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260화-잠룡제 (9)
베였다.
그리 생각한 것은 소윤혜의 상대인 도서구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 전부가.
도서구의 목이 베였다고 생각했다.
“꺄앗……!”
그 끔찍한 생각에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
너무나도 멀쩡히 서 있는 도서구의 모습에 나오던 비명이 다시 삼켜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도서구조차 검을 쥐고 있던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는 상황.
그 속에서 도를 늘어트린 채, 가만히 서 있던 소윤혜가 작게 입을 움직였다.
“방금 그 지점이 제 영역의 끝입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장보다 배는 될 것 같은 거리에 서 있는 도서구를 향해 소윤혜는 선언했다.
“다음은 진짜 벱니다.”
짧은 선언.
그와 동시에 강렬한 한기가 경기장을 휩쓸었다.
마치 죽음이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
화살이 귀를 스쳐 지나가면 이럴까.
검이 목젖을 스쳐 지나가면 이럴까.
너무나도 강렬한 죽음의 향기가 경기장 전체를 휩쓴다.
“휘유~!”
너무나도 익숙한 그 향기에 남궁선은 휘파람과 함께 소윤혜를 바라봤다.
“쟤가 원래 저 정도였나?”
“성장한 거죠.”
개화(開花).
다리의 장애와 사사하던 스승인 조부의 이른 죽음.
모든 것을 전수 받지 못하고 서서히 스러져 갔어야 할 소윤혜라는 꽃이 드디어 그 향기를 뽐내며 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神醫)라는 강력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서서히 다리의 병을 극복하고.
죽어서도 함께하는 조부의 도움으로 부족했던 배움의 틈이 메워졌다.
그렇게 완성됐다.
소윤혜라는 사형 집행인이.
옛날, 설천위가 소윤혜를 처음 만났을 때.
소윤혜는 망설임 없이 설천위를 쫓던 적을 죽였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서?
물론 그것도 이유이나, 애초에 그녀가 살인 자체에 익숙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손속이다.
그녀의 조부인 소백진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그녀에게 살인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아이에게 너무한 짓 아니냐고?
윤리와 도덕을 따지다가 아이가 길바닥에서 객사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소백진은 그리 생각했기에 소윤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길을 가르쳤다.
그 결과, 소윤혜는 죽음이란 것에 익숙해졌다.
실제로 그녀는 대부분 실전에서 적을 죽인다.
그녀의 입장에서 상대의 목을 베는 행위는 절대 잔인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참하게 죽을 수도 있는 상대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죄인을 참하는 가문에서 이어진, 비틀어진 자비.
허나.
“아미타불……. 따스한 마음을 가진 시주입니다.”
그렇기에 따스하다.
감동에 차서 염주를 굴리는 스님을 발견한 관중들 중 하나는 공포심에 저도 모르게 슬쩍 거리를 벌렸지만 뭐, 그건 사소한 일이고.
여하튼.
그녀에게 상대의 목을 벤다는 것은 시작이자 끝이고.
최선의 자비이며, 최후의 배려다.
여전히 도를 늘어트린 채 담담히 상대를 바라보는 소윤혜의 모습에 수많은 이들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계속하실 거라면, 작은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소윤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기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벱니다.”
방향을 알려 주는 조언.
그 조언을 듣는 순간, 도서구의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방향은 알았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정보는?
‘……어디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도 잠시, 도서구는 이어지는 소윤혜의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한 걸음.
소윤혜가 앞으로 나온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소윤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음을 깨달은 도서구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허나, 그것만으로 부족했던 건가.
도서구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세워 자신의 목을 지켰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리고.
서걱.
그것조차 베였다.
잘려 나간 검신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멍하니 그 검신을 시선으로 좇던 도서구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은 봐드리지 않아요.”
고작 한 걸음.
그 한 걸음에 아주, 아주 약간 반응이 늦었을 뿐인데 검이 베였다.
참(斬).
벤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극의를 품은 도법(刀法).
여전히 담담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윤혜의 두 눈을 마주한 도서구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 * *
“진짜 재미없었네. 놀라긴 했지만.”
“그렇죠?”
히죽 웃으며 되묻는 설천위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남궁선은 비무대 위에서 내려가는 소윤혜를 바라보며 웃었다.
“뭐, 솔직히 놀랍긴 했어. 쟤가 저렇게 살의(殺意)를 다루는 것에 능숙할 줄이야.”
[허허, 그리 칭찬받을 정도는 아니거늘.]
[……정파에서 이건 칭찬이 아니지 않나?]
[명백하게 칭찬이 아니다.]
[뭐라?!]
남궁선은 모르는, 그녀의 말로 시작된 혼들의 다툼에 그들을 영력으로 대충 뒤로 밀어 버린 설천위는 남궁선을 바라보며 웃었다.
“다음 경기도 구경할래요?”
“다음 경기는 어떤데?”
“그게 저도 잘 몰라요. 제가 잘 아는 애들은 이게 끝이라.”
이번 병(丙) 승급전엔 아쉽게도 잠룡대는 전원 불참했다.
그나마 여웅이랑 문율이 가능성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실력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철백이나 서하영, 주현운이 나가니 자신들은 한참 부족하다고 여긴 거겠지.
뭐, 좀 더 다듬어서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흐응, 그럼 어떻게 할까. 뭐 여기 말고는 딱히 볼 것도 없는 것 같던데.”
“그렇긴 하죠.”
해 봐야 음식점들밖에 없으니까.
뭐, 나름대로 돈 좀 벌려고 열심히 준비한 것 같으니 돌아다녀 볼 만한 가치는 있겠지만.
“에이!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여기선 이 누님이 친한 동생과 놀아 줘야겠네!”
“예?”
“뭘 예야? 야! 자! 그나마 요리 솜씨가 괜찮은 녀석들한테로 안내해.”
“누님, 저 발이 손톱만 해서 아는 애들이 없는데요.”
“……그래?”
“네.”
……그러고 보니, 얘는 노는 애들하고만 노네?
내 동생은 꽤 다양한 애들이랑 놀았던 것 같은데.
얘들이랑 가장 자주 어울렸던 것 같긴 하지만.
아니, 뭐 이 녀석들이 논다고 해 봤자 같이 수련하는 것 정도…….
아!
그래서 친구가 없구나.
빠르게 납득한 남궁선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좋아! 발로 찾아보며 맛보는 것도 괜찮지!”
“아뇨. 안 괜찮아요. 저도 일정이 있어서.”
“일정? 친구 없다며?”
“아, 그게 친구는 없는데 일정은 있어요. 아니, 친구가 없지도 않은데요? 저, 친구 꽤 있거든요?”
이 누나가 대체 뭐라는 거야.
옛날 생각나게.
흠흠.
“암튼 전 일정이 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침 저기 돌아온 철백을 넘겨드리죠.”
“응?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좋아.
철백을 미끼로 남궁선의 마수에서 벗어난 설천위는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너무 길게 잡혀 있으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진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선은 이내 피식 웃곤 몸을 돌려 철백을 바라봤다.
“남궁 언니!”
그 거대한 덩치 뒤에서 나타난 서하영의 부름에 활짝 웃은 남궁선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찬가지로 팔을 벌려 단숨에 그녀의 품에 안긴 서하영은 히히 웃으며 남궁선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언니!”
“그러게! 그나저나 많이 강해졌던데?”
“헤헤.”
“소 동생도 그렇고.”
“고맙습니다.”
“고마울 거야.”
마찬가지로 철백의 뒤에서 나타난 소윤혜의 볼을 살짝 꼬집은 남궁선은 웃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것이 꽤나 격전을 치른 티가 난다.
“철백, 예전에 내가 했던 제안은 아직도 유효한데?”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시 조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어우, 튕기기는. 그래도 뭐,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 봐줄까?”
웃으며 철백의 어깨를 팔로 툭 친 남궁선은 히죽히죽 웃으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셋 다 수련을 열심히 한 것 같아 보기 좋긴 한데……. 아쉽게도 다음 경기는 봐도 재미없을 것 같네?”
“아!”
남궁선의 말에 대충 상황을 이해한 철백은 고개를 끄덕이곤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잠시 비무 순서를 생각하던 철백은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이곤 남궁선을 바라봤다.
“지금부터 현운이의 병문안을 갔다 오면 딱 맞겠군요.”
“응? 맞아?”
“예. 봐야 할 경기가 있습니다.”
봐야 할 경기.
그 말에 잠시 턱을 쓸던 남궁선은 조금 전에 설천위가 사라진 빈자리를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나도 봐야 할 것 같은데? 같이 움직일까?”
* * *
“후.”
작게 토해 내는 숨결.
물론 그런 행동과 달리 한 점도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 덕에 숨소리는 조용히 이어졌다.
“많기도 하네.”
수십 구의 시체가 널브러진 숲속.
무림학관 내부에 있는 작은 숲에서 찾아낸 적들을 깔끔하게 정리한 살존은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많기도 해라.”
여기에 모여 있던 녀석들 말고도 학관 전체를 둘러보다가 만나서 처리한 녀석들이 수십이다.
아니, 이놈들은 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거야.
“참~, 무림은 넓어.”
쯧쯧, 혀를 차며 연기를 뿜어낸 살존은 담담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최대한 피 냄새가 덜 퍼지게 깔끔하게 죽였더니, 바닥에 피도 별로 없다.
물론 시체 밑엔 피가 꽤 고였겠지만.
그나저나.
“늦었네?”
“……이게 무슨 일이오. 살존.”
나무 사이로 나타난 사내를 보며 웃은 살존은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 대빵한테 말했잖아? 의뢰라고.”
“전해 들은 바가 없소.”
“맞다. 너 맹주랑 사이가 별로 안 좋지?”
담담하게 대답하는 암은단(暗隱團) 단주(團主) 유석천을 보며 미소 지은 살존은 담뱃재를 땅에 털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번 축제의 보안에 관한 의뢰를 받아 날벌레들을 처리한 것뿐이야. 너무 감사하진 않아도 돼. 다 일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그렇다면 전멸이 아니라 포로 정도는 몇 잡아 줬으면 좋았을 것 같소만.”
“에이, 얘들이 뭐 그런다고 입이나 여나?”
약물과 술법에 절여진 녀석들이니 고문이나 받다가 죽겠지, 뭐.
아까 승급전을 치르는 아이 중에 자비가 무엇인지 훌륭하게 보여 준 아이가 있던데, 이 녀석은 그것도 안 봤나 보네.
딱딱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서 있는 유석천을 보며 혀를 쯧쯧 찬 살존은 이내 고개를 돌려 숲 너머를 바라봤다.
“대충 일은 마무리했으니, 뒤는 맡겨도 될까?”
“……맡긴다고? 나에게 말이오?”
“응. 나도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서서히 흩어지는 살존의 몸.
그 모습에 짧게 주위를 둘러본 유석천은 수신호로 부하들을 불렀다.
그의 부하들이 살존이 만들어 낸 시체를 치우는 사이, 유석천은 환호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
승급전도 막바지에 도달했을 터.
이 뜨거운 함성의 주인공은 누굴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든 유석천은 부하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기에 거침없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도착한 비무장.
그곳에선 심판의 선수 소개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선 이 공자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홀로 수십의 무림 악적들을 물리치고! 홀몸으로 흑룡학관에 들어가 그들의 콧대를 꺾었으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설명.
단숨에 그 설명의 대상이 누구인지 깨달은 유석천은 고개를 돌려 장본인을 바라봤다.
묘하게 달아오르는 숨.
마치 이미 몇 번이나 전투를 치른 것처럼 몸이 예열된 상태의 설천위였다.
그의 실력에 저렇게까지 준비할 상대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설천위의 현재 등급이 을(乙)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지금 이 비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경기가 승급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 상대느으으으으으은!! 무림학관의 학관장!! 천하 십대 고수의 일각! 도왕(刀王)!! 팽 대협!!”
도를 어깨에 걸친 팽후가 예열을 끝낸 설천위의 앞에 서서 웃었다.
“준비는 어떤가?”
가벼운 물음.
허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압도적인 강자의 기세가 비무대 위를 짓누른다.
그 위압적인 기세 속에서 가볍게 몸을 푼 설천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반(萬般)의 준비를 갖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