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263화-갑(甲) (3)
쾅!!
여태까지의 충격음과는 다른,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비무대를 뒤흔든다.
강력한 충격.
어마무시한 폭음에 일순 눈을 감았던 관중들은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조금씩 눈을 떴다.
그 순간, 눈에 담긴 것은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짐작되는 광경이었다.
아직 공방은 끝나지 않았다.
도신이 얇은 설천위의 도가 팽후의 도와 충돌해 팽팽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 그대로 숨과 숨이 닿는 거리에서의 힘겨루기.
그런데 문제는 그 광경이 당최 말이 안 되는 광경이라는 거다.
팽후는 거한이다.
단순히 일반인들 중에서 거한이 아니라, 무인들 중에서도 거한에 속한다.
단련을 거듭하는 무인들 중에서도 그보다 덩치가 좋은 이가 별로 없다는 소리다.
설천위도 상당히 탄탄하고 두꺼운 몸을 가지고 있지만, 기골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뼈의 크기에 따라 붙을 수 있는 근육량의 한계가 다르니까.
그러니 팽후보다 확연하게 체구가 작은 설천위가 팽후와 힘겨루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하물며, 팽후가 내공에서 밀리거나 자세가 흐트러져 힘을 쓰지 못할 머저리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설천위는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몸소 실현해 내고 있었다.
기기기기깅.
내공을 두른 도와 도가 서로 맞물리며 기이한 소리를 내고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마주한다.
“훌륭하구나.”
그렇기에 팽후는 진심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
설천위가 그동안 어떤 단련을 거듭해 왔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단순히 술법(術法)의 힘을 빌린 것으론 불가능한, 진정 단련된 육체만이 품을 수 있는 단단함.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리를 비트는 것과 함께 팽후는 설천위의 도를 흘려 냈다.
만약 적과 적으로 만나 펼치는 자존심 대결이었다면, 이리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겠으나.
자신은 어디까지나 가르치고 시험하는 이의 입장으로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에 어울려 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이 아이에게서 끌어내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 한참 남아 있지 않은가?
다시금 차오르는 기대감과 함께 팽후는 도를 움직였다.
살짝 흘려 냈던 설천위의 도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을 확인하고, 반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설천위와의 거리는 이미 좁혀질 대로 좁혀진 상황.
도를 휘두르면 서로에게 닿을 거리였다.
즉, 서로의 제공권(制空圈) 안.
이제 선택지는 두 가지다.
물러나거나 아님 충돌하거나.
물론 팽후는 후자를 선택할 생각이다.
그렇기에 반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이고, 도를 휘두른 것이다.
설천위는 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설천위가 펼치는 방어의 핵심은 완벽한 제공권 구축에 있다.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베는 방어.
벤다는 공격의 개념을 극한까지 확대해 방어로 변질시킨 독특한 싸움 방식.
그것을 위해선 당연히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라고, 팽후는 생각했다.
쩡!!
팽후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은 설천위의 도가 다시금 팽후의 도와 충돌한다.
이번에도 베었다.
허나, 베이지 않았다.
설천위에겐 실패나 다름없는 상황.
설천위가 펼치는 방어의 핵심을 대충 이해한 몇몇 관중이 안타까워하는 순간.
‘……허어?’
팽후는 자신의 손에서 느껴진 감각에 오랜만에 당황했다.
베이지 않았는데, 베였다.
정확히 말하면 도(刀)에 두른 자신의 도기(刀氣)가 일순 베였다.
아까 전까지, 공격의 흐름 자체를 베어서 막아 내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의 방어.
“기(氣)라는 것은 생각보다 술사에게 더 친숙한 힘이죠.”
다시금 도기(刀氣)를 끌어올리는 팽후를 보며, 설천위는 차분하게 도를 거뒀다.
그리고 다시 상단 자세.
단숨에 자세를 잡은 설천위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도를 휘둘렀다.
쩡!
이번엔 도와 도가 부딪히며 마치 쇠가 부서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본격적으로 공방이 시작됐다.
팽후가 베고, 설천위가 막는다.
얼핏 여태까지 보았던 팽후의 공격 구도와 비슷해 보이는 광경.
허나,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더 이상 설천위가 방어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팽후의 도와 설천위의 도가 충돌하는 순간순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와중에 물러났어야 할 설천위가 물러서지 않는 순간이 생긴다.
힘을 해소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파고들어 베어 낸다.
그 힘과 속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서 팽후조차도 그 공격을 막아 내느라 빈틈이 생겼다.
참(斬)의 묘리를 유지하면서 압도적인 육체 능력으로 힘과 속도를 챙긴 것이다.
설천위의 기술로는 도를 가속시키는 쾌(快)의 묘리와 참(斬)의 묘리를 한 번에 담을 수 없었기에.
재능의 한계로 기(技)를 여러 가지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흠을.
‘이런 식으로 메울 줄이야.’
극한까지 단련한 육체로 메우는 방법이라니.
빠르게 달리는 법을 모르니, 각력을 미친 듯이 단련해서 단순히 한 번 땅을 박찰 때 더 멀리 나가면 된다는 사고방식 아닌가.
어쩜 이리도 무식한 방식일까.
아니, 이걸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능력인가.
설천위의 몸을 감싼 검은 연기.
아직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저것이 피어난 이후로 설천위의 능력이 크게 오른 건 확실했다.
분명 술법적인 무언가이겠지.
다만, 확실한 것은 설령 술법으로 육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그릇이 되는 육체가 허술하다면 결코 이만한 효과를 낼 수는 없을 거다.
술사들이 괜히 무인을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니까.
자신의 도와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틈틈이 자신의 빈틈을 망설임 없이 파고드는 설천위와 공방을 나누며 팽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기본은 됐다.
단 한 가지 방식으로 공격과 방어를 전부 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점이나, 그래도 충분히 뛰어난 수준이다.
초절정 수준에선 상위권이라고 평가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
다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당장 작년에 졸업한 유예린조차 이 정도 수준엔 이르렀으니까.
을(乙)이라는 기준엔 충분하나, 갑(甲)이라는 기준엔 부족하다.
그렇기에.
팽후의 도는 예고 없이 변화했다.
여태까지 그리던 궤적과는 조금 다른 궤적.
좀 더 단조롭고, 좀 더 간결하다.
큰 변화 없이 파고드는 도의 궤적은 너무나도 깔끔해 이게 정녕 공격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여태까지의 패도적인 공격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명적인 한 수.
물론, 제공권을 갖춘 설천위의 도는 확실하게 반응했다.
그것을 위한 제공권이니까.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고 하여 반응하지 못하면 제공권이 아니지.
그렇게 빠르게 반응한 설천위의 도가 팽후의 도와 부딪히고.
서걱.
베였다.
도기(刀氣)를 두르고 있던 설천위의 도(刀)가.
도신의 3분의 1 정도 되는 부분이 베여 단숨에 7할 정도의 길이로 짧아졌다.
동시에 막아 내지 못한 팽후의 도가 설천위의 어깨를 내리찍었으나.
“허?”
그것은 막혔다.
설천위의 도를 베어 내며 위력이 약해졌다곤 해도 뼈 정도는 가볍게 가를 일격인데.
고작해야 가죽을 베어 낸 수준에 그쳤다.
검은 연기.
아까부터 설천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그 힘이 도신에 얽혀 강력한 저항을 만들어 낸 결과다.
거기다.
‘아물고 있군.’
아까 볼의 상처가 나은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비현실적으로 빠르게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까지.
공격을 성공시킨 팽후가 오히려 더 놀라는 상황이 펼쳐졌다.
물론.
“씁.”
자신의 도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쓴 호흡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음? 물러서는 건가?”
“치사하게 누가 갑자기 강(罡)을 써서요.”
“허허, 전투에서 갑자기가 어디에 있나?”
그것도 그렇긴 하네.
허허롭게 웃는 팽후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상단 자세.
대체 이번 비무에서 몇 번을 반복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진 이 자세가 가장 편하다.
진정으로 숙달되면 이런 자세조차 필요 없어진다고 했으나.
아직 이 루틴이 자신에겐 필요했다.
암시.
참(斬)의 시작이 되는 시작점.
자세를 갖춘 뒤,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설천위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팽후를 바라봤다.
그의 도(刀)엔 이제 대놓고 강렬한 강기(罡氣)가 일렁이고 있었다.
수많은 무인들의 꿈.
강기(罡氣).
무형의 형태로 무기를 감싸 예기나 단단함을 증가시켜 주는 검기(劍氣)와는 다른 유형의 기(氣).
과학으로 따지면, 허공을 떠도는 수증기를 강제로 압축해 물이나 얼음으로 바꾼 것과 같다.
그 밀도는 통상의 무인들이 쓰는 검기와는 격이 다르다.
베지 못할 것이 없고, 막지 못할 것이 없다.
물론 같은 급의 강(罡)과 만나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여하튼, 보통의 무인에겐 절대적인 힘이나 다름없는 벽이 바로 강기(罡氣)다.
화경급 무인을 별세계의 존재로 취급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문제는 강기(罡氣)는 고작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화경(化境)이라는 괴물 같은 경지의 시작.
진정한 화경(化境)의 괴물에게 강기(罡氣)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정도에 밀려선 얘기가 안 된다.
짧게 고르던 호흡이 일순 멎고.
설천위의 두 눈이 똑바로 팽후에게로 향한다.
무언가를 품은 괴물의 두 눈이 팽후를 응시한다.
똑바로.
물러날 생각 따윈 전혀 없다는 듯.
확실하게 팽후를 응시한다.
그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팽후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도를 휘두른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베어 내겠다는 듯, 엄청난 예기를 흘려 대는 도가 설천위의 어깨를 노리고 파고든다.
상단 자세로 막기엔 썩 좋지 않은 공격.
그러나 설천위는 여태까지처럼 움직였다.
막는다?
아니다.
벤다.
저 공격이 나에게 닿기 전에 베어 낸다.
조금 전에 실패했던 방식 그대로 설천위의 도가 떨어진다.
팽후와 설천위의 중간 지점, 순식간에 마주한 두 도(刀)가 서로를 향해 충돌하고.
쩡!!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강렬한 소음이 비무대의 돌판을 박살 낸다.
도와 도가 부딪쳐 나는 소음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굉음.
몇몇 구경꾼이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숙일 정도의 강렬한 충격파가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엄청난 충격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
재빨리 충격에서 회복한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비무대 위를 살폈다.
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했으니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고개를 든 이들의 눈에 보인 것은 실로 기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아직도 서로의 도를 마주한 채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팽후와 설천위.
이상한 점은 설천위의 도가 팽후의 강기를 버텨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도(刀)에는 강기로 보이는 것이 전혀 없는데.
그저 검은 연기가 그것을 휘감고 있을 뿐인데.
“……이건 무엇이냐?”
“저는 패룡기(覇龍氣)라고 부릅니다.”
팽후의 말에 짧게 대답하며, 설천위는 몸 전체를 타고 흐르는 강렬한 기운을 다스렸다.
얻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조금 제약이 있지만…….
이 비무에서 활용하기엔 충분하다.
패룡기(覇龍氣).
그 특징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의 증대와 패룡기(覇龍氣)의 사용.
수많은 단련 끝에 성장한 [회복(回復)]에 스킬 강화권을 사용하다가 얻게 된 예상 밖의 힘.
강기(罡氣)조차 견뎌 내는 패룡의 힘.
화경에 이르진 못했으나.
끝없이 기초를 다지고 다져서 무(武)의 기본을 손에 넣었고.
그 무(武)를 품을 수 있는 굳건한 육체를 만들어 냈다.
화려한 무공?
난무하는 검기나 검강?
필요 없다.
그것은 강함의 표현 방식일 수 있으나.
강함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제 강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엄청난 근력과 패룡기의 반탄력이 팽후의 도를 튕겨 낸다.
비무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열린 팽후의 품.
그 품을 향해 설천위의 도가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허!”
십수 년 만에 팽후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