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258화-잠룡제 (7)
철벽.
철백의 방어는 그야말로 철벽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이것을 방어라고 불러도 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모든 공격을 전부 맞는다.
회피는 일절 없고, 그저 전진하며 모든 공격을 받아 낼 뿐이다.
상대가 쓰는 것이 연습용 목검일지라도 목숨이 위험해질 행동이거늘.
철백은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실행하고 있다.
카가가가각!
검기를 품은 검이 강철을 긁어낼 때의 소음이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저 검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
심지어 선명하게 맺혀 있는 검기의 수준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웬만한 강철 기둥도 베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검기(劍氣).
비무를 관전하는 이들 중 무(武)에 소양이 있다는 사람들은 이 말도 안 되는 경기에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그 나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의 압도적인 검세(劍勢)를.
또 한쪽은 그 압도적인 검세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내는 놀라운 육체(肉體)를.
이게 진짜 가능한 일인가 싶다.
심지어.
“……저 아이, 내공을 안 쓰는군.”
이리저리 피하며 검을 휘두르는 주현운.
그를 쫓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철백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권기(拳氣)를 두른 적이 없었다.
전진하는 과정에서 방해되는 주현운의 검과 주먹이 부딪힐 때조차.
자신의 육체를 믿고, 권기 따위는 필요 없다는 오만인가.
아니면…….
몇몇 강자들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 순간.
끼릭!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몰아치던 주현운의 검이 드디어 정지했다.
물론 그냥 정지한 건 아니다.
“진짜, 이럴 때마다 어이가 없어요.”
“그것을 위한 단련이지.”
한숨을 내쉬는 주현운을 향해 철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철백의 옆구리.
수십, 수백 번 반복되는 검의 움직임 속에서 그 흐름을 꿰뚫은 철백이 기어코 주현운의 검을 붙잡은 것이다.
일렁이다 못해 타오르고 있는 검기를 두른 주현운의 검을 그대로 움켜쥐어 그 검을 정지시킨 것이다.
“나는 매 비무 때마다 네 흐름이 달라진다는 것이 더 믿기 힘들다만.”
검을 잡아당기며 말하는 철백.
그 압도적인 힘에 주현운은 망설임 없이 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걸 위한 수련이죠.”
“네 경우엔 재능 같은데.”
“그것도 있겠죠?”
주현운의 검을 뺏어 자신의 등 뒤로 던져 버리는 철백.
그 모습에 관중은 탄식했다.
검수가 검을 뺏겼다.
이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뿐인 무기를 빼앗긴 무인의 전력은 최소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하물며 상대가 저런 강철과 같은 인간이라면.
“끝났군.”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관중석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에 대부분 공감하듯, 심판을 맡은 교관도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아직 안 끝났소.”
철백이 심판을 막았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여태까지와 다른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주현운은 양손을 자신의 배 앞에 모은 채 철백을 바라봤다.
“매번 말하지만, 이거 미완성이라서 쓰기 싫다니까요.”
“이런 무대에서 실험해 봐야 실력이 늘지.”
“그게 무슨. 에이, 저도 몰라요.”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철백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은 주현운은 배 앞으로 모았던 손을 움직인다.
길게 호흡을 들이쉬고,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왼손으론 엄지와 검지가 말린 부분을 손바닥으로 막는다.
그리고 천천히 가슴까지 두 손을 올린다.
눈이 부실 것 같은 강렬한 기(氣)를 머금은 두 손에서 일순 빛이 사라지고.
“이 시간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양손을 좌우로 쫙 펼쳐 내는 주현운.
그 오른손에는 선명한 검(劍)이 쥐어져 있었다.
“……강기?!”
누군가의 경악에 주현운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하면 이런 편법은 쓰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오른손에 쥔, 무형의 검.
그것을 철백에게 겨누며 주현운은 고개를 저었다.
“다쳐도 전 몰라요?”
“상관없다.”
웃음과 함께 왼손은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으론 목을 가린 철백이 단숨에 땅을 박찬다.
그리고.
서걱!
비무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절삭음이 비무대 위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 * *
“……저게 뭐야?”
“음, 독문 무공?”
[확실히 저 아이밖에 쓸 수 없는 기술이긴 하지.]
[나도 전수해 준 적 없으니.]
혼들의 대화를 들으며 설천위는 비무대 위의 주현운을 바라봤다.
빛이 응집된, 무형의 검을 쥐고 있는 주현운.
다만 그것은 강기처럼 유형의 성질을 가지고 있진 않다.
진정한 무형의 검.
“……심검? 심검의 응용인가?”
“오, 역시 검을 쓰는 사람이라 눈치가…….”
“진짜라고?!”
단숨에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남궁선의 행동에 이리저리 몸이 흔들리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그럴 걸요?”
“이런, 미친……!”
경박한 행실과는 달리 잘 쓰지 않는 거친 말을 내뱉으며 남궁선은 휙 고개를 돌렸다.
앞섶과 함께 가슴이 베인 철백이 한 걸음 물러서서 방어 자세를 굳히는 것이 보인다.
순간적으로 멈춰 선 덕에 크게 베이진 않았는지 출혈량 자체는 많지 않았다.
철백조차 방어에 집중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공격력.
물론, 앞서 남궁선과 대화를 나눈 것처럼 강기(罡氣)는 아니다.
아니, 강기(罡氣)를 주현운이 익히고 있었다면 저 기술은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저 기술은 온전히 철백의 방어를 뚫고자 주현운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기술이니까.
물론.
‘저걸 벌써 익힐 줄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히긴 할 기술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익힐 줄은 나도 몰랐지.
소검(燒劍).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게임 속에선 완성된 형태로 등장하는 기술.
물론 게임에선 심검(心劍)을 익히는 과정에서 얻는 기술이다.
그 효과가 상당히 좋아 심검을 익힌 뒤에도 쓰지만.
관통 혹은 방어 무시라고 부르는 효과.
적을 벤다는 의지가 현실에 개입해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기술.
강기도 익히기 전에 그 편린이라도 붙잡았다는 점에서 역시 사기캐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도 강기를 익히지 못했으니 아니라고 해야 하나.
참, 여러모로 사람 골치 아프게 만드는 녀석이다.
“미완성이라는 의미는?”
“집중력을 너무 써서 딱히 큰 의미가 없거든요.”
“보통의 무인을 상대할 땐 손해가 더 크다는 소리군.”
설천위의 설명에 바로 이해한 남궁선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현운의 검을 바라봤다.
확실히, 검의 다양성이 크게 줄었다.
여전히 뛰어난 속도와 위력, 변화를 가졌지만 아까 철백을 몰아붙이던 수준엔 미치지 못한다.
“무기는?”
“베지 못해요. 미완성이니까요.”
“무기에 담긴 내공을 완전히 파훼하진 못했단 소리군.”
집중력은 소모하는데, 상대의 무기에 담긴 내공에 막힌다.
물론 갉아먹는 식으로 몇 번이나 충돌하면 끝내 상대의 무기를 벨 수 있겠지만.
효율이 썩 좋지 않다.
반면.
“내공이 없는 육체이니 어떤 식으로든 통한단 소리군.”
“네.”
그 위력의 3할이라도 통한다면, 인간의 육체는 붉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상처가 쌓이고, 출혈이 늘어나다 보면 결국 쓰러지게 된다.
정말 딱 철백을 상대할 때에만 의미 있는 기술.
주현운이 미완성이라고 하며 잘 쓰지 않는 이유다.
무엇보다.
“아직 위력의 조절이 미흡한가 봐요.”
“깊이를 조절하지 못한단 소리야?”
“네.”
철백의 방어를 뚫는 데까진 성공했는데, 그 방어를 뚫고 난 뒤에 어디까지 베는지 그 정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얼추 제어할 수 있긴 하지만, 진짜 위험한 지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멈출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기에 최근에 한 비무에선 주현운이 저 기술을 쓰지 않았는데…….
“꽤나 이기고 싶었나 보네.”
평소와 달리, 몸을 지키기 위해 양팔로 방벽을 세운 채 달리는 철백을 보며 설천위는 히죽 웃었다.
뭐, 그런 녀석이지.
상대의 전력을 끌어내지 않고 이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길 만한 성격이긴 하지.
다만.
그 길이 썩 평탄해 보이진 않는다.
이미 팔 곳곳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고, 어느새 감을 잡은 주현운은 완벽하게 철백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을 때도 거리를 완벽하게 유지하던 주현운이다.
검이 통하게 된 시점부터 그 품을 내줄 리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지켜보고 있던 관중도.
검을 휘두르는 주현운도.
그 앞에서 전진하고 있는 철백도.
그런데.
어째서 철백은 이런 상황을 유도한 것일까?
어째서 주현운의 검을 붙잡아 집어던지고, 말리려던 심판까지 제지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강한 인간이란 참 독특해요.”
“응? 뭐가?”
한창 주현운과 철백의 공방에 집중하던 남궁선은 뜬금없는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강한 인간이 독특해?
“뭐야? 놀리는 거야?”
“뭐, 누님도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하죠? 내가 강한 인간이 아니면 그럼 누가 강한 인간인데?”
무림맹의 단주.
그 강함은 이미 전 무림에서 인정하는 수준이다.
그런 그녀가 그렇긴 하죠, 수준이라면 누가 강한 인간이라는 걸까?
남궁선의 당연한 의문에 설천위는 웃으며 비무대 위를 가리켰다.
“저기서 칼질을 당하고 있는 녀석이요.”
“……쟤?”
철백?
강하기야 한데.
지금 이곳저곳 썰려서 피가 흐르는 모양새이니 그 표현을 쓰기 썩 어울리는 상황은 아닌 듯한데?
남궁선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천위는 담담하게 웃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있잖아요? 선천적으로 강한 사람. 밖으로 드러나는 강함이 후천적으로 따라오는 사람.”
“아, 그런 의미로?”
이어진 설천위의 설명에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으로 보면, 철백은 확실히 강한 사람이 맞긴 하다.
내공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고, 이 학관에서 버티며 꾸역꾸역 위로 올라간다.
약한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상황.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그를 강한 인간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증거였다.
“크하압!”
물론, 피를 흩뿌리며 주현운의 검을 쳐 내는 모습을 봐선 아직 후천적인 강함은 부족한 것 같지만.
아슬아슬하게 철백의 모든 공격을 피해 내며 착실하게 철백에게 공격을 하고 있는 주현운.
그런 주현운의 공격을 최소한으로 버텨 내며 어떻게든 전진하고 있는 철백.
서로가 서로를 향해 최선을 다하여 만들어 내고 있는 위태로운 균형.
그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서 서로를 향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다만.
“왜 재미있는 승부가 될 거라고 한 거야?”
그 잠깐 사이에 익숙해져 버린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며 남궁선은 결국 설천위에게 질문을 던졌다.
분명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긴장감 있는 경기이긴 하지만, 그 속내는 그렇지 않다.
주현운의 8할 이상의 우위.
보기에 아슬아슬하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 수 있지만, 주현운의 재능을 생각하면 전혀 아슬아슬하지 않다.
저 종이 한 장 차이의 회피와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주현운의 재능이니까.
이대로 가면, 철백이 진다.
거의 확정적으로.
철백이 부린 만용의 결과로, 철백이 진다.
도저히 재미있는 승부가 아니다.
“어?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래, 재미는 지금부터일 거라며. 난 전혀 모르겠는데?”
“그게 말이죠. 현운이만큼이나 철백, 저 녀석도 천재거든요.”
주현운이 철백을 뚫기 위해 소검(燒劍)의 기틀을 잡았다면.
철백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그 소검으로부터 견뎌 내기 위해 또 다른 벽을 세우고자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철백도 천재다.
그 말에 남궁선이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리는 그 순간.
깡!
한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가 비무대 위에서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주현운이 단숨에 땅을 박차 뒤로 물러서고.
쿵!!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따라붙은 철백의 묵직한 왼발이 비무대의 돌판을 부순다.
허리를 비트는 철백의 몸을 타고 엄청난 바람이 일렁인다.
그 압도적인 근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람을 휘감고 비트는 허리를 따라 철백의 주먹이 뻗어 나간다.
그리고 비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철백의 주먹이 주현운에게 닿았다.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