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63화 (263/624)

제263화

262화-갑(甲) (2)

벤다.

검(劍)이든 도(刀)든, 날붙이라 칭해지는 모든 물건은 태초에 이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짐승의 가죽과 살을.

초목의 잎과 가지를.

적의 갑옷과 피육을.

무언가를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

그것이 날붙이다.

그렇기에 도(刀)라는 무기는 그 뿌리가 깊다.

양쪽에 날을 세우는 검보다 한쪽에 날을 세우는 도가 더 만들기 쉬운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단순 도구로 쓰는 찌르기엔 딱히 검과 같은 예리함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 둘째 이유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도(刀)는 무기로서, 도구로서 쓰여 왔다.

베기 위해.

소백진의 도(刀)는 그 벤다는 목적의 대상을 하나로 압축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사람을 베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발전해 온 도(刀).

그런데,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죄인을 베는 것과 반항하는 적을 베는 것은 다르다.

그렇다면, 내 도(刀)는 그냥 허울뿐인 장식인 건가?

내가 갈고닦은 기예는 그저 겉보기에 좋은 구경거리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 의문은 곧 부정으로 이어졌다.

가문을 나와 무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그 끝에.

그의 도(刀)는 사람을 베는 것에 통달했다.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은 피육(皮肉)만이 아니다.

가죽과 살점만이 사람을 이루고 있는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사람을 감싸고 있는 허울이고.

그 사람의 행동, 말, 시선, 생각 등등.

수많은 것들이 모여 그 사람을 이룬다.

목을 벤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벤다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그 사람을 베면 목은 자연스럽게 베인다는 뜻이다.

“허!”

팽후가 휘두른 도가 또다시 막힌다.

정확히 말하면, 막히기 전에 베였다.

팽후의 도가 닿기 전에, 그 궤적이 먼저 베였다.

그 도(刀)의 궤적을 읽어 내서 미리 차단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고등한 개념의 수읽기 싸움일 리가 없지 않은가?

설천위는 애초에 그런 순간적인 대처가 부족한, 빈약한 재능의 소유자다.

그런데 한참 경지가 높은 팽후를 상대로 그의 궤적을 전부 읽어 내서 미리 차단한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애초에 속도도, 위력도 팽후가 앞서기까지 하는 상황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설천위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팽후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내고 있었다.

팽가의 도(刀)는 강맹함을 주력으로 하는 무공이긴 하나 그렇다고 그 속도가 부족하진 않다.

오히려 패도(覇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기에 그 속도는 빠른 편이다.

보통의 무인조차 우습게 보는, 힘으로 뿜어내는 도의 공세.

도를 쥔 팽후의 손이 이젠 일류급 무인의 눈에도 보이지도 않거늘.

설천위는 그 모든 공격을 베어 내고 있었다.

자신의 앞으로 향하는 모든 공격을.

“제공권(制空圈)의 활용이군.”

일정 영역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는 무(武)의 기초 중 하나.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익히면 당연히 배우게 되는 개념.

물론 그것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누구나 배우는 개념이다.

공간의 장악이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것을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는 거지?

경기를 바라보는 남궁선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이는 순간.

“제공권이요?”

그녀의 옆에서 함께 비무를 지켜보던 서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거예요? 언니?”

“으음.”

서하영의 시선을 받은 소윤혜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저거 아직 다 못 배웠어.”

“……네?”

“소 소저가 못 다 배운 것을 천위가 쓴단 말이오?”

“그게 말이 돼?”

“……설 형이 여기 없다고, 다들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소윤혜의 대답에 서하영과 철백은 물론이고 남궁선마저 놀라자,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왔던 주현운이 고개를 저었다.

“뭐, 사실인데 어쩌겠어? 솔직히 너도 놀랐잖아?”

“……저도 뭐, 흠흠.”

“거봐.”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주현운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은 남궁선은 다시 소윤혜를 바라봤다.

놀란 건 놀란 거고, 이유는 들어야지.

모두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향하자, 소윤혜는 살짝 부끄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배울 필요가 없다고…….”

“아!”

소윤혜의 대답에 깨달음을 얻은 서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보고 대처할 수 있으니까 굳이 안 배워도 된다고 하신 거 아닐까요?”

“그거, 가능성 있군.”

“다리가 약한 소 소저를 위해 만든 초식이지만, 소 소저는 생각보다 재능이 뛰어나 굳이 급하게 익힐 필요가 없었단 소리군.”

서하영의 추측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정답이다.]

“에?!”

갑자기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서하영이 화들짝 놀랐다.

그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서하영과 그 옆에 나타난 소백진에게로 향했다.

“으음, 난 잘 안 보이는데.”

“……예?”

“아, 너희한테 얘기를 듣고 영안을 개안하려고 노력해 봤는데, 아직 좀 부족한지 기척 정도만 느껴진단 말이지.”

기척 정도만 느껴진다.

그 발언과 함께 눈을 가늘게 뜨는 남궁선의 모습에 주현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소 소저의 조부이십니다.”

“아,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후배 남궁선이라고 합니다!”

[잘 알고 있으니 그리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인사성이 밝은 건 보기 좋구나.]

인사성 밝은 남궁선의 태도에 허허롭게 웃은 소백진의 말을 소윤혜가 대신 전해 줬다.

“하하, 제 매력 중 하나죠! 그나저나 정답이라고 하시면…….”

[너희가 말한 대로 내 손녀에게 저 방식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내 손녀에겐 당장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윤혜의 도(刀)는 이미 색에 물들기 시작했다.

소윤혜 자신이라는 색에.

하물며 다리의 병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소윤혜에게 다리의 병을 전제로 만들어 낸 저 초식을 전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소백진은 저 초식을 소윤혜에게 숙달시키지 않았다.

개념만을 알려 주고, 그녀가 자신의 방식대로 활용할 수 있게 놔두었다.

그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하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러면 설 공자도 다리 하나는 튼튼하니까 안 맞는 거 아닌가요?”

[아쉽게도, 저 녀석에겐 그 흠보다 득이 더 크더구나.]

“아하.”

다리를 못 움직이는 것을 전제로 만든 초식을 익히는 게 상대의 공격을 보고 방어하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거로구나!

빠르게 납득한 서하영이 물러서자, 뒤이어 남궁선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저 초식의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당장 저만 해도 단숨에 뚫을 자신이 없을 정도로요.”

단숨에 뚫을 자신이 없다.

남궁선의 그 발언에 다른 세 사람이 놀라서 남궁선을 바라봤다.

남궁선처럼 자신감이 가득한 무인이 저렇게 인정할 정도면…….

저기서 팽후와 싸우고 있는 설천위의 공방이 팽후의 배려로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니란 소리 아닌가?

모두의 경악 속에서 남궁선의 물음에 소백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재(無才)는 무색(無色)이라.]

재능이 없다는 것은 자신만의 색이 없다는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는 다양한 색으로 그림을 그려도 그 배경에 색이 먹히지 않는다.

[저 도(刀)는 나의 도(刀)다.]

다만, 그 색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도화지가 작으면 그림이 완성될 수 없다.

그렇기에 천마를 비롯한 혼들은 그 도화지를 키우는 일에 열중했고.

[앞으로 너희가 볼 광경은 너희가 알던 무(武)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될 것이다.]

* * *

“흐응? 이건 예상 밖인데?”

팽후가 술을 마시던 전각 위.

홀로 남아 도술로 만들어 낸 손으로 남은 술을 마시던 언여휘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마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모를 만한 사실.

설천위는 평소 데리고 다니던 혼들을 떨어트려 놨다.

그의 지척에 있던 녀석들은 영혼을 볼 줄 아니까 이제 안 것 같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는 눈치다.

혼을 다루는 술사가 혼을 떨어트려 놓았다는 것.

즉, 혼의 힘에 기대지 않겠다는 것.

그 상태로 설천위는 지금 저 비무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의 의미.

“진짜,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은 건가?”

술사로서의 역량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쌓은 무(武)로만 증명하겠다.

그런 의미인가?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멋있긴 하겠네.

재능의 한계를 극복하고 끝내 도달한 고수의 경지라면, 솔직히 멋있을 만하지.

그런데 말이야.

“진짜, 너무 오만한데?”

아무리 봐도 화경으로 보이진 않는데?

자신이 술사이긴 해도 무림에서 구른 세월이 아득하다.

보는 것만으로 무인의 수준을 대충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아무리 봐도 화경급의 고수가 아니다.

지금 당장 팽후의 도를 막아 내는 저 방어만 해도 거칠게 공방이 오가고 있는 것 같으나, 그 실상은 팽후의 일방적인 공세를 설천위가 겨우 막아 내고 있는 데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고작해야 무(武)만으로 팽후와 싸우겠다고?

“조금 주제를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은데?”

* * *

베고, 베인다.

10분? 아니, 5분?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겠다.

1분 정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서걱

아, 베였다.

볼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설천위는 단숨에 잡생각을 털어 냈다.

극한의 집중력 속에서 육체는 상대에게 반응하면서도 생각은 옆으로 살짝 삐져나갔던 상황.

단숨에 의식을 다잡은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도를 움직였다.

쩡!

팽후의 도와 부딪힌 도가 강렬한 소음과 함께 떨어져 나온다.

얼핏 보면, 막았다고 생각할 만한 광경.

허나, 그것이 자신의 패배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설천위는 직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베어 내지 못했으니까.

자신이 팽후의 공세를 막아 내는 방법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팽후의 공격을 베어 내는 것.

베어 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결국 그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실패했다는 말과 같다.

저 괴물은 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공방 속에서 자신의 제공권을 비집고 들어가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만반의 준비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낮으면서도 싸늘한 팽후의 목소리가 도의 폭풍을 뚫고 설천위에게 와 닿는다.

이 정도라면 실망할 거라는.

그런 목소리.

기세 좋게 미친 듯이 공격을 몰아붙인 게 누군데.

거참.

헛웃음을 삼키며, 설천위는 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팽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 이 정도만 보여 주고 갑(甲)으로 올라가는 건 너무 욕심이긴 하지.

“무(武)는 오로지 제 것만 쓸 것입니다.”

“무(武)는?”

그래, 무(武)는 오로지 자신의 것만 쓸 것이다.

소백진과 현태중을 관중석에 두고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비무에서 아무리 불리해져도 빙의는 없다.

하지만.

“근력과 육체의 강함 같은 것은 개인의 재량이지요?”

철백이 단련을 통해 남다른 강도의 육체를 만들어 냈듯이.

서하영이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단련으로 굳건한 신체를 만들었듯이.

무(武)를 펼쳐 내는 그 기반이 되는 육체는 사람마다 다르다.

설천위의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도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던 팽후는 이내 기이한 광경을 목도했다.

절로 눈이 가늘어지는, 믿기 힘든 모습.

스으으윽.

설천위의 몸에서 기이한 느낌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검은색이라는 불길한 색을 띠고 있음에도 그것이 사특하거나 악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과도 같은 어둠.

그런 어둠을 두르자, 설천위의 볼에 새겨진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한다.

피가 멎고, 살이 아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팽후마저 놀란 순간.

[참수(斬首)].

설천위의 도가 팽후의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와 힘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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