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268화-갑(甲) (8)
“아.”
혼들의 보고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호위로 살존이 움직이고 있으면 인정이지.
저쪽 세력에서 미친 척하고 자신들의 최대 전력을 꺼내 놓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막고도 남을 거다.
거기다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부하들까지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
“거참, 생각지도 못한 호사인데.”
너무 든든해서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
심지어 혼들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며칠이나 지나서 겨우 알아냈다.
대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거야?
슬슬 축제가 끝나가기 시작하는데, 이제야 알아내서 상당히 아쉽네.
미리 알았으면 손이라도 좀 보태는 건데.
“천위.”
“응?”
“하나 궁금한데, 물어봐도 되나?”
“어. 물어봐.”
나는 네 어깨에 짊어진 중량이 얼마인지 궁금하다만.
어느 순간부터 세는 걸 포기했더니 이젠 대체 얼마나 무거운지 감도 안 잡히네.
축제의 마지막 날 아침.
철백과 함께 여느 때처럼 하체 단련에 집중하던 설천위.
물론 설천위의 어깨엔 철백처럼 무식한 무게는 안 실려 있었다.
한 200㎏ 정도?
이 정도면 평범한 수준이지.
사실 들려면 더 들 순 있지만, 근지구력을 위한 수련인지라 적당한 무게를 들었다.
“살존 말이다. 네 성격상 그렇게 쉽게 용서해 줬다는 게 이해가 안 가서 말이다.”
“아.”
용서해 줬다기보다는 그냥 넘어간 거지만.
애초에 용서하고 말 것도 없지.
“철백.”
“음.”
“넌 전장에서 만난 적을 원망하냐?”
“……그렇진 않지.”
“그거랑 비슷한 거야. 서로 입장이 다를 뿐, 그게 원한의 이유가 되진 않지.”
유예린이나 백유가 죽었다면 몰라도, 살존은 친절하게 두 사람을 제압했다.
충분히 치료하면 멀쩡하게 회복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존(殺尊)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방식.
원망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용서할 필요도 없고.
“뭐, 말은 이래도 유 매나 백유를 큰 상처 없이 살려 줬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
“그렇군.”
“뭐, 사실 살존이라곤 해도 사람이니까.”
아니, 이젠 솔직히 살존(殺尊)이라는 이름과는 썩 맞지 않을 거다.
살(殺)이란 단어는 이제 그녀의 상징이 되기 힘들다고 해야 하나.
게임에서 본 거라 말하진 못하지만, 여러 가지로 그렇다 이 말이야.
“그나저나, 서 소저는?”
“소 소저랑 놀러 나갔다.”
“웬일로?”
아침 수련을 빼먹어?
그 두 사람이?
“미리 일어나서 했다더군.”
“아.”
그럼 인정이지.
마지막 날이라 꽤나 즐기고 싶었나 보네.
벌써부터 저리 움직이는 걸 보니.
그나저나.
“주현운은?”
“명상 중이다.”
“……명상? 왜?”
“조금 깨달음을 얻은 것 같더군.”
이런 개 같은 세상.
누구는 연 단위로 고생해도 깨달음의 ㄲ도 못 봤는데.
“이러다가 내년에도 갑(甲) 등급의 졸업생이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입술이 튀어나온 설천위의 표정에 피식 웃은 철백은 천천히 다리를 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바벨.
사실 그게 더 위험한 행동이라 그냥 던져도 된다고 몇 번 말했지만…….
“후.”
아무런 소음도 없이 바벨을 내려놓는 철백을 보니 그 배려가 실례처럼 느껴질 정도다.
저 정도 무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거겠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자신도 바벨을 내려놨다.
철백처럼 부드럽게.
물론, 철백과 달리 설천위는 내공을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서로 운동하던 것을 정리하던 두 사람.
“설 소협!”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훈련장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제갈소를 발견했다.
“웬일이래?”
“자자, 시간이 없어요! 빨리!”
“응? 뭐가?”
“제갈 소저, 갑자기 무슨…….”
“아우, 땀 냄새! 빨리 씻고 와요!”
아니,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나타나 등을 밀어 대는 제갈소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철백과 설천위는 착실하게 움직였다.
욕탕으로 가서 찬물로 땀을 시원하게 씻어 내고 대충 옷을 갈아입고 나온 순간.
“좋아요! 그럼 바로 출발!”
“대체 뭔데?”
“그런 게 있어요!”
제갈소의 재촉 아닌 재촉에 이끌려 간 두 사람.
제갈소가 두 사람을 끌고 도착한 곳은 무려 학생회가 있는 동호회 건물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방 하나에 몰아넣어진 두 사람.
“왔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옷을 벗기…….
“흡!”
“아, 안 빠져?!”
“시간 없는데?!”
근육을 부풀린 철백이란 벽에 막힌 학생회 임원들이 당황하는 사이, 빠르게 사태 파악을 끝낸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철백의 어깨를 쳤다.
“야, 힘 풀어. 빨리 갈아입기나 하자.”
“음?”
“시상식 같은 걸 하나 보네.”
“아.”
설천위의 말에 상황을 깨달은 철백은 순순히 몸에 힘을 풀었다.
“아니, 이런 거면 그냥 설명해서 데려오면 되지 왜 그렇게 끌고 온 거래?”
“그러게 말이다.”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담담하게 옷을 벗었다.
“와!”
옷을 벗자 드러나는 그의 압도적인 근육에 다른 학생들이 감탄하고.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비협조적이었던가?”
그 옆에서 옷을 벗는 설천위의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꽉 찬 근육이라고 해야 하나?
철백의 근육이 압도적인 크기를 지닌 거대한 바위 같다면.
설천위의 근육은 마치 절벽 같았다.
단단하게 박힌 근육들이 엄청난 밀도로 갈라져 있다고 해야 하나.
대체 얼마나 지독하게 연습을 반복해야 저런 근육이 나올까.
절벽처럼 갈라진 설천위의 옆구리 근육에 모두가 감탄하는 사이.
“그래서 우리가 입을 옷은 뭐야?”
“아.”
설천위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이들이 하나둘 옷을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씁?”
“이래서 억지로 끌고 왔군.”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옷들.
“……튈까?”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너, 이 자식…….”
“깨달음이 그리 쉽게 오나요?”
진짜 짜증 날 정도로 어울리게 꾸민 주현운이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순순히 입으시죠. 형님들?”
“너 이 자식, 우리 둘을 네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당돌한 반란을 시도한 주현운의 행동에 설천위가 그를 향해 삿대질했지만, 주현운은 빙긋 웃으며 반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2대 2라면 가능하겠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남궁선의 등장에 설천위는 얼굴을 구겼다.
“누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철 형, 서 소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응?”
잠깐.
“여기서 이러시면 서 소저도 안 나온다고 했어요. 진짜 엄청 열심히 준비하시고 계신다던데.”
이, 치사한……!
순간, 주현운이 낚인 이유를 깨달은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허나.
턱.
이미 어깨에 올라온 솥뚜껑만 한 손이 그의 말문을 틀어막는다.
“천위, 들어가지.”
“야, 이! 배신자야!”
“어허, 준비한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야! 너 저거 엄청 화려하다고! 아, 안 돼!”
붙잡힌 순간, 철백의 근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설천위가 끌려 들어가고.
수상자들을 한껏 꾸며 잠룡제를 마무리하겠다는 제갈소의 야망은 서서히 실현되어 갔다.
* * *
해가 하늘의 정점에 뜨기 조금 전의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무림학관의 대연병장에 모였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부터 잠룡제의 마지막 행사! 승급자들에 대한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첫날에 그 엄청난 대결을 보여 줬던 당사자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먼저! 강철과 같은 육체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줬던! 금강호신(金剛護身)! 철백!!”
“와아아아!!”
전에 심판을 맡았던 그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단상 위로 오르는 철백.
회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거친 산세(山勢)가 수놓인 옷.
검게 수놓인 산세가 묘하게 반짝이며 현묘한 느낌을 주는 옷이 상당히 화려해 보였고, 이마에 묶인 검은 영웅건이 햇빛에 반짝인다.
저기, 보석이 박힌 것 같기도?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복장.
그나마 화장까진 하지 않았지만, 평소에 철백이 입는 옷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변화다.
그리고.
“그다음으론! 아쉽게 패배했으나! 승급에 충분한 실력을 보여 줬던 무명의 검객! 주현운!”
“꺄아아아!”
환호성이 들려왔던 철백의 등장과 달리,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는 주현운의 등장.
머리에 두른 영웅건이 철백과 달리 찰떡처럼 어울리는 외모의 귀공자.
푸른색 바탕에 하얀 백호가 수놓인 옷을 입고 나온 주현운의 등장에 수많은 여성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짜 더럽게 잘생겼네.
그렇게 철백과 주현운을 시작으로, 두 사람 정도 남성 승급자가 올라서고.
“자! 그럼 다음은 수많은 분들이 기다리던 여걸들의 등장입니다!! 가장 먼저 등장할 사람으으은! 압도적인 창술! 창절(槍絶)!! 서! 하! 영!”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저 아저씨, 왜 텐션이 다르냐.
그리고 관중석, 너희도 왜 그래.
아까 주현운 등장할 때 소리치던 여자분들까지 다 소리치고 있네.
서하영, 이 정도 인기였어?
단상 아래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혀를 차던 설천위는 반대쪽에서 나오는 사람을 본 순간, 그만 입을 다물었다.
평소엔 입지 않는, 여러 겹을 겹쳐 입는 화려한 궁장.
거기다 잘하지 않는 꽃 모양의 머리 장식에 타고난 외모를 해치지 않는 수준의 자연스러운 화장까지.
[허어, 절색이로구나.]
[철가 놈도 참 복 받았어.]
할아버지들의 칭찬에 설천위가 부정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담담하게 단상 위로 올라간 서하영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의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다으으으으은!! 압도적인 위압감! 보는 것만으로 죽음을 느낄 것 같은 위험한 무인! 소윤혜!”
“와아아아아!”
……이번엔 반응이 좀 약하다?
서하영 때보다 조금(?) 약한 환호성에 설천위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허어?]
[참 다른 미(美)로구나.]
[혜야!!]
혼들의 격렬한 반응이 이어졌다.
서하영처럼 화려한 궁장을 입은 소윤혜.
서하영과는 비교되는 작은 키에도 화려하게 꾸민 그녀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아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름답게 꾸민 외양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차분한 눈동자.
“……누나는 누난가?”
연륜(?)이 느껴지는 미모와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가는 소윤혜.
그녀가 올라갈 때마다 환호성이 점점 더 커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담담히 올라갔다.
물론, 그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끝으로, 병(丙)에 오른 모든 사람의 소개가 끝났고.
“자! 그럼 이제 이 무대의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수년 만에 등장한 갑(甲) 등급의 학생! 흑룡검성(黑龍劍星)이라 불렸으나 흑룡도성(黑龍刀星)으로 불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호걸!!”
거, 설명 길기도 하네.
“와아아아아아!”
환호성도 길고.
“설! 천! 위!!”
교관의 호명에 한숨과 함께 단상 위로 오르는 설천위의 등 뒤로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진다.
“꺄아아아악!”
여학생들의 비명도 울려 퍼지고.
[인정하긴 싫지만, 얼굴 하나는 참 잘생겼구나.]
[단련을 잘해서 몸도 훌륭하고.]
[네놈이 왜 주현운이를 욕하는지 모를 정도다.]
……그건 과거의 기억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소백진의 지적에 속으로 작게 변명한 설천위는 당당하게 단상 위를 걸어 올라갔다.
“잘 어울리는군.”
“……감사합니다.”
검은 바탕에 하얀 용이 수놓아진 옷.
철백과 달리 아주 살짝 자연스럽게 화장까지 한 얼굴.
이마에 두른 영웅건이 정말 잘 어울리는 미남.
본인은 상당히 쪽팔려 했지만, 겉으로 보면 상당히 멋있는 외모에 흐뭇하게 웃은 팽후는 시상식을 시작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칭찬하고, 승급을 축하해 준다.
그리고 소정의 선물.
간단한 축하금과 요상약 정도의 영약이다.
설천위는 거기서 조금 더 받은 수준이고.
그렇게 시상식이 끝나고.
“그럼 이로써! 잠룡제의 끝을 선언하는 바이오! 물론 학관의 문은 저녁이 되어 닫을 것이니! 남은 여운을 즐기고 싶은 분들은 느긋하게 있다 나가시면 되겠소!!”
팽후의 선언을 끝으로, 잠룡제의 마지막이 선언됐다.
[어어? 저놈이?!]
[허허, 분위기 좋은데 그만하게.]
물론, 끝과 동시에 한껏 꾸민 연인들을 마주한 네 사람이 묘한 공기를 풍겨 댔다.
[허허, 유예린 그 아이가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겠구나.]
[응? 이 녀석 돌이 됐는뎁쇼?]
[……외로움에 충격을 받았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모습에 혼들이 그 앞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미동도 없던 설천위는 이내 갑작스럽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박……!”
잠룡제가 끝나고, 보상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