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274화-졸업 선물? (6)
‘이거구나.’
바람을 타고 기묘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
무언가가 사방을 포위한 듯한 느낌.
조금 전까진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실의 존재감이 바람을 타고 흘러온다.
그리고 그 존재감 사이로, 여태까지 못 맡았던 것이 이상할 정도의 역한 피비린내가 스며들어 그 존재를 알린다.
“후웁.”
호흡을 들이마시고, 창을 겨눈다.
눈앞에서 철퍽대는 괴물이 기어오지만 무시한다.
지금 봐야 하는 것, 그리고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바람의 길.
[풍영류창(風泳流槍) 제5초 인풍(刃風)]
창날에 휘감긴 바람이 그 창날의 예기를 품고 나아간다.
거대한 바람의 창을 휘두르는 것처럼.
공간을 뛰어넘은 창이 목표에 닿는다.
바람을 통해 전해져 온 절삭음과 여태껏 나던 피비린내와는 다른 신선한 피의 냄새가 공격의 성공을 알린다.
쿵!
성공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서하영은 크게 진각을 밟으며 창을 당겼다.
그리고.
“흡!!”
[풍영류창(風泳流槍) 제6초 폭풍(爆風)]
창을 쥔 두 손에서부터 솟아오른 내공이 거대한 바람을 만들어 낸다.
이윽고, 창 전체를 휘감은 바람은 거센 돌풍이 되어 창날의 끝에 모인다.
그리고 일격.
당겼던 창을 땅에 내려찍는 순간.
응축됐던 바람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 낸다.
그 바람 하나하나가 예기(銳氣)를 품은 창기(槍氣)의 파편.
서하영의 주위를 서서히 포위해 나가던 혈윤귀의 몸이 조각조각 분쇄되어 흩어진다.
단 일격.
공격을 받은 상대가 자신의 자세를 고쳐 잡고 대응을 위한 준비를 하는 그 시작 단계에서 터진 일격은 대로(大路)를 만들어 냈다.
물 흐르듯 이어진 초식의 빠름이 만들어 낸 거대한 길.
그 길 끝.
당황스런 감정이 섞인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과 눈이 마주친 서하영은 창을 뒤로 당기며 자세를 낮췄다.
왼손으로 땅을 짚고, 두 다리는 굽힌다.
그리고 여인이 부적을 꺼내 흩뿌리려는 그 순간.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서하영의 몸이 사라졌다.
이제 막 손을 떠난 부적이 허공에서 갈라진다.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 억지로 높여 왔던 인지 능력에 따라가지 못하는 몸은 찢어진 부적에서 흐트러진 영력을 붙잡기 위해 노력한다.
허나.
“하……!”
쾅!!
늦었다.
단숨에 여인의 목을 창으로 가르는 서하영.
거대한 충격이 여인의 몸을 그대로 날려 버린다.
단숨에 나무 몇 개분의 거리만큼 날아가는 여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무사할 수 없을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정작 혀를 찬 것은 서하영이었다.
손에 감각이 없었다.
창을 튕겨 내는 반탄력만 있었을 뿐, 베어 낸 감각이 없었다.
베어 내려고 휘두른 창이었는데.
“호호, 참으로 과격한 계집이로구나.”
수 장을 날아가 겨우 멈춰 선 여인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뭇가지 위에 섰다.
그만한 공격을 받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론.
‘……위험해.’
속내는 그렇지 않다.
조금 전의 일격을 막아 낸 것.
죽어라 쥐어짠 방어 술법 덕분이다.
다리를 베인 직후, 부적을 뿌리며 시선을 끌고 은밀하게 펼친 방어 술법.
순간적으로 펼치느라 힘 조절을 못 해서 기껏 모아 놓은 힘을 낭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괴물 같은 년.’
낭비가 아니었다.
만약 어설프게 힘을 아낀다고 술법의 위력을 조절했다면, 그대로 목이 베였을 거다.
“순순히 포기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에요.”
“……흥, 어린 계집이 말이 많구나.”
“아직 몇 마디 안 했는데요.”
당돌하게 대답하는 서하영.
아까 전까지 여인이 있던 자리에 선 서하영은 창을 땅 쪽으로 내린 채 여인을 바라봤다.
“순순히 항복하면, 죽음이 그리 고통스럽진 않을 거예요.”
“흥, 그것도 협박이라고 하느냐?”
가볍게 코웃음 치며, 부적을 꺼내는 여인.
“술사라고 모두가 무인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애송아.”
여인이 부적을 던지는 순간.
아래를 향하고 있던 서하영의 창이 바로 섰다.
아니, 바로 섰다고 여인은 생각했다.
십수 조각으로 갈라진 부적이 눈처럼 흩어진다.
술법으로 인지 능력을 끌어올린 상황에서도 전부 포착해 내지 못한 창술.
아니.
보긴 봤을 것이다.
단지 경험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해 흘려보냈을 뿐.
“설마 창이라는 무기 앞에서 부적을 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창이 닿을 거리가 아니잖아!’
아니, 무슨…….
가소롭다는 듯 묻는 서하영의 태도에 헛웃음을 흘린 여인은 부적을 쥔 팔을 내렸다.
“뭐, 좋아.”
“항복할 생각이 들었나요?”
“아니.”
항복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리를 뺏겼을 때 무인이란 놈들이 상대하기 힘든 족속이란 것을 새삼스레 한 번 더 느꼈을 뿐.
“내 유리함은 변하지 않아.”
변하지 않는다.
지금 저 무식한 무인 계집애가 착각하고 있는 것.
저 계집은 자신의 혈윤귀를 무력화시키고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을 텐데?”
지켜야 할 사람.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서하영은 조잡한 담장을 넘고 있는 혈윤귀들을 발견했다.
자신에겐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이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철백의 가족들에겐…….
위기의 순간.
지금 당장에라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서하영은 고개를 돌렸다.
“어머? 버리게?”
“아뇨.”
짧은 대답과 함께, 서하영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존재를 향해 말했다.
“포위망을 풀고 집을 지켜 주세요.”
“어머? 진짜? 그럼 날 놓칠 텐데?”
“당신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습니다.”
서하영의 당찬 대답에 여인은 조심스럽게 펼치던 영력에서 느껴진 무언가에 입꼬리를 올렸다.
흩어지고 있다.
자신을 감싸던 영력의 실들이.
조금 전, 저 어린 계집의 창에 맞아 날아갈 때 발목이 절단되는 것이 아니라 영력의 실이 끊어졌었다.
아마도 살아 있는 인간을 절삭할 정도의 위력은 없다는 거겠지.
식령(式靈) 대부분이 갖는 한계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능력으론 자신을 붙잡아 두는 데는 한계가 있다.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쉽게 묶이진 않을 테니까.
영력을 쓰는 존재라면 아예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고.
고작 저런 식령 하나로는 자신을 붙잡지 못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계집이 혼자서 자신을 붙잡을 수 있는가?
그럴 리가.
술법으로 눈을 속이고 도망치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
즉, 둘 중 하나라도 집을 지키기 위해 빠지는 순간 주도권은 자신에게 넘어온다는 소리다.
실패작인 혈윤귀들이 이리도 도움이 될 줄이야.
너무 느려서 아예 쓸모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이란 참 모르는 법이라니까.
소매로 크게 올라간 입가를 가리며, 여인은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한 서하영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참으로 탐나는 소재지만…….
‘무리하면 안 되지.’
저쪽이 이쪽의 술법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도 저 계집의 창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제압해서 끌고 가겠다는 건 비현실적인 욕심이지.
빠르게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한 여인은 물러서는 것을 선택했다.
일단 물러서서 챙길 건 챙기고 도망치자.
저 계집이 저 정도라면 흑철파를 무너트린 철백이라는 놈이나 그 친구 녀석도 무공이 상당한 수준일 터.
그 둘이 합류하면 자신이 너무 불리해진다.
거기다.
‘……술사가 있어.’
지금 이 실을 다루는 식령을 풀어놓은 술사가 있다.
아마 그 친구 놈일 것 같은데, 술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의 불리함은 상당히 커진다.
자신은 저들의 무력을 이길 수 없는데, 저쪽에선 이쪽의 영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소리니까.
이쪽은 패가 하나밖에 없는데, 저쪽은 다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발악해 보아라.”
물러나자.
입으로 생각과 다른 말을 내뱉으며, 여인은 부적을 뿌렸다.
동시에 갈라지는 부적들.
공격보다도 부적을 최우선으로 파쇄하는 서하영의 행동은 무인들이 술사를 상대할 때의 기본이다.
그게 맞는 행동이기도 하고.
실력이 부족한 술사든, 실력이 뛰어난 술사든 부적을 써서 술법을 발동시키는 건 기본이다.
부적을 써야 위력이 강해지니까.
물론, 그렇기에 실력이 뛰어난 술사들은 부적 없어도 쓸 만한 수준의 술법을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여인처럼.
바꿔치기.
분신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은신한 본체는 물러난다.
이제 이렇게 저 계집을 따돌리고 거리를 벌리면, 몇 개 정도의 함정을 뿌려 놓고 도망치면 된다.
이 넓은 대륙에서 도망치는 순간, 주도권은 자신의 것이 되니까.
인간도(人間道)가 추악함으로 가득한 것은 이 땅이 너무 커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도망자에게 유리한 세상이다.
복수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다음에 하면 된다.
이런 동네 같은 시골은 차고 넘치니까.
필요하면 혈교나 혈사련 같은 조직에 손을 내밀어도 되고.
그런 곳에서라면 자신과 같은 인재는 크게 환영할 테니까.
물론, 뒤가 상당히 찝찝해져서 그런 곳과는 손을 잡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완전하게 몸을 빼낸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자신의 분신을 상대로 신중을 기하고 있는 저 계집의 모습이 어찌 웃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신이 뿌리는 부적이나 제거하면서 뒤에 있는 집 안의 상황을 힐끗거리는 꼴이 참…….
“재미있네.”
……내가 방금 말을 했던가?
아니, 그 전에 내 목소리는 저리 굵지 않은데?
명백하게 남자의 목소리.
등줄기를 타고 강렬한 오한이 엄습한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고 땅을 박찬다.
그와 동시에 흩뿌린 부적이 상대를 속박하기 위해 달려들지만.
“조잡하네.”
파쇄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서 있을 뿐인데, 그의 몸을 향해 날아가던 부적들이 마치 모닥불에 뛰어든 벌레처럼 재가 되어 흩어진다.
동시에.
“컥!”
달리던 몸이 무언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강렬한 충격에 딱 멈춘다.
충격에 쥐어짜진 폐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고.
“이 아줌마는 또 왜 이리 냄새가 역겨울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손을 뻗는 상대의 모습에 여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도저히 손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손을 뻗은 것에 대한 의아함 따윈 없다.
몸이 움직이는 것은 그저 본능일 뿐.
일단 웅크려서 어떻게든 다음 기회를……!
“커헉!!”
순간, 웅크린 몸 전체가 거대한 거인의 손에 붙잡힌 것 같은 압박감에 짓눌린다.
“사, 살……!”
“응. 아쉽게도 아줌마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느긋한 목소리와 달리, 여인의 몸을 옥죄는 손아귀의 힘은 더욱더 거세진다.
뿌득! 뿌득!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필사적으로 쥐어짠 영력으로 반항하지만, 압도적인 질의 차이가 그 반항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쪽의 영력이 뻗어 나가면, 저쪽의 영력에 잡아먹힌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쪽의 존재를 집어삼킨다.
“끅! 끅!”
이제는 앓는 소리밖에 낼 수 없게 된 시점.
영력을 뿜어낼 여유조차 완전히 사라진 여인이 손을 뻗었으나.
뿌드득!
무언가 중요한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작은 반항조차 사라진다.
“오셨어요?”
“흑사가 신호를 보내서 바로 뛰어왔지. 그나저나 아까 그 허세는 뭐야?”
“저한테 시선을 끌어 보려고 했죠.”
술사를 추적할 능력도 없으면서 당당하게 자신이 반드시 잡는다고 선언하던 서하영의 모습을 떠올린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당차고 좋긴 했어.
덕분에 시선도 끌렸고.
그나저나.
“단순 잡범이었나.”
술사로서의 역량이 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산 제물을 바쳐서 이 정도는 술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잡범조차 활개를 치는 상황이다.
진짜.
‘……가고 있네.’
절망이 곳곳에 피어나는 혼란의 시대.
전쟁 없는 전란의 시대.
이야기 속의 절망엔 개연성이 있지만.
현실 속의 절망엔 개연성이 없는 것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가족이 죽고, 이웃이 죽는 죽음의 시대.
육도의 메인 챕터의 시작.
인간도(人間道).
“돌아가면 바로 무림맹으로 갈 준비부터 해야겠어.”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