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266화-갑(甲) (6)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군.”
삐쭉이는 입술을 겨우 집어넣은 창린이 밖으로 나가고.
그다음으로 들어온 친구들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안 멀쩡한데?”
“밖에서 들으니 아닌 것 같던데.”
“맞아요! 멀쩡하던데!”
“번개에 지져졌는데 어떻게 사람이 멀쩡하냐.”
이 자식들이 남의 몸이라고.
서하영까지 거들어 놀리기 시작하자,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 설천위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어떻게 보셨어요?”
주어를 붙이지 않은 물음.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끝내줬지!”
“그럼 다행이네요.”
“다행인 수준이냐?”
웃으며 설천위에게 다가간 남궁선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설천위의 몸을 살폈다.
살존과 대화하면서부터 회복 스킬을 운용해 이젠 상당히 멀쩡해진 몸.
“역시 괴물이네? 이건 무공?”
“조금 다른 힘이에요.”
“참, 별것이 다 있어.”
그 옛날,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가 영생을 갈구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들리는 게 있으니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
현 황제는 나이가 젊어 그런 욕심은 없는 것 같지만.
그나저나.
“성 언니가 들으면 기겁하겠어.”
“뭐가요?”
“널 어떻게 백화단으로 끌어들일까 이리저리 고민하던데, 갑(甲) 졸업이면 뭐, 할 말이 없지.”
“거, 전부터 안 간다니까.”
안 간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남궁선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 생각이구나?”
무엇을?
내용이 담기지 않은 그 질문에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철백이 내 제안을 계속 거절한 것도 그 이유에서고?”
“대(隊)로 시작하더라도 함께할 생각입니다.”
“응. 그것도 나쁘지 않지.”
무림맹은 구단(九團)이라 불리는 아홉 개의 단(團)이 있다.
허나, 이 무림이 얼마나 큰가?
고작 아홉 개의 머리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할 리 없었다.
때문에 각 구단을 주축으로 하되, 그 밑으로 수십 개의 대(隊)가 존재한다.
직접적으로 구단의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대(隊)도 있고, 아예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대(隊)도 있다.
그 숫자는 거의 수천에 이른다고 추측된다.
정확한 전력의 노출을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최고 수뇌부들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전략과 전술을 담당하는 준명당(峻命堂)의 당주와 몇 명만 알고 있다.
뭐, 단주급 정도 되면 그래도 대충 이 정도는 되겠지, 하고 유추하는 숫자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이렇게 수많은 집단을 거느린 무림맹에 단(團)이 아홉 개인 이유는 간단하다.
단주(團主)급의 인물이 없다.
물론 잘 찾아보면 숨어 있는 강자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들이 괜히 숨어 있겠는가?
단주급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숨어 있는 거지.
무엇보다 스스로 단(團)을 만든다고 쳐도, 그 밑에 사람을 모으는 건 완전 별개의 이야기다.
그만한 인망과 실력을 쌓을 때가 되면, 보통 단(團)을 물려받거나 본가로 돌아간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구파일방, 오대세가 같은 대문파에서 파견된 이들이니까.
특히, 구파일방은 본 문을 지키기 위해 서로 단주 자리를 떠넘긴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다.
지금 있는 아홉 개의 단(團)도 사실 꽤나 힘들게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 상황에서 갑(甲) 등급의 졸업생이 스스로 단주의 자리에 앉겠다고 선언한다?
“아마, 반반일걸?”
환영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반대하는 자들도 분명 있을 거다.
지금 유지되는 아홉 개의 단(團)에는 그만한 위엄이 있다.
그것 때문에 공사가 다망한 인간들이 굳이 자신의 시간과 이름을 써 가며 단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명예를 위해.
그런데 젊은 녀석, 아니 어린 녀석이 대뜸 나타나서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우기겠다고?
“너희 가문을 고려해도 꽤나 참견하는 녀석들이 많을 거다?”
설천위의 가문, 호남설가는 위세가 높긴 하지만 무림맹을 위한 실질적인 활동은 그리 없다.
자신들의 영역인 호남에 처박혀 오로지 사파 척살만을 외치고 있는 가문이니까.
호남 내부에선 상당히 민심이 좋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무림 전체로 보면, 가주가 엄청나게 강한 신흥 가문일 뿐.
설천위를 지켜 줄 방패가 되기에는…….
“상관없어요.”
남궁선의 우려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이름은 단(團)으로 시작할 거지만, 초기에는 대(隊)급 정도일 거예요.”
“그럼 더 싫어할 텐데?”
단의 이름값을 낮춘다고.
얘가 꼰대들을 얕보고 있네.
아버지의 자리를 이은 자신이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단장(團長)이라 칭하는 것도 불편해하는 인간들이다.
대(隊)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단이 움직인다고 하면 아주 난리를 칠 것 같은데.
남궁선의 눈이 아직 현실을 모르는 어린애를 바라보는 것처럼 바뀌자, 설천위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누님, 누가 알았겠어요?”
“뭘?”
“계(癸)에서 갑(甲)까지 올라갈 줄.”
기적.
그 말이 어울리는 일이었다.
계(癸)란 최소 수 개월, 길면 일 년 이상 아무런 성장의 조짐도 없는, 말 그대로 자질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계급.
무인(武人)이 될 자격이 없다고, 무림 최대의 학관에서 찍어 버린 낙인.
그 낙인을.
“저도, 철백도, 서 소저도.”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이 받았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갑(甲)이 하나.
병(丙)이 둘.
심지어, 둘의 실력은 실적 부족을 빼면 을(乙)이 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두가 안 된다고 낙인찍어도, 됩니다.”
된다.
그 말에 남궁선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남들의 시선 따위 상관없이 자신만의 길을 가는 녀석들.
‘아아.’
역시 얘들이랑 학관 생활을 했어야 했는데.
속에서 올라오는 아쉬움을 삼키며 남궁선은 설천위의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좋네! 그런 기세! 그래야 내 동생이지!”
“제 누님은 설란…….”
“언니의 동생이고, 내 동생의 친구면 나한테 동생이지!”
호탕하게 웃으며 한 번 더 머리를 흐트러트린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만 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예. 그때 가서 모른 척하기 없깁니다?”
“물론! 나, 남궁선 창천의 이름 아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남궁선.
이내 그녀는 설천위의 팔을 잡고 끌었다.
“멀쩡하면, 슬슬 나가자.”
“예?”
“아직 못 돌아본 노점이 꽤 되거든. 놀아야지.”
오랜만에 휴가 내고 온 축제인데, 즐길 수 있는 한 최대로 즐겨야지.
그리고 이런 놀이는 왁자지껄해야 재미있는 법이다.
* * *
“쯧쯧, 시집가긴 글렀어.”
제약당 지붕.
설천위를 끌고 밖으로 나가는 남궁선의 모습에 혀를 찬 팽후는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어떻소? 당신이 보기엔. 여성의 시선이 궁금한데.”
“여자의 시선이 중요한가? 결혼할 상대는 남자인데.”
“그것도 그렇군.”
실없는 대화.
딱히 영양가 없는 대화를 팽후와 주고받는 여인, 살존은 담담한 눈으로 설천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쟤, 졸업은?”
“얼마 안 남았소. 올해가 끝나면 졸업할 거요.”
“조금 느린데?”
“학점이 부족하니 자신이 만족할 때까진 채워야겠지.”
“……어쩔 수 없지.”
지금 갑(甲)은 저 녀석이니.
그나저나.
“왜 당신까지 여기에 있어?”
“허허, 노부가 못 갈 곳이 어딘가? 자네도 이리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늘.”
살존의 살벌한 시선을 웃으며 받아 낸 맹주는 허허롭게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훌륭하더군.”
“맹에 가면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내가 해 줄 게 무엇이 있다고? 혼자 잘 해결해 나갈 것 같은 아이거늘.”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린 맹주는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며 팽후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 자네와의 비무에선 검을 꺼내지 않더군.”
“검…… 말입니까?”
“그래, 검(劍).”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팽후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아이의 뒤에 있는, 저 어린아이가 그의 검을 쓰는 것 같더군.”
그의 검.
‘그’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기에 팽후는 작은 침묵으로 답했다.
팽후의 침묵에 잠시 팽후를 바라보던 맹주는 허허롭게 웃으며 다시 설천위를 바라봤다.
“나도 풍문으로 들은 게 있으니 참, 저 아이의 검을 견식하지 못한 것이 아쉽구먼.”
설천위의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검을 바라보는 맹주의 두 눈의 깊디깊은 곳.
“참으로 아쉬워.”
스산한 기운이 일렁였다.
* * *
“그 노인네 이젠 갔어요?”
[음, 갔다.]
“아따, 거, 눈깔 살벌하네.”
노점 앞에 있는 탁자.
잠시, 일행이 각자 주문을 하러 간 사이에 혼자 먼저 음식을 받아 온 설천위는 혼들의 대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몰라서 검을 봉인해 두길 잘했네.
완벽한 복제.
그것이 핵심인 지금, 자신의 무공은 보는 순간 단번에 들킬 테니까.
낌새가 있는 것과 확실한 것은 얘기가 다르다.
뭐, 무림맹에 가면 꽤나 조심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영역에까지 도달한 것 같지만.
언젠간 부딪쳐야 할 일이니 마냥 몸을 사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주의하긴 해야겠어.’
짧게 경각심을 되새긴 설천위는 손에 든 꼬치를 뜯었다.
일단 예상치도 못했던, 하지만 은근히 바라고 있던 목표 달성엔 성공했다.
갑(甲).
게임에서도 거의 해 본 적 없는 등급.
솔직히 말해서 정공법이 아닌 야매로 딴 등급이지만…….
뭐 어떤가?
땄으면 그만이지.
자고로 꼼수도 성공하면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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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으로의 승급에 성공했습니다!
위대한 업적!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기적과도 같은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축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벤트가 마무리된 후 함께 정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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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건데…….”
“문제?”
“아, 별거 아니야.”
큼지막한 고기를 통째로 들고 온 철백이 옆자리에 앉고, 설천위는 고기를 씹으며 다시 알림창을 바라봤다.
축제가 끝나지 않았다.
이 문구가 마음에 걸린다.
아니, 지금 여기에 모인 전력을 생각하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 싶으면서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마냥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는 게 사실이다.
지금 이곳엔 상당한 숫자의 강자들이 모여 있다.
대표적으로 살존과 맹주가 있고.
그 외에도 남궁선, 팽후에다 숨어서 축제를 보러 온 기타 등등의 강자들.
거기다 자신을 비롯한 학생들까지.
웬만한 전력으론 제대로 된 타격조차 주기 힘든 수준의 막강한 전력이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무인(武人)이라는 것.
그 점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지금 자신을 노리는 혹은 이 학관을 노리는 세력엔 술법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녀석들도 많으니까.
그러니 술법적인 방법으로 공격해 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확률이 높았다.
팽후가 그쪽까지 대비하진 않았을 테니까.
물론 팽후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예 방치하지도 않았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뭐가요?”
“아니, 별거 아니야.”
얘는 언제 왔대?
철백이랑 거의 비슷한 크기의 고기를 손에 쥐고 젓가락에 검기를 둘러 깔끔하게 베어 먹는 서하영의 모습.
단아하다고 해야 할지, 야성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일단 깔끔하게 먹으니 딱히 보기 싫은 광경은 아닌데.
묘하네.
“설 형은 지금 걱정이 많은가 봐요.”
고기를 뜯는 두 사람과 달리 얌전히 국수를 먹던 주현운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또 누가 습격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뭐, 비슷하지.”
비슷하다기보다 정답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불안한 감이 있고.
알림창이 저리 말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물론 설명은 못 하지만.
“천위, 걱정이 너무 많다.”
“맞아요. 맹주님도 와 계신다면서요?”
맹주는 화려하게 오진 않았지만, 딱히 숨지도 않았다.
눈썰미 있고, 지식 좀 있는 사람은 이미 맹주의 방문을 다 알고 있는 상황.
당연히 눈치챈 남궁선과 혼들에게 얘기를 들은 친구들도 알고 있다.
다만.
“무인(武人)이 대처 못 하는 종류의 습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내 말에 동의하듯, 소면을 먹던 남궁선 누님이 말을 보탰다.
“대표적으로 폭탄이 있지. 폭발은 내공의 초고수가 아닌 이상 그 충격을 해소하기 힘드니까.”
“그렇…….”
그래그래.
폭탄…….
아!
나, 왜 술법만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