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54화 (254/624)

제254화

253화-잠룡제 (2)

‘어디서 샌 거지?’

배신자는 있을 리 없거늘.

단상 위에 선 사내는 자신을 감싼 검은 야행복을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 어언 50년.

감정을 죽이는 훈련을 거쳐 수많은 살행 속에서도 살아남아 끝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냈다.

야망이란 감정을 품고, 이 자리까지 올랐다.

살수는 어떤 감정도 있어선 안 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는 욕망을 품고 있어야 하기에.

순조롭게 머리가 되어 새로운 살수들을 기르고 조직을 키웠다.

식사는 풍족해지고, 잠자리는 편안해졌다.

이 은신처엔 혈향이 끊임없이 감돌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인간이란 것은 제 배만 채우면 되는 생물이거늘.

이젠 근육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이 배를 위해 어린놈들이 죽든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기에 배신자는 있을 수 없다.

그만큼 철저하게 교육했으니까.

거기에 독까지 사용했으니 배신자가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곳을 어떻게 찾아온 것이냐?”

쓰러진 부하들 사이에 서 있는 이를 보며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미행을 당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 어린놈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은신과 미행은 별개의 영역이다.

무(武)의 수준이 높다고 은신과 미행에도 뛰어나다면 천하제일은 항상 살수들에게서 나왔겠지.

그 괴물 같은 살존(殺尊)이 이상한 것뿐이다.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몸도 재능도 한정되어 있기에 두 가지 모두 뛰어나게 익히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저 어린 녀석들이 자신의 부하들을 미행해서 이곳에 도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이곳에 도달한 것인가.

답은 하나밖에 없다.

위치를 애초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위치를 누군가가 알려 준 것이다.

“답을 알면서도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렇기에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한 서하영은 담담한 어조로 되물으며 창을 고쳐 쥐었다.

워낙 깔끔하게 베다 보니 창대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아 미끄러질 일도 없지만, 습관이다.

사람을 베면, 자신도 모르게 창을 고쳐 쥐는 것은.

쿵.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다 보면, 원한이 쌓일 수밖에 없죠.”

“흥, 이 업계에서 원수에게 꼬리를 잡히는 일 따윈 없다.”

그런 허접한 녀석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코웃음을 치며 서하영을 비웃던 사내는 이내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수염을 쓸었다.

“……결국, 경쟁자에게 꼬리를 잡혔으니 남을 비웃을 처지가 아니군.”

“그러네요.”

황실의 암부(暗部)든 다른 살수 집단이든 이렇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동업자라고 봐야겠지.

사내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휘릭 창을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손에서 회전하는 창이 강한 바람을 만들어 낸다.

창의 회전으로 생겨난 바람이 순식간에 주위를 감싼다.

그 바람을 따라 혈향이 몰려들자, 비릿한 냄새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지만 서하영은 감내했다.

살인(殺人)이란 그런 것이니까.

무인(武人)이란 길을 택한 이상, 피의 무게에서 도망칠 생각 따윈 없으니까.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벨 것이다.

얼마든지 피를 뒤집어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요?”

“없다.”

“깔끔하네요.”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의 창이 멈추는 순간.

쾅!!

강렬한 폭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사내가 펼친 최후의 발악이 서하영의 창과 맞부딪히면서 생긴 소음.

허나, 그 이상의 충격은 없었다.

“허망하군.”

“수련을 게을리 한 탓이죠.”

불룩 나온 사내의 배를 바라보며 서하영은 담담하게 창을 비틀었다.

단 한 번의 충돌.

그것으로 사내의 검을 쳐 내고 그 어깨를 꿰뚫은 창이 뼈를 긁어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빠져나온다.

절로 비명이 나올 정도의 고통일 텐데도 이를 악물고 버틴 사내는 부러진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웃었다.

“나쁘지 않은 최후군.”

“최후에 좋고 나쁘고가 어디에 있나요?”

사내의 씁쓸한 혼잣말에 대답하며, 서하영은 창을 휘둘렀다.

사내의 목에 그려지는 혈선.

확인과 함께 등을 돌린 서하영의 등 뒤로 무언가가 땅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리는요?”

“끝났습니다.”

창을 접어 정리하자, 곳곳이 피에 젖은 채 기다리고 있던 여웅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상처는요?”

“전원 경상입니다.”

“즉시 약을 바르고 조치를 취하세요.”

“예.”

보고가 끝나자마자 물러나는 여웅을 잠시 바라본 서하영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번 임무에서 벤 사람의 수가 스물이 넘는다.

그 실력은 자신에게 한참 못 미치는 이들뿐.

무(武)의 성장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상대들뿐이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학관을 다니는 동안에도, 학관을 졸업해서도.

이 손은 창을 쥐고 사람을 벨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미래가 딱히 무섭지는 않다.

무(武)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자신도 죽으면 슬프긴 하겠지만, 그것으로 상대를 원망하진 않을 테니까.

다만, 무서운 것은 하나다.

“……익숙해지는 건 싫다.”

담담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금의 이 기분이 너무나도 두렵다.

나는 이미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구나.

이러다가 무인(武人)이 아닌 사람을 베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미래의 자신은 지금 가슴에 품은 긍지조차 버린 괴물이 되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차오르나, 서하영은 애써 목구멍으로 삼켰다.

없다.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도(正道)로 가자.”

나는 정도(正道)를 걷는 정파(正派)의 무인이니까.

* * *

“빠르군.”

총군사(總軍師) 제갈진천은 짧은 감탄과 함께 보고서를 접었다.

빠르다.

이쪽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빠르다.

거침없다고 해야 하나.

젊은 학생들의 패기 때문인지 일 처리가 그야말로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정보를 얻는 순간 돌진.

분쇄.

정리와 보고.

단순하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다 부상자도 대부분이 경상이고 가끔 중상자가 하나씩 나오는 수준.

실력이 충분하단 소리다.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이젠 적들도 웬만큼 대비를 하고 있을 텐데도 오히려 부상자의 숫자는 줄고 있는 것도 그들의 실력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도저히 학관의 학생이라곤 믿기 힘든 성과.

그리고 그들이 특출나다는 증거로 다른 동아리의 성과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심각한 중상을 입고 오는 이들도 자주 있었고, 임무 자체를 실패하는 이들도 꽤 된다.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사망자는 둘 정도밖에 없다는 점일까.

“줄여야겠군.”

아무래도 슬슬 의뢰의 숫자를 줄여야 할 것 같다.

전에 있던 친선전 때문에 황실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져 순순히 협조하긴 했지만, 이 이상은 학생들의 재능 낭비다.

학생들의 경험을 위해서라도 나쁘지 않은 기회이긴 하지만, 주제 파악이 덜 된 녀석들이 꽤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 주제 파악이 덜 된 녀석들도 맹으로 들어오면 나름대로 잘 다듬어서 굴릴 수 있으니까.

이 이상의 인재 낭비는 멈춰야겠지.

대충 방향을 정한 제갈진천은 짧게 지령서를 만들어 자리 옆에 있는 통에 넣었다.

자, 그다음으로 처리할 일은…….

“도왕(刀王), 여전히 속내를 모르겠군.”

무림학관에서 온 공문.

그 내용을 살피며 제갈진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인간은 똑똑한 주제에 왜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간다.

원하는 게 대체 뭘까.

단순히 학생들의 실력 향상?

정말 그런 순수한 의도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정녕 참된 교육자로서의 의무감으로 이러는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제갈진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팽후의 의중을 헤아리는 것은 우선순위가 낮다.

지금은 눈앞의 이 안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

잠룡제(潛龍祭) 개최 안내

학관의 학생들이 나날이 자신을 갈고닦고 있으나, 그 성과를 뽐낼 기회가 많지 않다.

이에 그들의 의욕을 고취하고, 학생들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잠룡제를 개최하고자 한다.

또한, 이 행사엔 학생들의 생활을 보고자 하는 학부모를 초대하고 또한 지역 행사로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허가하여…… (중략)…… 이와 같은 이유로 본 학관은 무림맹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바이다.

-------

간단히 말해, 학교 축제를 열겠다는 소리다.

그것도 아예 대놓고 외부 사람들을 모아서.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나 싶다.

친선전에서 습격을 당하여 난리가 났던 것이 불과 한두 달 전이다.

물론 지금부터 몇 달은 준비해서 축제를 개최하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군.”

그것을 감안해도 도저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대체 왜 팽후는 이것을 강행하고자 하는가.

서신엔 반드시 개최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개최가 거의 확정된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있을 터.

툭툭.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고민에 빠진 제갈진천은 가만히 서신을 바라봤다.

이 시기에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마지막에 적힌 협력을 요청한다는 문구, 저 문구가 묘하게 거슬린다.

서신을 내려다보는 제갈진천의 미간에 파인 골이 조금씩 깊어졌다.

* * *

“성과가 꽤 좋나 봐?”

“실전이란 건 역시 도움이 많이 되더군.”

이리저리 목을 꺾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철백의 모습에 설천위는 그 옆을 바라봤다.

“서 소저는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상대가 약해서 딱히 도움이 안 됐나 봐?”

“……네.”

[재능이 넘친 결과로구나.]

[거듭하다 보면 배울 게 분명 있긴 하겠으나, 지금은 개인 수련에 몰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구나.]

“그렇다네?”

혼들의 의견에 어깨를 으쓱이며 서하영을 바라본 설천위는 마침 근처에 있던 여웅을 불렀다.

“여웅!”

“네. 대주.”

“서 소저는 이제 외부 임무 안 해. 그러니 철백이랑 같이 움직여.”

“예.”

“철백은 서 소저처럼 너희를 못 지켜 주니까 좀 더 빡세게 준비하고.”

“예!”

“천위, 나도…….”

“너도 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서하영처럼 지켜 주는 건 무리지.

서하영의 창은 그야말로 신기(神技)니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한마디 하려다가 빠르게 현실을 인정한 철백이 입을 다물자, 피식 웃은 설천위는 다시 검을 쥐고 섰다.

호흡을 가라앉힌다.

최근 몇 주간, 오로지 반복해 왔다.

검을 내려치고.

주먹을 내지르고.

도를 내리그었다.

이 몸 안에 쌓은 것들을 그저 한결같이 반복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

한층.

또 한층.

쌓고 쌓았다.

다만, 부족한 재능은 모래와도 같았다.

그 위에 아무리 쌓고 쌓아도 시간이라는 파도를 만나면 그만 산산이 부서졌다.

쌓고, 부서지고.

쌓고, 부서지고.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옆에서 본다면 무의미해 보이기 그지없는 발전 없는 반복.

그러나 파도에 부서지는 사상누각이라도 그 잔해는 남는다.

수십 번 박아 넣은 주춧돌과 함께 셀 수도 없이 세운 기둥은 모래 위에 새로운 바닥이 된다.

모래와 같은 재능 위에, 단련된 육체가 새로운 토대가 되어 대지를 이룬다.

“후우.”

한 호흡.

호흡을 고르고 내려치는 일격이 허공을 가른다.

여느 때와 같은 내려치기.

여느 때처럼, 그 곁에서 마보를 하던 철백은 자신도 모르게 마보를 풀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친다.

방어.

육체를 단련하고 나서부터 급소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동작 이외의 것은 전부 털어 내던 그것이 본능적으로 육체를 감쌌다.

그리고.

후웅!

공기를 가르는 내려치기와 함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한기가 감각을 일깨운다.

현실을 인지시킨다.

방금 나는 무엇은 본 거지?

[훌륭하다.]

철백이 미처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오랜만에 듣는 만족스러운 현태중의 목소리가 훈련장에 퍼졌다.

영안을 깨친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설천위에게서 현태중으로 향했다.

철백과 마찬가지로, 이상함을 느낀 이들 모두가 설천위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단숨에 그들 전부의 시선을 받은 현태중은 담담하게 그들의 시선에 답했다.

[소월(素月)]

그것은 밝고 흰 달이니.

너무나도 선명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밤의 꽃.

[그것이 저 검의 이름이다.]

진정한 변검(變劍)의 시작점이다.

[놈, 드디어 제대로 된 달을 품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