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256화-잠룡제 (5)
환(幻).
그것은 무(武)를 대표하는 성질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쾌(快), 강(强), 중(重), 유(柔) 등.
무공은 수많은 성격을 지닌다.
빠른 것에는 빠른 것의 장점이.
강한 것에는 강한 것의 장점이.
무거운 것에는 무거운 것의 장점이.
부드러운 것에는 부드러운 것의 장점이.
모든 무(武)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당연히 환(幻)에도 장점이 있다.
그런데, 환(幻)에는 앞에 예를 든 것들과는 명백히 다른 성질이 있다.
빠른 것은 상대보다 빨라야 의미가 있다.
그것은 결국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한 것도, 무거운 것도, 부드러운 것도 전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환(幻)만큼은 상대보다 화려하지 않아도, 변화가 다채롭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
오직 환(幻)만은 상대를 속일 수만 있다면, 상대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상대를 속이기 좋으므로 더욱 화려하고 교묘해지는 것이 환(幻)의 초식이지만.
‘……무겁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있다.
서하영의 창을 받아 내며, 황보척은 낮게 신음했다.
눈을 현혹시키는 창의 변화.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탄성으로 궤도를 틀어 대면서도 그 안에 담긴 위력은 무겁기 그지없다.
정말 상대를 현혹하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 속에 담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
어지러운 손발에 흐트러지는 균형은 그 파괴력으로 인해 한 번 더 흔들린다.
환(幻) 속에 강(强)을.
강(强) 속에 환(幻)을.
딱 필요한 만큼의 변화로 상대를 속이면서 그 안에는 강철과도 같은 강함이 내재돼 있다.
그야말로 무(武)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수준 높은 공방.
허나.
“흡!”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기합과 함께 전각을 밟은 황보척의 몸이 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서하영의 창이 그 어깨를 강타했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 낸다.
애초에 창날에 베일 것을 몸을 앞으로 내밀어 창대에 맞는 것으로 끝냈으니 버틸 수 있는 것이지만.
뭐가 됐든.
단련된 근육과 미리 대비한 내공 덕에 뼈가 상하게 하지 않은 채 견뎌 낼 수 있었다.
한 번, 방어 동작 없이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는 것.
이것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실로 크다.
“흐압!!”
비틀어 낸 허리와 하체가 강력한 힘을 토해 낸다.
단숨에 공간 전체를 짓뭉개듯 내지른 주먹이 서하영의 안면으로 향한다.
이대로라면, 서하영이 창을 거두는 사이에 황보척의 주먹이 그녀의 안면을 부숴 버릴 거다.
안력을 열심히 끌어올려 상황을 지켜보던 몇 명의 학생들이 기겁하는 그 순간.
비무치고는 너무나도 위력적인 그 주먹에도 심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이 비무가 단순한 비무가 아닌, 승급전이라는 것.
서로가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승급전이 병(丙)으로 올라가는 승급전이기에.
끼기기기긱.
“……와.”
이 정도의 공수 교환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황보척의 어깨를 때렸던 서하영의 창이 그 몸체를 비틀어 그의 주먹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냈다.
동시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창의 움직임이 황보척의 주먹을 휘감았다.
물론, 한 번 당했던 수법이니만큼 황보척도 빠르게 창의 전진을 막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짧지만, 긴 시간.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힘겨루기를 하던 두 사람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잠시 물러나서 자신의 팔을 바라보던 황보척은 다시 고개를 들어 서하영을 보고 물었다.
“단순한가?”
“아직은요.”
“그거 아쉬운 소식이군.”
“어쩔 수 없죠.”
수련만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기는 습관이니까.
자신의 수련에만 매진하다 보면, 안 좋은 습관이 생긴다.
자신이 갈고닦은 것을 모조리 꺼내고자 하는, 그런 습관.
자신의 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결코 나쁜 건 아니지만, 실전은 다른 법.
결코 모든 것을 온전히 끄집어낼 수 없다.
상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나.
그렇기에 실전에서 발휘하는 실력은 대개 수련할 때의 7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보척은 자기 수련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몸을 추스르며 홀로 틀어박혀 자신의 초식만을 연습했으니…….
“단순하긴 하군.”
그 궤도가 너무 뻔히 보인다.
황보척의 과감한 돌진에도 서하영이 당연하다는 듯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무(武)를 완벽하게 펼쳐 내려는 것이 너무 뻔히 눈에 보인다.
“많이 녹슬긴 했군.”
“아마 제가 아니라면 충분히 통했을 거예요.”
단련된 육체.
그것을 통한 과감한 돌진.
거기다 깊이 있는 무학을 품은 철권(鐵拳)까지.
아마 대부분의 학생은 그 선택에 당황해 자칫 실수를 저질렀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전 너무 익숙한 방식이라서요.”
아쉽게도 서하영은 이런 방식에 참으로 익숙하다.
연인 사이라곤 해도, 서로가 무인(武人).
대련에는 익숙하다.
서로 때리고 맞는 것에 따른 서운함?
그게 뭐가 중요한가.
조금이라도 경험을 더 쌓아야 이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데.
무림에 나갔을 때, 그것을 절실히 느꼈는데.
살존과 마주했을 때,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는데.
서로가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둘 다 강해지는 것뿐이다.
“철백인가 하는 녀석인가.”
“네. 아쉽네요. 철 가가도 소협과의 대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흥.”
아쉽다.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읽은 황보척은 코웃음과 함께 자세를 낮췄다.
이 승급전은 승자가 올라가는 방식이 아닌, 가진 실력을 전부 쏟아내는 단판의 형식.
비무가 끝나면, 사적으로라도 대련 따윈 못할 상태가 된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아쉽지 않게 만들어 주지.”
“아뇨. 아쉬울 거예요.”
황보척을 내려다보며, 창의 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등 뒤로 창을 당긴 서하영의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
“제가 왜 창절(槍絶)인지 알려 드리죠.”
* * *
“이야, 요즘 애들은 참 실력이 좋네.”
“뭐가요?”
“나 때는 안 이랬거든.”
나 때도 이랬으면, 학관 생활이 열 배는 더 즐거웠을 텐데.
자신의 재학 시절, 손에 꼽았던 호적수들을 떠올리며 남궁선은 아쉬움을 삼켰다.
그 녀석들도 재미있긴 했지만, 이 녀석들이랑 다녔으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웃으며 비무대 위의 서하영을 바라본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미있었을 것 같아.”
창의 날 부분은 아래로, 창의 꼬리는 머리 위로.
등 뒤로 창을 당긴 서하영이 한 발을 들었다.
대개 무공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한 발을 든 자세는 사실 그리 자주 쓰이지 않는다.
이유야 몇 가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한 발로 서 있으면 당연히 균형을 잡는 데 어려움이 생기고 그로인해 생기는 빈틈은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서 실로 치명적이다.
멋지긴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 멋을 부리기에 이 무림은 너무 각박하고 살벌하므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일반인은 그런 자세를 무공에서 흔히 쓰이는 자세로 알고 있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의미가 있으니까.
한 발을 높게 든 자세는 준비 자세다.
대지에 내린 다리는 뿌리가 되고.
허공으로 들어 올린 다리는 기둥이 된다.
평소에 내딛는 걸음보다 훨씬 더 크게 내디딜 수 있는 일보(一步)는 확실하게 큰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활을 쏠 때 작은 흔들림이 저 멀리서 큰 오차로 만들어 내듯.
다리를 높게 드는 행동은 원래의 공격과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쿵!
들어 올렸던 기둥이 땅에 박힌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압도적인 일보(一步).
허나, 상대도 허술한 무인이 아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황보척의 주먹이 서하영의 턱을 노리고 솟구친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이대로라면 창을 휘두르기도 전에 서하영의 턱에 황보척의 주먹이 닿을 것 같다.
서하영의 너무나도 큰 동작이 치명적인 독이 된 듯한 상황.
“응. 여전히 꼼꼼하네.”
그러나 그 모습에 남궁선은 오히려 웃었다.
서하영은 귀엽고, 발랄하고,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지만 창을 다루는 감각만큼은 날카로웠다.
아니, 그런 날카로운 사고를 가졌다.
쌓아 올리는 전투.
어떤 공격도 그냥 던지는 공격은 없다.
어떤 대화도 그냥 던지는 대화는 없다.
황보척을 향해 던진, 단순하다는 도발.
그것엔 분명 근거가 있었고, 황보척도 납득했다.
자신의 것을 너무 많이 토해 내려다가 보니 되레 상대의 수 대응에 미숙해지는 것은 본말전도이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황보척의 주먹엔 평소의 그의 것과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여지(餘地).
혹시 모를 서하영의 공격에 반응하기 위해 남겨 놓은 일말의 여지.
그 틈을 서하영이 정확히 꿰뚫었다.
후웅!!
고개를 틀어 피한 황보척의 주먹이 서하영의 오른쪽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권압에 의해 피부의 실핏줄이 터진 것이다.
허나.
카각!
서하영의 창 또한 닿았다.
황보척의 왼쪽 옆구리에.
땅으로 내렸던 날이 그의 옆구리를 그었다.
물론, 여지를 남겨 둔 만큼 황보척 또한 남은 손으로 방어했으나…….
“무슨?!”
밀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 전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충격을 해소해 내지 못해서.
200근에 가까운 황보척의 육중한 몸이 떠올랐다.
엄청난 무게를 견뎌 내는 창이 크게 휘어지고.
그 탄성의 끝에 도달한 순간.
“흡!”
비틀어 내며 토해진 서하영의 기합과 함께 황보척의 몸이 완전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동시에 엄청난 바람이 황보척의 몸을 찢어발긴다.
일격에 담은, 창의 예기.
풍영류(風泳流)의 바람이 황보척을 휩쓸었다.
엄청난 숫자의 자상과 함께 치솟은 황보척의 몸.
허공에서 허리를 비튼 황보척이 자세를 고치는 순간.
‘하!’
자신의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서하영의 모습에 황보척은 그만 헛웃음을 삼켰다.
번뜩이는 안광과 함께 치솟은 서하영의 창이 어느새 자신의 어깨를 꿰뚫고 있었으니까.
붉게 물든 뺨으로, 담담하게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승자! 창절(槍絶) 서하영!!”
* * *
“허어, 꽤나 실력이 뛰어난 처자로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권왕의 여식이라고 했나?”
“예. 아비를 닮아 창 이외의 다른 무기엔 재능이 없어서 학관에 입관하고 한참 동안을 계(癸)에 머물렀었다고 합니다.”
“허허허, 그것 참 대단하군.”
대단하다.
그 대답에 맹주에게 설명하던 부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단할 일인가?
오히려 멍청한 일 아닌가?
괜히 권법을 고집하다가 아까운 시간만 날린 격이니.
“자네는 무인을 보는 눈을 좀 더 키워야겠군.”
부관의 의아함이 담긴 눈을 보고 작게 혀를 찬 맹주는 승자가 되어 비무대에 선 서하영을 바라보며 웃었다.
“최소 십 년 이상의 세월로 단련한 육체일세. 아무런 재능도 없이 그 시간을 오로지 단련하며 노력한다는 건 재능 있는 천재가 노력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지.”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기에 보상 없인 궂은일을 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다.
권왕의 딸이라면 힘들게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을 거다.
아니, 오히려 엄청나게 편했겠지.
권왕의 성격을 생각하면 익히기 힘든 무공을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런데도 아무런 보상도 없는 고된 수련을 십수 년이나 견뎌 냈다.
그렇기에 저리 꽃이 피어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군.”
노력으로 일궈 낸 열매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
좋은 선전 수단이 되겠어.
“영입 대상에 넣어 놓게.”
“알겠습니다.”
짧은 지시와 함께 몸을 돌린 맹주는 천천히 걸었다.
아니, 몸동작만 천천히 걷는 것처럼 보일 뿐 그 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빨라서 부관이 그를 놓쳤을 정도니까.
단숨에 부관을 따돌리고, 무림학관 근처의 담 위에 올라선 맹주는 고개를 들어 그 앞의 나무를 바라보며 수염을 쓸었다.
“그래서, 무슨 용무인가? 살존(殺尊).”
맹주의 시선 끝.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살존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의뢰(依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