게 하는 끔찍한 절규가 설천위를 휘감았다.

고개를 돌리니, 강제로 찢기고 헤집어져 허공을 떠다니는 혼의 파편들이 보인다.

설천위조차도 영감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혼들의 절규.

다만.

“……스님.”

“아미타불, 무슨 일이십니까?”

“이 마을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무해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혹시 느껴지시는 게 있으십니까?”

쓸쓸함이 담긴 의문.

“스님께서도 뭔가 느끼는 게 있으시군요.”

그 의문이 오히려 답이 되었기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많다.

일단.

많다.

진짜.

더럽게도 많다.

절규하면서도 희미한 혼.

그것은 지치고 지쳐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죽었고, 원한조차 품지 못해 희미하게 떠도는 원령이었다.

“아무래도 이 마을 싹 다 뒤집어엎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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