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265화-갑(甲) (5)
재해(災害).
그 단어에 설천위는 가만히 살존을 바라봤다.
재해의 종류는 참으로 많다.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넘치는 것부터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나 그 일대를 전부 날려 버리는 태풍까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막대한 규모의 위협.
그것을 사람들은 ‘재해(災害)’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재해 속에서도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살존이다.
산이 무너져도, 강이 범람해도, 화마에 휩싸여도, 태풍에 집어삼켜져도.
살존이라는 괴물은 제 몸은 능히 지킬 수 있는 역량이 있다.
허나.
그런 살존조차.
무너지는 산을 죽일 수 없고.
범람하는 강을 죽일 수 없으며.
작렬하는 화마를 죽일 수 없고.
몰아치는 태풍을 죽일 수 없다.
재해(災害)란 그런 것이다.
인간이 죽일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재해다.
허나.
“예. 가능할 걸요? 한 이삼 년 정도 더 수련하면?”
설천위는 당당하게 재해를 죽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무너지는 산도, 범람하는 강도, 작렬하는 화마도 죽일 수 없지만.
설천위가 죽일 수 있는 재해가 딱 한 종류 있다.
재(災)라 칭하는, 사람에게서 태어난 인재(人災).
악귀(惡鬼).
그 존재라면, 설천위가 죽일 수도 있다.
“추측으론 안 돼.”
허나, 그 불확실한 대답은 살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저은 살존은 쉽사리 보기 힘든, 차가운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네가 학관을 졸업하고 2년. 그게 내가 기다릴 수 있는 최대야. 그 안에 잡을 수 있어, 없어?”
답을 요구하는 눈동자.
그 눈동자에 설천위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재(災)는 백화단주나 만귀단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다.
두 개의 단을 총동원해 진법을 펼치고, 힘을 갉아먹으면서 단주급이 직접 전투를 해야 겨우 승산이 보이는 괴물.
그게 재(災)다.
고작 2년, 승산이 어디까지 높아질까.
7할을 넘길 순 있을까.
무엇보다.
“죽여선 안 될 사람이 있잖아요?”
“맞아.”
죽여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에 살존은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빠르고 간단한 선택을 할 테니.
살존이 괜히 오랜 잠적을 깨고 살행에 나서면서까지 언여휘에게 손을 벌린 게 아니었다.
그녀가 살존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 처리를 가장 잘할 것 같았기에 그녀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그런데 설천위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들은 들어줄 수 없다고.
그들에게 손을 벌려 봤자 돌아오는 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돼야겠지?”
여태까지 봤던 중에 가장 서늘하게 빛나는 살존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설천위는 벽에 등을 기댔다.
“저는 올해가 지나면 졸업해요.”
“응, 그렇겠지.”
갑(甲)에 오른 학생은 원하는 때에 졸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막말로, 거의 단주급에 오른 학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졸업이 싫다, 배울 게 더 있다며 연기하면 그게 맞는 것이고.
졸업하고 싶다, 배울 게 더 없다며 졸업하면 그것도 맞는 거다.
그 선택이, 그 의지가 옳은 것이 되는 것.
그것이 갑(甲)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이자 특권이다.
“졸업하고 2년, 짧으면 1년 안에 연락을 드릴게요.”
어차피 무림맹에 들어가면 한동안은 제대로 술법을 팔 생각이었다.
거기엔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까.
여태까지처럼 겉핥기로 대충 배우는 게 아니라 제대로 배워 볼 생각이다.
물론, 지금의 방식이 몸에 익어 전투 스타일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기초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크니까.
“그 안에 재(災)를 죽일 실력을 만들어 놓을게요.”
* * *
1년에서 2년.
기간을 약속받은 살존은 순순히 물러났다.
학관장의 배려로 먼저 병문안을 오긴 했으나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기에 살존이 사라진 빈자리.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문 쪽을 바라봤다.
“어이, 호위!”
“뭐냐?”
“넌 진짜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냐.”
“……또 왜 시비냐.”
조용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창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자식은 왜 또 시비야.
“너, 나 싸우는 것도 혼자 떨어져서 봤다며?”
아까 혼들한테 들으니 그 자리에 없었다던데.
“뭐 했어?”
“……별거 아니다.”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고개를 돌리는 창린의 모습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언제 떠날 건데?”
“떠나?”
“야, 호위란 녀석이 하루의 반 이상을 자기 수련이나 하는데, 그걸 눈치 못 채면 그게 이상하지.”
“그건 네가 하루 종일 수련만 하니까 나도…….”
“그걸 핑계라고 대냐.”
살짝 붉어진 볼로 고개를 돌린 창린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고 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하다는 걸 알았으니, 스승님 밑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낭괴(狼怪)는 기본적으로 실전주의를 주장하는 무인이다.
사람은 실전을 겪으며 단련된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라고 해야 할까.
함께 목욕했던 서하영의 말로는 창린의 몸에도 흉터가 꽤 많다고 했으니, 사선을 여러 번 넘었단 소리겠지.
본인도 흉터를 당연하다는 듯 말했으니 그 실전주의가 맞는 거겠고.
실제로 게임에서도 창린은 전투를 통한 경험치 보너스가 있었으니까.
낭인 일을 하는 낭괴의 밑에서 다시 실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친분도 쌓을 겸 1년 정도 옆에 두고 친해졌지만, 이 이상 붙잡아 두는 건 창린의 성장에도 좋지 못하다.
이곳에서 배울 만한 건 다 배운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
가슴속에 불이 붙은 것 같으니 슬슬 그 불에 장작을 넣어 줄 필요도 있어 보이고.
자신뿐만 아니라 철백, 서하영, 주현운 등등.
비슷한 나이대에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겪어 봤다.
비무에서 그녀의 승률은 3할이 되지 않았으니까.
패배로 인해 생긴 불씨는 능동적으로 장작을 집어삼킨다.
승리로 인한 열정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씨가 되지.
뭐, 여하튼.
“필요하면 불러. 도와줄 테니까.”
“뭐냐, 갑자기.”
“거, 서로 돕고 살자는 거지. 우리 친구잖아?”
“또 헛소리를.”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창린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를 붙여 놓지.”
“오냐.”
“흥.”
거, 해 줄 거면서 흥흥거리기는.
다시 문 앞에 서는 창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너, 근데 살존 누님 왔다 간 건 알고 있냐?”
“……뭐?”
“호위 실격이야.”
“……이익!”
* * *
새로운 갑(甲) 졸업생의 탄생.
그 뜨거운 소식에 무림 전체가 들썩였다.
흑룡학관과의 친선전에서 흑룡을 불렀다고 소문이 난 흑룡공자(黑龍公子).
그가 결국 천하 십대 고수 중 일인인 도왕(刀王) 팽후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아깝게 패배하며 갑(甲)에 올랐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온 무림이 들썩였다.
가뜩이나 정파가 우세하던 무림의 판도가 또다시 정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왜냐고?
지금 당장에야 그저 단주급 하나가 추가된 정도이지만 십 년, 이십 년 뒤에는?
오존(五尊)이라 불리는 정상의 존재들과도 맞먹는 강자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찌 입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수많은 술자리에서 아니, 사람들이 그냥 모이기만 해도 흑룡공자의 이름을 들먹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별호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 퍼졌다.
예를 들면…….
“……흑룡좌(黑龍座). 킥킥.”
“천위가 싫어할 것 같은 별호구먼.”
“왜요? 괜찮지 않아요?”
임무를 위해 움직이던 당화유, 남궁천은 설천위를 본 적 없는 부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천위는 기본적으로 과한 별호를 싫어합니다.”
“예?”
좌(座)는 앉을 자리를 뜻하는 글자이지만, 지위를 뜻하기도 한다.
즉, 흑룡좌라는 별호는 그의 지위가 흑룡과 같다는 뜻.
그냥 흑룡이라고 부르면 이상하니까 좌(座)를 붙인 것인데…….
꽤 멋있는 별호 아닌가?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부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남궁천은 딱히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별호야 뭐, 사람들이 붙여 주는 거고.
듣자 하니 학관장과의 싸움에서 도(刀)를 써서 그쪽으로도 관심이 꽤 쏠린 것 같다.
그렇다면 뭐, 흑룡도성(黑龍刀星) 같은 별호로 가지 않겠는가?
상당히 과하긴 하지만, 별호야 원래 과한 게 많으니까.
아니,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지.
“결과는요?”
쓸데없는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를 다잡은 남궁천은 부하를 향해 물었다.
애초에 지금 이 객잔에 모인 이유가 정보의 공유 때문 아닌가.
남궁천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부하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보고를 시작했다.
“최근 실종된 사람의 숫자가 오십이 넘는다고 합니다.”
“……소규모가 아니군요.”
“아무래도 정보를 조금 더 모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하의 의견에 남궁천은 찻잔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고민했다.
분명 임무가 시작되기 전에 들은 바로는 실종자의 수가 열 명이었다.
자신들이 이곳으로 오는 사이에 무려 사십 명이라는 실종자가 더 나왔다는 소리.
아니, 오십이 넘는다고 했으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이리도 많은 실종자라니…….
‘움직임이 과하다.’
음지의 버러지들이 사람을 납치해 고혈을 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과감하게 움직이다니.
이런 종류의 실종은 관(官)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딱 봐도 동시다발적인 실종.
만약 소수의 무림인들이 행한 일이라면?
당연히 손을 대기 힘들다.
섣불리 덤볐다간 역으로 전멸당할 테니까.
애먼 포졸들만 죽어 나간단 소리다.
괜히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었다.
뭐, 듣자 하니 요즘엔 황실에서 따로 별동대를 움직여 이런 일에 손을 보태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긴 세월 동안 이런 일을 해 온 무림맹의 성과를 따라잡기에 쉽지 않았다.
마냥 황실의 도움을 기다리다간 백성들이 죽어 나가니 관청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걸 알기에 황실도 딱히 말리지 않는 것이지만.
여하튼.
관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자신들의 힘만으로 정보를 모아 대처해야 한다.
정보야 뭐, 관에서 조금쯤 도움을 주긴 하겠지만, 크게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닐 테니.
“일단, 한 번 더 정보를 모으죠.”
신입 대주라는 이유로 만독단의 당화유까지 지원을 왔다.
뭐, 아직까지 별다른 지위를 맡지 않은 당화유에게 경험을 쌓게 할 겸, 오대세가의 유대도 있으니 보낸 것이겠지만.
여하튼, 당화유가 있으니 무력적인 면에선 부족할 게 없다.
문제는 수색과 구출.
“정보를 좀 더 모아 마을 서쪽에서 집합합니다. 집합 시간은 세 시진 뒤입니다.”
* * *
“흐응?”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술 냄새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기루의 지붕.
그곳에 앉아 당과를 깨물던 언여휘는 저 밑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웃었다.
남궁천.
꽤나 훌륭한 소재지.
거기다 당화유까지 왔으니.
“여기도 슬슬 빠지라고 할까?”
어차피 한두 달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
까득.
“그 노망난 놈이.”
당과를 깨물며 자신의 분신을 지붕 위에 내버려 두고 갔던 팽후를 떠올린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경고.
그놈은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경고했다.
설천위라는 괴물이 저렇게 성장했으니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네 녀석이 친선전에서 습격했던 그때보다도 훨씬 더 성장했다고.
저 녀석이 곧 무림으로 나갈 것이라고.
독한 인간이다.
세간의 관심을 설천위에게로 집중시키는 것.
그것은 아마 높은 확률로 설천위에게 독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쌓은 설천위의 명성은 그가 무림으로 나오면 큰 억제력으로 작용하겠으나, 동시에 거대한 적의를 만들어 낼 것이다.
설천위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도검이 세워지겠지.
자신조차도, 설천위를 노릴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할 정도이니까.
설천위가 그 모든 것을 이겨 낼 것이란 확신을 가진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학생을 미끼로 던진 것뿐인가.
완전히 부서진 당과를 목 안으로 넘기며 언여휘는 바쁘게 움직이는 남궁천을 내려다봤다.
“뭐, 상관없어.”
이 땅은 넓고, 사람은 많다.
진정 무서운 것은 자연이 아닌 사람.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죄악.
지옥(地獄)은 지하(地下)가 아닌 인세에 있다.
끝내 멸망이 인세에 도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