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252화-잠룡제 (1)
“……천위, 이게 맞나?”
“뭐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의뢰 내용을 받아 든 철백은 헛웃음과 함께 의뢰 내용을 살폈다.
“……약탈 허용이라니?”
“어허, 약탈이라니. 상대의 소지품에 소유권을 가지는 것뿐이야.”
“다른 사람의 소지품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걸 우린 약탈이라고 부르기로 사회적으로 약속을 했다. 천위.”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나름대로 찔리는 게 있는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설천위를 바라본 철백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런 내용을 무림맹에서 허락해 줄 리가 없을 텐데?”
현상범을 잡아서 그 녀석을 털면 나오는 돈은 전부 가져간다니.
물론 암묵적으로 현상금 사냥꾼들은 다 그렇게 일 처리를 하고 있지만, 명색이 정파 무림에서 파견된 이들이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건…….
무엇보다 공식적으로 그걸 인정한다는 건 얘기가 너무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무림맹에서 허락을…….
“받았어.”
“……받았다고?”
“응. 바로 허락해 줬지.”
무림맹이 어떤 곳인데.
철백의 당황한 표정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얘가 참, 아직도 무림맹을 잘 모르네.
“거기도 돈이 새는 곳이 많아서 만성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거든.”
아마 이번에 철백이 정리한 곳을 털면서 꽤나 짭짤하게 벌어들이지 않았을까?
출동한 건 남궁선 그 양반이라고 하니 중간에서 해 먹지도 않았을 테고.
이게 나름 짭짤한 수입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명분도 뭐 괜찮지 않은가?
불법적으로 양민을 수탈한 이들의 돈을 뺏어 다시 일반 백성에게 돌려준다.
크.
정의롭구먼.
“뭐, 그래 봤자 대부분은 허탕이긴 하겠지만.”
“그렇겠지. 나도 몇 번을 나갔다 그때 한 번 세력과 부딪친 거니까.”
심지어 자신이 아닌 다른 학생이었다면, 역으로 목숨이 위험했을 수준이고.
물론 그래서 단체로 움직이자고 한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던 철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꽤 긴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 녀석은 가끔 이렇게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어떨 때는 겁쟁이처럼 안전에 집착하면서, 어떨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움직인다.
물론, 그 과감성에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깔고 움직이긴 하지만.
그게 겉으로 티가 안 나서 당황스러울 뿐이지.
“그래서, 천위 너는?”
“응? 나?”
“너는 안 움직일 거냐?”
의뢰를 받는 동호회의 이름은 당연히 혼령연구회.
설천위가 반쯤 장난으로 만들었던 그 동호회다.
물론, 동호회실은 지금도 그 친구들과 함께 유용하게 쓰고 있고.
잠룡대원들도 이름을 넣어서 잘 쓰고 있는 그 동호회를 이번에 움직이는 거다.
벌써 조를 짜서 의뢰를 받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명단에 설천위가 없다는 것 정도?
“난 안 나갈 건데?”
저 뻔뻔한 태도 좀 보게.
친구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임무를 위해 나가는…….
“그렇게 작게 말해도 다 들립니다.”
[흠흠, 나는 딱히 별말 안 했다만?]
“전 뻔뻔한 녀석이라 그런 건 모르고요. 나중에 봐요.”
잘 나오지도 않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리는 암영의적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은 설천위는 다시 철백을 바라봤다.
“내가 나가면 거물들이 움직여서 안 돼.”
“그것도 그렇군.”
설천위의 말에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많은 세력이 노린다는 정도가 아니긴 하지.
어떻게든 죽이겠다고 화경급 고수까지 움직이니 차라리 얌전히 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도망쳐라.”
“물론이다.”
목숨이 최우선이지.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학생회가 뿌린 공문을 접어 품에 넣곤 설천위를 바라봤다.
여느 때처럼 마보를 하고 있는 모습.
유예린이 졸업하고 몇 주, 아니 그 전까지 포함해 몇 달.
‘철저하군.’
지금까지보다 더 기초 수련에 매달리고 있었다.
원래도 보통 학생의 두 배 이상을 기초 수련에 시간을 쏟고 있었는데, 최근엔 그보다 더 시간을 늘린 느낌.
영약을 먹어서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것을 준비하나?’
잠시 설천위를 바라보던 철백은 이내 몸을 돌렸다.
설천위의 선택이 저것이라면, 자신이 왈가불가할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럴 처지도 못 되고.
다만 기대될 뿐이다.
저리도 독하게 수련하는 설천위가 어떤 성장을 보여 줄지.
그리고.
‘따라가 주지.’
그 뒤를 따라잡았을 때, 자신은 어떤 경지 위에 서 있을지.
* * *
“당돌하네.”
높은 봉우리 위에 놓인 적막한 정자(亭子).
그곳에 앉아 술잔을 손에 쥔 여인, 살존은 안개가 깔린 산세를 바라봤다.
“몇이나 당했다고?”
“최소 셋입니다.”
“많이도 당했네.”
완전히 음지에서 활동하는 살수들치곤 너무 쉽게 당하고 있긴 하다.
“정보를 제공해 준 보람이 있어.”
황실 녀석들에게 손을 보탠 보람이 있네.
생각했던 방향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홀짝, 술을 마시며 고개를 돌린 살존은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이를 바라봤다.
“그 녀석은?”
“그 녀석이라 함은 설천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응. 걔는 뭐 해?”
“학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흐응, 설마 겁먹었나?”
가능성이 없진 않지.
자신에게 의뢰를 넣었을 정도이니까.
놈들이 단단히 칼을 갈고 있다는 걸 느꼈을 테니 몸을 사리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럴 성격 같아 보이진 않던데.”
혹시 모를 위험에 겁먹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유형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랬다면 자신 앞에서 그리 당돌하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학관에 틀어박혀 한결같이 기초 수련을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하던 순간, 부하의 보고에 살존은 두 눈을 빛냈다.
“기초 수련을 반복하고 있다고?”
“예. 웬만한 무인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게 수련을 반복 중이라고 합니다.”
지독하게 수련을 반복 중이다.
그 말에 살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구 생각일까? 아니, 누구 생각인지 중요하지 않은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역시, 정신력 하나는 참으로 끝내주는 녀석이라니까.
입꼬리를 비튼 살존은 간만에 좋아진 기분에 대충 부하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 신호에 안개처럼 흐려져 사라지는 부하.
오존(五尊)이라는 허명을 얻은 뒤에 자신의 발밑으로 기어온 녀석들을 가르친 보람이 있다.
잘 배우네.
여러모로 쓸모도 많고.
물론.
“아무 소용도 없지.”
좋아졌던 기분이 갑자기 낮게 가라앉는다.
생각이 이어지며, 심장에 아릿한 통증이 찾아온다.
실제로 아픈 건 아니다.
아니, 이젠 실제로 아픈 것일지도.
술을 입에 가져간 살존은 씁쓸함을 술과 함께 삼켰다.
차가운 술이 들어가자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존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 오래 기다리진 못한다. 애송이.”
내가 기다려 줄 수 있는 건 네 녀석이 학관을 졸업하기까지 걸리는 일 년 정도다.
* * *
“여긴가여?”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에이, 말 편하게 하셔도 된다니까.”
“일단은 임무 중이니까요.”
“응, 그것도 그러네여.”
일리가 있네.
사석에선 이렇게까지 깍듯한 존대는 안 하긴 하지.
여웅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주위를 살폈다.
딱히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뭐, 사실 그게 당연하지만.
살수들인데 대놓고 기척을 드러낼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드러내면 함정일 거라고 생각해 더 조심해서 접근했을 거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조심히 접근하고 있긴 하지만.
“그나저나 정보가 너무 정확하니 더 불안하네요.”
“확실히 의아할 정도로 정확하긴 합니다.”
정확하게 살수들의 본거지를 짚어 주는 수준이니까.
처음엔 막연히 황실의 정보력이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조력자가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
‘이건 가서 상의 좀 해 봐야겠네여.’
다른 조도 다 느끼고 있을 테니, 한번 얘기는 꺼내 볼 필요가 있다.
주의하는 마음이 있고 없고는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순간적인 대처의 질을 좌우하니까.
함정일 가능성을 항상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게 조심하자고 다짐하며, 서하영이 걸어가던 그 순간.
“흡!”
본능적으로 움직인 창이 무언가를 쳐 냈다.
그 직후, 상황을 인지한 서하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그녀에게 반응한 다른 잠룡대 또한 움직였다.
습격자는 열 명 이상.
자신들의 숫자는 넷.
명백한 열세.
빠르게 등을 맞대고, 사각을 줄인다.
뭉치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로의 사각을 줄이는 것.
그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삼는 방어의 한 형태다.
뭉치는 것으로 인해 회피의 범위가 좁아졌으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사각을 동료가 반드시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
그 신뢰를 뚫기 위한 적들의 공격이 날카롭게 쇄도한다.
비수를 들고 달려드는 이.
비수를 던지는 이.
날카로운 장침을 쏘아 내는 이.
독단을 던지는 이.
그야말로 혼란에 혼란이 거듭되는 난전이 벌어진다.
그 난전 속에서 서하영의 창이 마치 섬전처럼 움직인다.
긴 길이를 가진 창의 속도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엄청난 속도의 창이 공간을 마구 헤집는다.
비수를 쳐 내고, 강침을 쳐 냈으며, 독단이 터지며 생긴 독 구름을 바람으로 몰아낸다.
뭉친 네 사람 전부를 지키는 압도적인 방어.
‘……볼 때마다 감탄밖에 안 나오는군.’
그 모습에 여웅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몇 번 함께 임무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의 창술은 진짜 감탄밖에 안 나왔다.
처음에는 네 사람을 지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어색함이 있었다.
살수들의 기습에 부상을 입는 사람도 나왔고.
그런데, 몇 번의 습격을 겪고 나니 이리도 완벽에 가까운 방어를 자연스럽게 펼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지금도 보라.
적의 습격을 걷어 내는 것으로 단숨에 공격권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감탄하면서 착실하게 반걸음 전진한 여웅은 밀집대형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수를 쥐고 달려드는 살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의 비수를 쳐 내며 주먹을 밀어 넣는다.
동료의 공격을 전부 걷어 낸 창에 겁먹은 녀석의 반응은 필연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뿌득!
뼈를 부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그 옆구리를 꿰뚫는다.
폐를 찌른 갈비뼈에 호흡이 멎은 상대의 몸이 절로 숙어진다.
단숨에 내려온 턱에 여웅의 주먹이 꽂힌다.
마찬가지로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간 암살자의 몸이 축 늘어진다.
죽진 않았을지라도 확실하게 의식을 잃은 상태.
턱을 직격타로 맞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갈비뼈가 폐를 찔렀을 테니 이대로 놔두면 자연스럽게 죽을 거다.
그렇게 한 명을 처리한 여웅은 다른 살수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동료를 돕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산개!”
가차 없이 도망치는 적들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다.
살아 있는 동료를 미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고, 아니다 싶으니 곧바로 도망치는 모습.
살수의 전형이다.
그것은 분명 효율이 좋은 방식일진 몰라도.
“구역질이 나는군.”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쿵!
묵직한 전각과 함께 여웅은 방어를 굳혔다.
마음 같아선 도망치는 녀석들의 뒤를 쫓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자신은 방어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상태다.
동료와의 의견 조율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건 있을 수 없다.
냉철하게 방어를 굳힌 여웅의 모습에 다른 두 사람도 그녀와 함께 방어를 굳혔고.
“천천히 추적하겠습니다.”
어느새 세 사람을 베어 버린 창을 거두며 서하영이 낮게 지시했다.
아까까지의 둥글둥글한 목소리와 표정 따윈 사라진, 냉철한 무인의 모습.
창절(槍絶).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채 서하영이 선두를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도주한 살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