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257화-잠룡제 (6)
“의뢰?”
의뢰라는 짧은 대답에 맹주는 담담한 눈으로 살존을 바라봤다.
“설마, 내가 올 것을 알고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응. 알고 있었지.”
“허허.”
수염을 쓸며, 고개를 주억거린 맹주의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
“오만하군.”
“딱히 그렇진 않은데? 나 나름대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 말이야.”
어깨를 으쓱인 살존은 손에 든 곰방대를 나무에 내리쳐 재를 털어 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맹주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살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만, 이번 의뢰에서 당신이 적이 아니기에 이리 당당하게 있는 것뿐이야.”
“적이 아니다?”
“응. 이번엔 의뢰주가 정파 쪽 사람이거든.”
“호오.”
정파에서 살존에게 의뢰를?
의뢰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평판에 큰 타격이 갈 일이다.
살존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세간은 그녀를 사파로 규정하고 있으니까.
그런 살존에게 의뢰를 넣었으니 떠들기 좋아하는 작자들이 뭐라고 할진 뻔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살존에게 의뢰를 넣을 만한 인물.
“학관장이 큰 결심을 했군.”
“꽤나 호쾌한 사람이더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선물까지 줘 버렸지 뭐야.”
“살존의 선물이라, 받고 마냥 좋아할 만한 물건은 아니겠군.”
“그 말 참 서운하네?”
고개를 틀며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살존.
너무나도 매혹적인 그 모습에 남자라면, 아니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떨릴 법했으나.
“나는 의심 가는 선물은 열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맹주는 담담하게 그 아름다움을 무시했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아름다움을 내쳤다.
“응, 역시 안 통하네. 사천맹주도 비슷했지.”
“사존과 나를 비교하는 건가?”
“그렇지. 사람이라면 당연히 비교해 보지 않을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살존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뭇가지 위에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고 있다.
“둘 다 흔들리지 않았지만, 차이점은 사천맹주는 내게 자신의 오른팔이 되라고 제안했어.”
“네가 사파가 아니었다면, 나도 같은 제안을 했을 것 같군.”
“역시 둘은 닮았네.”
기질이, 야망이, 그리고 성격이 닮았다.
가만히 맹주를 바라보던 살존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여하튼, 나는 이번에 그쪽 사람의 의뢰를 받아 온 거니까 쓸데없는 방해는 하지 마.”
“흐음, 나도 입장이란 게 있어서 말이야.”
수염을 쓸며 살존을 바라보던 맹주는 이내 작게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내 눈감아 주지.”
“뻥치고 있네.”
스륵.
나무 위에서 사라지는 살존의 모습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늘이 움직이고 있어.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겠지?
움찔.
가만히 서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맹주는 작게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천천히 힘을 풀었다.
“하늘이라…….”
암, 움직이고 있겠지.
이 넓은 하늘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 있으니.
허나.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늘의 주인이 항상 같은 사람이란 법은 없지 않은가.
* * *
“한쪽은 강철 같은 육체로 적을 압박하는 철권의 소유자! 금강호신(金剛護身)! 철백!”
금강호신(金剛護身).
금강으로 육체를 지킨다는 별호는 이 무림에 가장 흔하게 퍼져 있는 전설의 경지, 금강지체(金剛之體)를 가리킨다.
적당히 단계를 낮춘 느낌으로.
몸이 금강은 아니지만, 대충 금강을 둘렀다는 느낌?
여하튼 그만큼 단단하단 소리다.
“꽤나 거창한 별호구나.”
“그만큼 단단하긴 하거든요.”
아까까지 함께 있다가 어느새 경기장 위에 선 철백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거창한 별호이긴 한데 안 어울리는 별호도 아니긴 하지.
별호 참 잘 지었네.
그나저나.
“다음 선수는 아아! 그 실력을 아직 뽐내지 못한 비운의 무인!”
응, 아직 뽐낸 적이 없긴 하지.
“아직 별호는 없으나 이 자리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낼 호걸! 주현운!!”
“오오! 힘내 보라고!!”
“겁먹지 말고!”
나름 무림에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철백과 달리 아무런 명성도 없는 주현운을 향해 격려의 말이 쏟아졌다.
뭐, 거기엔 외관적인 면도 꽤 있을 거다.
철백은 아까 전에 나왔던 황보척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거구니까.
키도 190cm를 가볍게 넘고, 품이 작지 않은 무복은 안에 가득 찬 근육으로 크게 부풀어 있다.
반면, 주현운은 아직 성장이 덜 끝났는지 키는 170을 조금 넘고 근육질 몸이긴 하나 무복의 특성상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런 둘이 비무대 위에 섰으니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백은 더 크고 강해 보일 것이고.
주현운은 더 작고 약해 보이겠지.
아무리 무림의 승부가 덩치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작은 것이 더 약해 보이기 마련이다.
심지어 주현운은 아직 명성도 날리지 못했으니 당연히 더 약해 보일 수밖에.
물론.
“이번 경기는 진짜 재미있겠네.”
주현운의 능력을 잘 아는 사람에겐 아니지만.
히히 웃으며 비무대 위를 바라보는 설천위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남궁선이 물었다.
“주 동생은 발전 좀 했나?”
“어후, 누님.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질문인지 알죠?”
“음……. 의미 없긴 하네.”
의미 없긴 하지.
주현운이 누구인가.
홀로 수많은 무기를 실험하며 기술을 갈고닦아 무림학관에 입관한 녀석이다.
배운 심법은 동네에서 배운 삼재심법을 스스로 다듬은 것이고, 익힌 무기술은 전부 독학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천마의 수행을 받고 패융의 힘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설천위보다 강했다.
그런 주현운에게 길을 내어준 이가 있다.
현태중.
설천위가 영역을 전개해 수련할 때면, 현태중은 주현운에게 붙어 그를 지도했다.
그의 검을 전수하고.
그의 깨달음을 전수하고.
그의 경험을 전수했다.
주현운은 그렇게 신선의 발자취를 손에 넣었다.
“시작!”
두 사람 사이의 짧은 인사가 끝난 후, 심판의 신호와 함께 비무가 시작됐다.
시작과 동시에 철백이 땅을 박찬다.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억누른 힘의 폭발이 비무대 위의 청석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내공을 이용한 경신법 없이 극한까지 속도를 끌어올리면서 생긴 반작용.
이만큼이나 힘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기술에는 그저 감탄해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철백의 손이 주현운을 덮친다.
장법(掌法)?
아니다.
그냥.
쾅!!
손바닥으로 내려친 것뿐이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솟구친다.
“휘유~! 여전히 화끈하네?”
“화끈한 게 아니라 무식한 거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움직인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바람이 단숨에 먼지 구름을 찢어발기고, 구경꾼들 사이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거리를 벌린 채 주현운을 바라보는 철백은 뚜둑 소리를 내며 목을 돌렸다.
“세 번인가?”
“네 번이에요.”
“많이도 베였군.”
철백과 주현운의 짧은 대화.
그 대화에 구경꾼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대화의 내용이 좀 이상하다?
분명 공격한 건 철백인데, 왜 주현운이 더 많이 공격한 것 같은…….
“베이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얄궂네요.”
“아니, 조금만 더 하면 베일 것 같은데.”
주현운의 말에 자신의 목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철백.
그 목에 얇게 붉어진 실선이 생겼음을 눈이 좋은 사람들은 눈치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조금 전의 그 일격을 막거나 피하고 주현운의 검이 네 번 철백의 목을 베었음을.
그들과 달리 처음부터 상황을 인지하고 있던 남궁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설천위에게 물었다.
“쾌검?”
“아뇨? 그냥 빠른 건데요?”
그냥 빠르다.
그 말에 자신이 잘못 봤기를 바랐던 남궁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빠르다.
쾌(快)의 묘리를 담아 펼친 검이 아니라.
그냥 휘두른 검이 저 정도의 속도란 이야기였다.
즉.
주현운은 저 속도의 검에 변(變)이나 환(幻) 혹은 강(强)이나 중(重)의 묘리를 섞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이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진짜 괴물이네?”
“재능의 방향이 다르니까요.”
남궁선이 중검(重劍)의 천재라면, 주현운은 무(武)의 천재다.
남궁선이 중(重)의 영역에서만 닿는 곳을 주현운은 무(武) 전체에서 닿을 수 있다.
압도적인 재능.
지금은 내공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여 한 끗 부족하지만.
“……2년? 아니, 1년? 일단 확실한 건 졸업 전엔 가능하겠네.”
“그렇겠죠?”
자신의 뒤로 최소 이십 년은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참.
남궁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재미는 지금부터인데.”
“지금부터라고?”
지금 가볍게 보인 한 수만으로 그 재능의 일각을 보인 녀석이 상대인데.
지금부터라고?
철백이 아무리 몸이 튼튼하고 그 재능이 뛰어나다곤 하나 그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내공의 부재.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어 주는.
인간을 자연과 연결해 주는.
무인의 뿌리.
그것이 철백에겐 없다.
더 시간이 지나면 몰라도, 지금 단계에서 주현운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는 건…….
“저희끼리 하는 대련에서 두 사람의 승률은 어느 정도이게요?”
“승률? 주현운이 우세 아닌가?”
“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죠?”
주현운이 현태중의 검을 전수 받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강해졌으니까.
그런데 철백은 방어력에 올인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공격이야 뭐, 전수 받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수준은 아니니까.
물론 후에 더 성장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이 방어력이란 것이 참으로 얄궂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효율이 공격력에 비해 한없이 떨어진다.
이쪽의 공격이 약해 상대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다가 죽는 결과밖에 없으니.
그런데 말이다.
이 방어력이란 것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의 공격력을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
“최근 승률은 9할이에요. 물론 철백이.”
쾅!!
설천위의 웃음과 함께 비무대에서 폭음이 터진다.
무식하게 돌진한 철백의 공격이 또다시 비무대를 부순 것이다.
그런 철백을 막기 위해 주현운의 검이 불을 뿜었지만…….
카가가각!
사람의 피부와 닿은 검의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섬뜩한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아니, 검기를 두르지 않은 일반 검도 닿으면 베이는 것이 사람의 피부이거늘.
대체 저 흉흉한 공격을 어떻게 맨몸으로 받아 낸단 말인가?
심지어.
‘……급소도 서슴지 않고 노리는군.’
목이나 명치, 그 외의 관절처럼 근육이 없는 부위조차 주현운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베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거침없이 검을 휘두른다.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그 검에는 어느새 수많은 묘리가 담겼다.
무거워졌다가.
단단해졌다가.
부드러워졌다가.
화려해졌다가.
그야말로 수많은 변화를 품고 철백의 몸을 두들긴다.
허나 그럼에도.
“너무 상성이 안 좋네.”
“그렇죠?”
뚫리지 않는다.
수많은 공격에도 철백의 몸은 흔들림 없이 나아간다.
웃으며 대답하는 설천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남궁선은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주현운이 조금 더 커서 강(罡)의 깨달음을 얻었다면.
승부가 조금은 더 재미있었을 텐…….
‘……잠깐!’
분명, 설천위는 이번 경기가 진짜 재미있을 거라고 했지?
설천위의 성격상, 철백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걸 재미있어할 리가 없다.
고개를 돌린 남궁선은 흥미롭게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1할.
최근 비무에서 주현운은 어떤 방식으로든 철백의 방어를 뚫고 1할의 승리를 쟁취해 냈다.
그 1할의 비밀에.
이 비무의 행방이 달려 있다는 소리다.
“흐응?”
다시 비무대 위를 바라보는 남궁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히고.
카가가각!
철백의 몸을 끊임없이 베고 베던 주현운의 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