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56화 (256/624)

제256화

255화-잠룡제 (4)

육도(六道)에는 시작점이 학관이 아닌 캐릭터들이 몇몇 존재한다.

일전에 봤던, 그리고 지금도 조용히 학관에서 꿀이나 빨고 있는 창린이 그렇고.

지금 떠나간 무해가 그렇다.

불살현불(不殺顯佛) 무해.

그러고 보면 게임 초반엔 서승(恕僧)이란 별호로 불렸던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대화는 보통 빠르게 넘기니 기억에 남을 리가.

애초에 무해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한 번 클리어해 본 뒤론 손도 안 댄 캐릭터다.

아무리 그래도 설천위까지 키우면서 무해로 플레이한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고난도 플레이 영상을 찍고 싶어서 설천위를 키운 거지, 불가능에 도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무해는 무림맹에 들어간 뒤에야 설천위를 동료로 영입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몸은 굳을 대로 굳고, 자존심은 바닥을 기며 무림맹에서 빨래나 하고 있는 설천위를 어디에 쓸 수 있단 말인가?

여하튼 여러 가지 이유로 무해는 한 번밖에 플레이해 보지 못했고, 할 때도 남캐라서 얼굴을 가려 놓는 바람에 바로 못 알아봤는데…….

‘진짜 무섭게 생기긴 했네.’

무해는 유일하게 캐릭터의 커마가 전투를 반복하면서 변하는 캐릭터다.

정석적으로 플레이하면, 전투가 끝날 때마다 얼굴에 흉터가 생긴다.

그게 쌓이고 쌓이면 살벌하게 무서운 얼굴이 된다.

아까 본 무해처럼.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만큼 재능 하나는 확실한 무해의 얼굴에 저리 많은 흉터가 있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상관없나.”

“뭐가?”

“아니, 별거 아니야.”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긴 하네.

모습을 보아하니 딱히 손대지 않아도 딴 길로 새지 않고 잘 따라올 것 같고.

오히려 개입을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기본적으로 아니, 애초에 뿌리 자체가 선한 사람이니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 나아갈 거다.

무림맹에 가서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언젠가 만나겠지만,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그나저나 승급전은 언제 시작한대?”

“조금 있으면 시작할 거다.”

“그럼 빨리 가 봐야겠네.”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 있었지만, 볼 건 봐야지.

* * *

“꽤나 본격적이네?”

“많이 모였죠?”

듣자 하니 잠룡제의 개최를 알린 것이 고작 몇 달 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모였다.

모인 숫자가 범상치 않다고 해야 하나.

얼마나 소식이 멀리 퍼졌는지 사파나 흑도의 인물들도 꽤나 많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무림학관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을 곳인가 싶지만…….

“그럴 만하지.”

소문이 소문이다 보니 그럴 만하다.

“그렇게 소문이 났는데 궁금하지 않으면 이상하지.”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설천위를 바라본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공자는 궁금할 수밖에.”

“……그 별호, 진짜 별론데.”

“알아. 예린이한테 다 들었어.”

“그새 친해졌어요?”

“작은 친목회가 있거든. 우리가 연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바로 친해졌지.”

그러고 보니 그런 모임이 있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뭐, 듣자 하니 무림맹의 여자들이 모이는 소모임이라고 하니 자신이 들어갈 일도 없을 테고.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게임에서도 안 나왔던 걸 보며 그리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는 모임인지도 모르겠고.

그나저나.

“상대는…… 황보척인가?”

부상 때문에 결국 친선전은 포기했었는데.

승급전엔 어떻게 맞췄나 보네?

그나저나 용케 졸업을 안 했네?

성실히 했으면 졸업 학점을 충분히 쌓았을 텐데.

정(丁)으로 졸업하기 쪽팔려서 남아 있었나?

“아, 부상 때문에 수업을 못 들어서 학점이 모자란 건가?”

“그럴 거다. 꽤나 중상이라 오래 쉬었을 테니.”

응, 그게 더 가능성 있어 보이네.

아무리 승급에 욕심이 있어도 졸업을 미루면서 도전할 건 아니니까.

철백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가만히 앉아 황보척을 바라봤다.

무겁게 가라앉은 기세.

움켜쥔 두 손은 굳게 쥐어져 있다.

긴장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의지를 굳히는 것인가.

가만히 황보척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나.

긴장으로 무뎌지는 것도.

의지를 굳혀 버티는 것도.

결국 자신의 역량이고 선택인 것을.

물론,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전자 쪽이 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두 학생의 소개가 있겠습니다! 먼저 좌측! 황보세가의 권걸(拳傑) 황보척!!”

“오오오오!!”

“황보세가!!”

축제라는 성격 때문인지, 단순한 심판이 아닌 바람잡이의 역할도 맡은 교관의 소개에 관중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뭐, 누굴 소개해도 시끄러워졌겠지만 그 유명한 황보세가의 무인이니 반응이 꽤나 격렬했다.

그나저나, 저 권걸(拳傑)이라는 별호는 누가 지어 준 거야?

쟤가 별호가 있을 만큼 명성이 있는 것 같진 않던데, 그냥 붙여 준 건가?

“그 상대는! 창술로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창절(槍絶)! 서하영!!”

“오오오! 그 유명한!”

“흑룡학관의 고수를 때려눕혔다던 여걸!”

오, 이쪽도 반응이 장난 아닌데?

하긴 서하영도 한 명성 하지.

솔직히 화려한 무기로 치면 창이 으뜸이니까.

기본적으로 크고 탄성을 이용한 변화가 많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보기엔 신기해할 만도 하다.

거기에다 서하영과 싸웠던 성무경도 한 실력 하다 보니 전투가 워낙 거칠고 화려해 충분히 인상에 남을 만했지.

술자리에서 자랑하기 딱 좋은 이야깃거리라고 해야 하나? 입소문으로 퍼지기 딱 좋은 승부였지.

“그럼! 승급전 첫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의 반응에 호응하듯, 심판은 금세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쓸데없는 사설이 없는 빠른 진행에 관중들이 환호했고.

쿵!

창으로 비무대의 바닥을 묵직하게 내려찍는 서하영의 창이 단숨에 정적을 가져왔다.

압도(壓倒).

그저 기세 하나만으로 이 시끄러운 경기장에 정적을 가져온 서하영의 모습에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목울대가 울렁이는 그 작은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고 생각한 순간.

쾅!!

강렬한 충격에 절로 눈을 감은 이들은 이윽고 다시 눈을 뜨자 보인 광경에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무대 중앙.

창 손잡이의 끝부분, 준(鐏)이라 부르는 그 부위가 주먹과 부딪혀 허공에 멈춰 있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창과 맨주먹이 부딪히고도 멀쩡하다는 것이 놀랍거늘.

“……닿지 않았군.”

그 두 무기가 허공에서 서로와 부딪혔는데도 닿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이만한 충격음이 터졌는데.

주먹과 창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틈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기이이잉.

기와 기가 맞물리며 나는 소음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서로의 무기에 기(氣)를 돌리며 일어나는 현상.

자신의 주먹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낸 서하영을 보며, 황보척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황보 소협도요. 묵직하네요.”

“힘으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창을 굳게 움켜쥔 서하영의 손을 보며 황보척은 이를 악물었다.

허리에 힘을 더하고, 등 근육과 가슴 근육을 움직인다.

내밀었던 주먹에 힘이 더해지고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창을 밀어낸다.

그 견고한 힘에 서하영은 황보척에 대한 평가를 반 단계 더 올렸다.

친선전에 나가는 걸 포기할 정도의 부상이니 제 실력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은데요.’

숨어서 영약이라도 먹었나.

아니, 진짜 그런가?

황보세가의 적자 중 하나이니 회복을 위해 영약 몇 개쯤은 먹었을 수도 있겠네.

거기에다.

‘꽤나 억울했던 모양이네요.’

근육의 형태가 전에 봤을 때와 다르다.

친선전에 나갈 인원을 선발할 때보다 더 크고, 단단해진 근육들.

부상을 회복한 뒤에 고된 수련을 거쳤다는 증거였다.

단순히 영약을 먹었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육체가 좋아질 리는 없으니까.

절치부심하며 스스로를 갈고닦아 그때의 한을 풀려는 것이겠지.

“단순하네요.”

창을 돌려 단숨에 탄성을 만들어 낸 서하영은 황보척과 거리를 벌렸다.

물론, 창술사에게 순순히 거리를 내줄 권사는 없기에 황보척은 단숨에 따라붙었지만.

쿵!!

비무대 바닥을 꿰뚫는 창끝에 황보척의 전진이 주춤한다.

그저 창을 내려찍는 것만으로 황보척의 움직임을 막고, 그대로 창을 발로 차올렸다.

순식간에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창의 움직임에 황보척이 다급하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흠잡을 곳도 딱히 없는 회피.

거기에다 단련된 허리와 하체를 이용해 자세를 고치고 재차 공격을 시도하는 황보척의 움직임은 실로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싸움의 흐름 정도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빠르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공수의 전환.

거리를 좁히고 파고드는 황보척의 주먹이 서하영의 어깨에 닿으려는 그 순간.

“흡?!”

다급한 호흡과 함께 황보척은 주먹을 거뒀다.

이유는 하나.

‘이게 무슨?!’

마치 뱀처럼 팔을 타고 올라온 창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상황.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창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그런 의아함도 잠시.

의문을 풀기 전에 지금의 상황을 먼저 해결하기로 정한 황보척은 다급하게 왼손을 움직여 자신의 목과 어깨를 지켰다.

팔을 타고 올라오는 창을 주먹으로 쳐 낸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쳐 나는 쩡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간 창.

그 변화와 속도가 기이하리만큼 뛰어난 탓인지 위력은 생각보다 약했다.

손에서 느껴진 가벼운 손맛에 황보척은 다시 앞으로 손을 뻗었다.

적의 공격을 한 번 쳐 냈으니,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

“컥!”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숙인 황보척은 헛웃음을 삼켰다.

창이 접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 창은 서하영이 무룡투쟁의 상품으로 받았던 그 접히는 창.

3단계로 나뉘는 길이를 조절해 운용하고 있었던 건가……!

그 변화를 자신이 쉽사리 읽어 낼 수 없게 최대한 사각으로 숨겨 가면서!

옆구리를 강타했던 창끝이 휘리릭 공기를 가르며 다시 일자로 펴지는 것을 확인한 황보척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이다.

눈앞의 서하영은 삼절곤을 주력으로 익힌 무인이 아니라 창술을 주력으로 익힌 무인이다.

변초에 당하긴 했지만, 고작해야 눈에 모래를 뿌리는 수준의 조잡한 변초.

충분히 견뎌 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니……!

“단순해요.”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어깨를 노리고 파고든 창을 겨우 피해 낸 황보척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 전부터 자꾸 단순하다고 하는데, 도발하는 건가?

이해하기 힘든 서하영의 언행에 황보척의 표정이 변하는 순간.

“자신만 강해져선 이기지 못해요.”

냉철한 표정의 서하영이 창을 움직인다.

자신만 강해져선 이길 수 없다.

싸움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죠.”

황보척의 어깨를 노리던 창이 팔을, 다리를, 옆구리를, 가슴을 노린다.

눈이 절로 커지는 환(幻)의 향연.

황보척의 손발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 * *

“훌륭하군.”

학관장실이 있는 전각의 지붕 위.

술상과 함께 자리를 잡은 팽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비무를 지켜봤다.

개회식 같은 자잘한 절차는 최대한 짧게 하고 자리를 비운 보람이 있다.

자신과 같은 윗사람이 없으니 축제가 얼마나 활기차고 좋은가.

웃으며 술잔에 술을 따른 팽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 있는 인물을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엔 뭘 가져 왔냐?”

손발이 잘린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인형의 고개가 돌아간다.

“딱히?”

“구경이나 하러 온 건가? 그것도 좋지.”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선물로 받은 인형을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그럴 생각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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