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55화 (255/624)

제255화

254화-잠룡제 (3)

발전.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다만, 그 특권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는 재능과 나이에 따라 변한다.

재능이 뛰어나면, 발전의 폭은 다양하고 깊어지며.

나이가 어리다면, 발전의 속도는 빠르고 그 주기는 짧아진다.

그렇기에.

[빠르구나.]

천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능이 적어 폭과 깊이가 부족했던 발전이 끊임없는 확장과 침식으로 깊디깊은 벼랑이 되어 가고 있다.

자고로 무(武)의 길이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

힘들어서 포기하는 하산(下山) 따윈 불가능하다.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에서 떨어지다가 그 어둠에 겁먹고 죽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나무나 돌에 부딪혀 죽을 수도 있으며.

벽을 붙잡으려다 손발이 전부 으스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떨어지는 이들이 무인(武人)이다.

손톱이 날아가고.

손발이 찢어지고.

어깨가 탈구되고.

잇몸이 뭉개져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무인이다.

끝없는 벼랑의 공포를 이겨 내고 살아남는 자가 무인이다.

자신의 재능이라는 오만에 빠져, 하늘을 보며 대책 없이 떨어지는 녀석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것.

그 끝에서 끝없는 어둠에 포기하든.

끝내 닿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든.

그것이 무도(武道)다.

지옥과 다를 바 없는 그 길에서 이 어린 녀석은 자신의 방식을 찾아냈다.

고작 첫걸음일 뿐이지만.

“흡!”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벼랑에서 떨어지던 몸은 안정을 찾아간다.

스쳐 지나가는 나무를 잡을지.

튀어나온 돌부리에 멈춰 휴식을 취할지.

아니면 이대로 더욱 가속해 나갈지.

그 선택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지만…….

눈앞의 녀석을 보면 그 선택에 뭔가 잘못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깔끔하구나.]

만족스러움이 담긴 소백진의 칭찬.

그가 손녀에게도 쉽게 하지 않는, 깔끔하다는 칭찬.

죽음을 전제로 적의 목을 베는 참수(斬首)의 근본은 자비(慈悲)에 있으니.

깔끔한 것은 그 시작이다.

“후우.”

도를 거두며, 호흡을 갈무리한 설천위는 손아귀를 쥐었다 펴며 감각을 기억했다.

“……완성한 지 열흘이나 됐는데, 왜 아직도 성공률이 5할 정도죠?”

[네 녀석의 재능으론 도달한 것만 해도 기적이니라. 그저 갈고닦아서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거라.]

그래, 기적이지.

조금 전의 도(刀) 이외에도 처음 시작이 됐던 검(劍)과 권(拳)까지.

설천위는 스승들이 바라던 시작점에 섰다.

그 경지가 화경인 고수들이 만족할 만한 시작점.

본인들의 무(武)를 재현할 수 있는 그 시작점에 설천위가 선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다듬고, 완전히 자신의 손에 쥐는 일만 남았다.

[보법은 대체 언제 완성되는 게냐?]

“……그건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요?”

[이래서 말도 못 타는 녀석한테 내 신법을 전수하는 게 아니었는데……!]

물론, 신법의 성취는 그 수준에 못 미쳐서 암영의적의 한탄은 날로 커졌지만.

암영의적의 한탄에 어색한 미소로 응답한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몸을 털었다.

집중에 집중을 더하느라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끝났나?”

“어.”

대충 땀을 내공으로 털어 내자 쿵 소리와 함께 일어선 철백이 이리저리 몸을 비튼다.

설천위가 반쯤 무아지경에 들어가 집중하는 동안, 짊어지고 있던 철봉이 묵직한 소음과 함께 떨어진다.

양 끝에 다는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웬만한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 쥐기도 힘든 두께로 만든 철봉.

철백이 수련하는 곳엔 이미 깊게 파인 바벨을 놓는 자리가 정해져 있을 정도다.

돌로는 감당이 안 돼 그냥 흙을 깔아 놓아 무게의 흔적대로 깊게 파여 어쩔 수 없이 정해진 것이지만.

“천위.”

“응?”

“축제 소식은 들었나?”

“어.”

그냥 진행할지는 몰랐지만.

게임에서는 뭐, 그냥 학원물의 흔한 클리셰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꽤 무리하네, 이 양반.’

이런 상황에서 축제를 연다는 것의 부담을 모를 리가 없는데.

아니, 모르는 수준이 아니라 상당히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축제가 팽후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 단순한 이유겠지.’

학생들을 위해서.

대놓고 나서진 않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한다.

노력과 그만한 성취를 이뤄 내는 학생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약속한다.

그것이 팽후가 이끄는 무림학관의 절대 원칙이다.

이번 축제도 그 대우의 일환일 터.

갈고닦은 것이 있다면 마음껏 뽐내라는 의도일 것이다.

뭐, 사실 무룡투쟁과 다를 게 없다.

다만 그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무룡투쟁은 상위권의 학생들은 잘 출전하지 않으니까.

즉.

“나갈 거지?”

“물론이다.”

즉답하는 철백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듣자 하니 축제에서 병(丙)으로의 승급 시험도 같이 치른다고 하니 아마 그게 주된 목적이겠지.

나는 뭐, 갑으로 가는 승급 시험이나 준비해야지.

학점도 꽤나 채우고 있어서 올해로 졸업이니까.

그나저나 궁금하네.

학관장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축제를 여는 걸까?

지금 무림맹과 사천맹, 황실이 음지의 무림 세력을 두들겨 패고 있으니 여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네.

게임에서 열리던 축제랑은 상황이 너무 다르니까.

다만, 이 이벤트는 게임에서도 나왔던 이벤트이니…….

‘잘하면 보상을 꽤 괜찮게 챙길 수 있을지도.’

* * *

“이렇게 오는 건 오랜만이네.”

“자주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애들 가르치려고 잠깐씩 들렀던 거고.”

“지금도 잠깐 들른 건 매한가지입니다만…….”

백윤철이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지만, 남궁선은 그 말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아니,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천위야!”

“남궁 누님?”

“오랜만이네, 짜식!”

목표로 했던 녀석 중 하나를 발견해 후다닥 달려든 남궁선은 단숨에 설천위의 등을 내리쳤다.

“수련은 열심히 했냐!”

짝!

“억?!”

웬만한 매질보다 찰진 소리와 함께 앞으로 튕겨 나가는 설천위.

그 모습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쭈?”

“뭐가 어쭈예요?! 날아간 건 전데!”

“흐응, 우리 천위 수련 열심히 했네?”

내가 본능적으로 힘 조절에 실패할 정도로?

조금, 아니 상당히 과하게 힘이 들어갔던 것을 느낀 남궁선은 히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쫙!

아까보다 더 강렬한 일격이 작렬한다.

물론.

“오랜만입니다. 누님.”

“너는 여전히 단단하구나, 철백아!”

남궁선의 손바닥을 어깨에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한 철백의 인사에 남궁선은 활짝 웃었다.

“역시 졸업하면 우리한테 올래?”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에잉, 거절이 너무 칼 같네.”

철백의 칼 같은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남궁선.

그 모습에 헛웃음을 삼킨 백윤철은 멀쩡하게 서 있는 철백을 바라봤다.

‘……어떻게?’

평상시에도 남궁선은 부하들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저런 식으로 장난을 친다.

닿는 순간, 절묘하게 힘 조절을 해서 대부분 쓰러지지 않고 버티지만…….

‘미동조차 안 하는 건 처음 보는군.’

그야말로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다.

거악(巨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위압감.

불과 일 년 전에는 그저 튼튼할 뿐인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괴물 같은 성장 속도다.

괜히 무인이 수년을 같은 수준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니까.

저런 식으로 성장하면 무림맹에 이류 무인이 어디 있겠는가.

전부 일류 무인이지.

과연 남궁선이 오는 내내 그토록 기대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만한 인재들이 있으면 기대가 될 법도 하지.

설천위만 해도, 남궁선이 정확한 수준 파악에 실패해 과하게 힘을 쓸 정도로 힘을 잘 숨기고 있단 소리니까.

힘을 낮게 파악했다가 닿는 순간 부족함을 느끼고 힘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과하게 힘을 쓴 거겠지.

“그나저나, 서 동생은?”

“서 매라면 대기 중입니다.”

“대기?”

“첫 경기 출전이라서요.”

첫 경기?

아!

“승급전?”

“예.”

“학관장님도 참 언제나 새로워. 우리 때는 승급 시험을 꽤 조심스럽게 진행했는데.”

나름 후발 주자들의 형평성을 위해 시험 내용도 비밀로 하고 그랬는데 말이야.

이젠 아예 이렇게 대놓고 하네.

하긴 끊임없는 변화와 과감한 행동력이 학관장님의 장점이긴 하지.

아니면 이 따분한 학관 생활을 어떻게 견디겠어?

본인은 좋아서 하는 거라고 하지만.

“꽤나 많이들 왔네?”

자연스럽게 설천위, 철백과 합류해 걷기 시작한 남궁선은 곳곳에 보이는 이들의 면면에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주변 민간인들에게도 공개한다고 했더니 말뜻을 잘못 알아들은 녀석들이 왜 이렇게 많아.

사파 혹은 흑도라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인상착의가 알려진 녀석들이 꽤나 많이 왔다.

나름대로 변장을 했는지 조금 헷갈리는 이들도 있지만.

여하튼.

“목숨 걸고 움직이는 양반들이네?”

그것이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행위라는 점엔 변화가 없었다.

무림맹에서도 구경이라는 명목으로 몇이나 되는 단주를 이곳으로 보냈다.

명목상으론 후에 들어올 학생들의 성취를 파악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조사라지만.

뭐, 사실 그런 의도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무려 병(丙)으로의 승급을 노리는 학생들이다.

학관을 졸업하고 나서 무림맹에 들어왔을 때 조금만 다듬으면 즉시 실전에 쓸 수 있는 수준.

어쩌면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다듬어야 할 수도 있지만, 뭐 그래도 떡잎이 좋다는 게 어딘가.

다듬는 맛이라도 좋아야 할 맛이 나지.

그나저나.

“……일단 두고 볼까.”

“쟤들이요?”

“응. 알고 있네?”

“실시간으로 알려 주시는 분이 계셔서요.”

[저기 저놈! 저놈은 딱 봐도 생긴 것이 사특한 것이……. 아, 중이구나.]

……신뢰도가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아니, 머리 밀고 눈썹을 밀면 사람이 사특…….

“어우.”

“응? 저 땡중이 무슨 일이래?”

“……아는 사람이에요?”

중 맞아?

생긴 게 사람을 웃으면서 때려죽일 거마(巨魔) 같은데?

무슨 흉터가 저리 많아?

눈썹을 민 게 아니라 흉터가 너무 많아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 같은데?

“무림맹…… 소속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소림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나한이야.”

“별호에 뭐 혈(血)이라든가 살(殺)이라든가 하는 말이 안 들어가요?”

“아니. 성격이 엄청 부드러운 것으로 유명한데? 별호도 서승(恕僧)일걸?”

……그런 외모가 아닌데?

용서하는 중?

엄청 부드러운 성품이라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남궁선을 발견한 서승이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미타불, 남궁 시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스님.”

“일전에 행사 때 얼굴만 보고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이리 만나니 참으로 기쁩니다.”

부드러운 미소.

얼굴이 저리 험상궂고 수많은 흉터로 도배되어 있는데도 그 미소가 참으로 부드럽다.

무섭지 않고.

위협적이지도 않고.

그저 부드럽다.

“아!”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은 설천위는 합장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설천위라고 합니다.”

포권이 아닌 합장.

그 배려에 빙긋 웃은 서승은 마찬가지로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 설천위의 인사를 받았다.

“소림의 무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설 시주.”

“철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철 시주.”

철백까지 통성명이 끝나고,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무해는 이내 다른 사람을 발견하고 떠났다.

“어때? 좋은 사람이지?”

“네, 좋은 사람이네요.”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문제지.

[흉터가 많다는 것은 약함의 상징이나 저자는 그것이 강함의 상징이 되는 무(武)를 익히고 있구나.]

천마의 감탄.

그 감탄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살현불(不殺顯佛) 무해.

극악 그 자체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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