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278화-절망과 절망 (2)
불살현불(不殺顯佛) 무해.
지금은 서승(恕僧)이라고 불리고 있는 무림의 신흥 강자.
그 독특하기 그지없는 신념으로 큰 관심을 받는 불자(佛者).
“아미타불…….”
그런 무해와 같은 전장에 선 설천위는 저 불경 소리가 참으로 마음에 안 들었다.
“시주께서는 짙은 혈향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아니, 그건…….”
“분명 어쩔 수 없는 살업이었겠지요. 허나, 시주께서는 그만한 힘을 가지신 분. 몸에 밴 혈향을 씻어 내고 새로운 도(道)를 찾아서 나아가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아니, 왜 훈계를 나한테 하냐고.
저기서 우릴 죽이려고 애쓰는 놈들한테 해야지.
거기다.
“아미타불.”
몸을 옥죄는 술법을 간단하게 풀어 버리는 무해.
그 모습을 보아하니 괜히 도와주러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대체 내공이랑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면 영력 하나 없는 인간이 술법을 저리 간단하게 파쇄하냐.
[허허, 정녕 강철과 같은 사람이로구나.]
[정파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녀석이군.]
감탄이나 할 때에요?
지금 내가 죽겠는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의 검을 쳐 낸 설천위는 단숨에 그 목을 치려다가 움찔 멈췄다.
눈앞에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적을 내버려두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해의 시선이 느껴져서다.
“아미타불, 참 잘하셨습니다. 설 시주.”
“아니, 진짜 이렇게 갈 거예요?”
“대화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기본. 소통하다 보면 분명 그 뜻이 통하기 마련입니다.”
“크아압!”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대화와 소통을 말하는 무해를 향해 달려드는 적의 눈깔엔 이성이라는 게 없었다.
가득 찬 흥분, 사고라는 것이 아예 없는 듯한 거친 행동.
생각해 보면 이 전투에 합류한 뒤부터 적들의 입에서 사람다운 말이 나온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이 미친 땡중이!”
“정녕 미쳤구나!”
“그딴 짓이 통할 것이라 생각하냐!”
같은…….
“시주, 생각이 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차 실수, 제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아니고요. 그, 보통은 적들이 그렇게 외치지 않을까 해서요.”
[어허, 이놈이? 네 녀석보다 한 배분은 더 높은 스님께 무례하구나!]
[이 녀석은 가끔 예의를 밥 말아 먹는 경우가 있지.]
아니거든요?
그냥, 살짝 찔러 본 거거든요?
“아미타불, 이해합니다. 확실히 적이라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요.”
부드럽게 웃으며 적의 공격을 받아 내는 무해.
설천위의 말을 정말 실수라고 여기는 것인지, 무해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렇기에 이분들에게 과격한 방식을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
“조종당하고 있는 마음을 아직 원래대로 되돌리지도 못했는데, 어찌 몸부터 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래요?”
그게 뭔 개소리이시죠?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말을 걸고 계신 건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속죄하면 피 냄새를 씻어 낼 수 있습니다. 밝은 태양 아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되찾으십시오. 시주. 정신을 차리면 자신의 죄업이 보일 것입니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속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게 설득이었어?
난 시비 걸고 있는 줄 알았지.
에라이!
마왕 잡겠다고 십 년을 함께한 용사의 동료도 그딴 말엔 정신 못 차리겠다!
이 무슨 개 같은 헛짓거리…….
“끄아아압!”
“……응?”
“아미타불!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스스로를 되찾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아니, 미친.
[……허허, 정녕 뛰어난 불도(佛道)로다.]
[중후하기 그지없구나.]
저게 왜 통해?
혼들의 감탄과 별개로 헛웃음을 지은 설천위는 이내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너무 난이도가 높아서 제대로 플레이해 본 적 없는 무해.
한 번 클리어한 게 고작이라 제대로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진짜, 진짜 특이한 스킬이 몇 개나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중 하나.
[현불(顯佛)].
현현한 부처라는 뜻의 이 스킬은 무해의 패시브 스킬 중 하나로.
그 효과는.
[언행으로 상대방을 서서히 감화시킨다.]
이것뿐이다.
그 어떤 효과도 없이.
그저 저거 딱 한 줄.
저게 스킬 설명의 전부다.
스킬의 등급이 무려 上中(상중)인데.
심지어 저것마저도 딱 한 번 실수로라도 적을 죽이면 사라진다.
물론, 설천위가 무해를 플레이할 때 중반까진 어떻게 불살을 유지했지만 끝까지는 불살을 유지하지 못한 채 마지막에 도달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불살을 깨면 캐릭터의 스펙은 낮아지는데 오히려 게임은 쉬워진다.
전투에선 상대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그렇게 크다.
여하튼, 그런 미친 난이도를 가져서 뭐 하는지도 잘 모르는 스킬이 [현불(顯佛)]이었는데.
‘……이게 그 효과인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는 적의 모습에 설천위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 인간들이랑 며칠이나 싸웠어요?”
“아미타불, 사흘 정도 됐습니다.”
……이런, 미친.
무인이라면 내공을 이용해 며칠 밤을 새우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게 전투를 하면서는 아니다.
전투하면서 며칠 밤을 새우면 아무리 무인이라도 뒈질 것처럼 힘들다.
게다가 상대는 다수.
당연히 자신들의 일부는 휴식을 취하면서 적은 아예 휴식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도록 마구 몰아붙였을 터인데.
대체…….
“사흘 정도면 좋은 징조입니다.”
“……네?”
“보통 이렇게 피 냄새가 짙은 분들은 닷새는 지새워야 하는데……벌써 이리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는 분이 나오시다니……. 아미타불.”
아니, 이 인간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럼 여태까지 혈교나 혈사련, 이런 인간들 만나서 싸우면 다 기본 닷새 이상 싸웠다고?
[허허, 어찌 살아 있는 것인지 궁금하구나.]
[소림의 체력 단련이 엄하기로 유명하긴 하나, 이 정도는 아닐 터인데.]
그렇지.
응.
사람이면 그럴 수 없지.
혼들의 감탄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적들을 둘러봤다.
무해의 능력인지, 아니면 진짜 그 말에 영향을 받은 건지 주춤하기 시작한 적들 사이로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술사.
자신의 등장과 함께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녀석.
솔직히 말해서, 불살이니 뭐니 그런 소리만 안 했다면 즉각 달려가 놈의 목을 베어 버렸을 테지만…….
“그럼, 단순 제압은 괜찮은 거죠?”
“아미타불, 신체에 큰 손상을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제압이라면 추후 교화를 진행하면 되기에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구나.
무해의 허락을 얻은 설천위는 손을 들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흔히들 핑거 스냅이라고 하는 동작.
경쾌한 딱 소리와 함께.
“허어, 아미타불…….”
감탄한 무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숨에 모든 적들을 속박한 흑관들.
이곳에 도착해 무해와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적들을 상대하면서 은밀하게 뿌린 영력의 결실.
단숨에 모든 적들의 움직임을 제약한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서 무해를 바라봤다.
“자, 이다음은 어찌하실 건가요?”
* * *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설 시주.”
제압한 이들은 전부 묶고 마혈까지 짚어 제압한 뒤.
감사 인사를 하는 무해를 향해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뭐, 지나가는 김에 도와드린 거니까요.”
“아미타불, 시주께서 굳이 이곳으로 달려와 도움을 주신 것을 알고 있으니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눈빛.
얼굴 곳곳에 가득한 흉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미소.
‘……진짜 말 안 되네.’
가만히 있을 때는 흉신악살 같은 얼굴인데, 왜 웃으면 보살처럼 보이지?
“시주께서 도움을 주셔서 다음번엔 조금 더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
아니, 그게 뭔…….
“아미타불, 이분들을 이대로 풀어 드릴 순 없기에 충분한 대화를 한 뒤에 무림맹으로 모셔 갈 예정입니다.”
“아.”
난 또 그냥 풀어 준다는 줄.
그런 미친 짓을 한다고 하면 내가 그냥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다행이네.
여기서 풀어 주면 다른 사람들이 죽을 텐데.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시주, 눈빛에 살기가 서려 있습니다. 이분들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 그렇죠?”
“아미타불, 참으로 슬픕니다.”
응?
갑자기 왜 슬퍼?
너무 뜬금없는 말.
그 말에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자, 무해는 정녕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주께서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계신 것 같기에 슬프다,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이 불쌍해서요?”
그건 좀 짜증 나는데?
설천위의 미간이 좀 더 깊게 파이고.
그 감정을 읽었음에도 무해는 슬픔을 담은 목소리로 찬찬히 대답했다.
“시주께서 불쌍하여 그렇습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서글픈 목소리로 말하며, 무해는 염주를 굴렸다.
“그런 마음을 품고 검을 휘두르는 무인 중 살인에 짓눌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불살(不殺).
그것은 죽음을 멀리하는 것.
살인(殺人)이란.
죽은 사람이 고통 받지 않는다.
죽는 이가 받는 고통은 아주 찰나 혹은 아예 없는 수준.
고통 받는 것은 그 주변 사람들이다.
설령 연고가 없는 흉악한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그 범죄자를 죽인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정의로우면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올곧으면 올곧은 사람일수록.
살인은 죄가 되어 스스로에게 찾아온다.
거리에서 죄인의 목을 베는 망나니도 칼질을 할 때 술을 마신다.
정신이 흐릿한 상태에서 죄인의 목을 베기 위해서다.
한데, 무인은 가장 날카로운 정신 상태에서 상대의 목을 베는 모든 과정을 목도하고 느낀다.
상대의 방어를 뚫고, 자신의 죽음을 자각한 절망에 빠진 눈을 마주하며, 그 목과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다.
달라붙는 살점을 헤집고 들어간 검이 뼈에 막히는 감각.
그 검을 뺄 때의 강렬한 저항감은 단순히 물리적인 저항감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뺏는 마무리이기에 오는 저항감이다.
살인(殺人)이란 것은 이토록 잔인하다.
죽는 이에게도, 죽이는 이에게도.
그것을 즐기는 천인공노할 이들도 있으나.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인명의 소중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요?”
최소한 눈앞의 젊은 무인은 아니다.
삐뚤어진 고개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를 보며 무해는 오랜만에 먼저 동행을 제안했다.
“며칠 정도 저와 함께 움직이시지 않겠습니까?”
“전 무림맹으로 가야 하는데요.”
“잘됐습니다. 이분들과 대화가 끝나면 무림맹으로 갈 예정이었으니 함께 움직이시지요.”
“그…….”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설 시주.”
정녕 기뻐하며 합장하는 무해를 향해 한숨을 쉬며 합장으로 대답한 설천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근처에 있는 돌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무해가 어떤 식으로 교화를 하면서 돌아다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해 정도의 선인이랑은 친해져서 나쁠 게 없었다.
저쪽 마차에는 철백이랑 서하영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방학이야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
“그래서 일단 뭐부터 하실 건가요?”
설천위의 합류에 기뻐하며 제압한 이들의 상태를 살피던 무해는 부드럽게 웃으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배가 고프……긴 하네요.”
“그러면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죠. 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님이랑 같이 먹어야 하니 딱히 사냥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근처에서 열매라도 따 와서 먹어야 할 터이니.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숲 쪽으로 걸어가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무해는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이 짧은 동행이, 그의 피 냄새를 조금이라도 지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 * *
“스님.”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
“저 이건 못 참습니다.”
압도적인 살의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어떻게라도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던 무해는 정녕 오랜만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검붉은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것은 강렬한 분노와.
‘아미타불…….’
깊디깊은 슬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