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251화-나아가자 (3)
“일단, 의뢰가 많이 늘어난 건 확실하네.”
“예. 위험도가 꽤 있어서 일단 정(丁) 이상의 학생들에게만 임무를 주고 있습니다.”
혜송의 뒤를 이어 학생회장이 된 제갈소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갈소가 누구인데 그냥 막 의뢰를 뿌렸겠는가.
황실에서 상관없다며 의뢰를 넣었어도 중간에서 막았을 인물이지.
애들한테 들어 보니 정(丁)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고.
가끔 좀 강한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수준은 안 된다고 하니까.
무림맹의 교육장인 무림학관의 특성상,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위험이다.
문제는 너무나도 수상한 의뢰 내용이다.
“의뢰인이 황실인데, 우리 쪽에 임무를 넘기는 이유는 들었어?”
“아쉽게도 뻔한 대답밖에 해 주지 않더군요. 바빠서 그렇다는 대답이요.”
응.
그렇겠지.
황실 녀석들이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리 없지.
속내를 밝힐 리도 없고.
문제는.
진짜 왜 이러느냐는 건데.
“다만, 저희가 따로 조사해 본 결과 정말 청소의 개념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청소?”
“네.”
청소라…….
가만히 턱을 매만지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있다.
황실에서 소재만 파악하고 있던 범죄자를 정파 무림의 힘을 빌려 처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니까.
문제는 빈도다.
짧으면 일주일, 길어 봤자 3주가 넘지 않는 시간 안에 한 명 이상의 범죄자를 처리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건 명백히 너무 많은 숫자다.
게다가 이 의뢰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니 더욱 문제가 된다.
듣자 하니, 병(丙)으로 승급을 노리는 학생들은 전부 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숫자가 거의 열에 가까울 테니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다.
이 넓은 무림에 범죄자가 많긴 해도 그들을 찾아서 잡는 건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듣자 하니, 거의 정확하게 범죄자의 위치를 지정해서 알려 준다고 하지 않는가.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몇 가지 있지만…….
“아마도 시험하는 것이겠지요.”
제갈소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설천위는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갈소의 눈빛을 확인한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알면서 순순히 따르는 이유는?”
“딱히 손해 볼 게 없으니까요.”
제갈소의 당돌한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지.
손해 볼 게 없긴 하다.
황실에서 학관을 시험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어느 정도 위협이 되고,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쪽의 전력이 드러나고 말고가 아니었다.
“나쁘지 않긴 하지.”
이쪽에서도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쪽의 입장에선 더 중요하다.
애초에 학관에서도 시험은 치른다.
그 정보가 뭐 특급 기밀인 것도 아니고.
황실에서 구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조금 불법적인 방법을 써야겠지만.
여하튼, 시험이든 뭐든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오히려 두 팔 들어 환영할 일이다.
황실에 휘둘린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당장의 이득을 생각한다면 그건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고.
문제는…….
“외부의 시선은?”
“아무래도 그 부분이 문제이긴 합니다. 해서 슬슬 학생들의 의뢰를 끊을 생각이었죠.”
이쪽이야 뭐, 이득이 많긴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아니다.
황실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은 어린놈들이 마구 날뛰고 있다고 생각할 터.
현상 수배가 된 놈들이 전부 끈 없는 연 신세는 아니다.
살짝이라도 양지에 드러나면 안 될 수준의 불법적인 일을 하거나 하는 일의 위험도에 비해 세력이 약한 경우, 대개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게 보통이다.
당연히 각 개인에게 수배가 내려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고.
문제는 그런 녀석들도 나름의 연결망이 있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 보면 발악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인데…….
“설 소협도 문제라고 느끼기 시작할 정도면 슬슬 그만둘 때가 된 것 같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든 제갈소는 빠르게 공문을 써 내려갔다.
깔끔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
순식간에 공문을 써 내고 붓을 내려놓은 제갈소는 잠시 먹이 마르길 기다리기 위해 다시 설천위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전부터 궁금했던 점이다.
“설 소협, 소협은 왜 공적 쌓기를 안 하시죠?”
갑(甲)으로의 승급.
당연히 그것을 위해선 꽤나 높은 수준의 공적이 필요하다.
당장 정(丁)에서 병(丙)에 오르려는 이들조차 공적 쌓기에 열심이지 않는가.
승급이 거의 확실시 되는 서하영과 철백마저도 공적 쌓기에 열중하는 중인데…….
“아, 충분해서.”
자리에서 일어선 설천위는 제갈소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승급 시험을 치를걸?”
* * *
“……철 가가가 안 돌아와요.”
오후의 수련장.
설천위가 더 이상 의뢰를 받지 말라고 서하영과 주현운에게도 한 소리 하고 며칠이 지났다.
철백이 복귀해야 할 예정일이 사흘이나 지난 시점.
결국 참지 못한 서하영이 창을 들었다.
“찾으러 가야겠어요.”
“응. 그래야지.”
“……안 말려요?”
“왜 말려?”
“괜한 걱정이니 위험하다느니 하면서 말릴 줄 알았는데요?”
“내가 그렇게 냉철한 이미지였나?”
“이미지요?”
“그런 느낌이냐고?”
“음, 얼추요?”
뭐야, 그런가?
하긴 정신력이 높아서 잘 당황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서하영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검과 도를 챙기고 일어섰다.
“같이 갈 사람?”
“저는 기다리고 있을게요.”
자신의 다리를 생각해 기다리기를 선택한 소윤혜.
그녀를 잠시 바라본 주현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긴 하나, 지금 중요한 건 실종된 철백의 행방이다.
한 사람이라도 손을 보태는 것이 좋을 테니 지금은 같이 움직일 시기.
주현운도 자리에서 일어서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였다.
“제갈소한테 미리 얘기는 해 놨어.”
“벌써요?”
“철백의 성격이면 서신이라도 하나 보내 놨을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철백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졌다는 소리다.
뭐가 됐든 움직일 필요가 있다.
철백의 능력을 생각하면 죽진 않았겠지만…….
독이나 주술 등 철백이 제대로 대처하기 힘든 방법도 이 무림엔 널리고 널렸다.
일단 도와주…….
“설 소협?”
출발을 위해 훈련장의 문을 연 순간, 자신의 앞에 선 제갈소의 모습에 설천위는 멈칫했다.
뭔가 표정이 묘한데?
웃는 것 같으면서 떨떠름하고 묘한…….
“철 소협이 서신을 보내왔어요.”
“……그래?”
뭐야, 멀쩡한가 보네?
“어디요?!”
다급하게 튀어나온 서하영을 향해 본능적으로 서신을 내미는 제갈소.
날쌘 매처럼 제갈소의 손에서 서신을 낚아챈 서하영은 단숨에 서신을 펼쳐 내용을 읽었다.
그런 서하영의 뒤에 서서 함께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제갈소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을 거란 것도.
* * *
“꺄하하하! 역시, 이번 세대는 달라도 다르네?”
“누님.”
“응, 왜?”
“그리 크게 웃기에는 혈향이 짙습니다.”
깍듯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동생의 모습에 남궁선은 어깨를 으쓱였다.
“짙긴 뭐가 짙어?”
이 정도면 거의 안 나는 수준이지.
주위를 둘러본 남궁선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음에 들어.
“깔끔하네.”
시체는 거의 전부 일격에 죽었다.
딱히 고통을 줄 생각이 없는 깔끔한 치명상.
아마 대부분이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즉사했겠지.
대부분이 목이 꺾였거나, 주먹에 맞아 가슴이 함몰돼 심장이 파열되어 죽었다.
무(武)의 기본이다.
적을 농락하고 희롱하는 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자신을 지키고 적을 파괴하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이의 주먹.
“왜 아직도 학관에 있는지 모르겠네.”
“초기에 성적을 못 받아서 채워야 할 성적이 많다고 합니다.”
“설천위, 걔도?”
“네, 서 소저도 마찬가지라더군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걔들이 계(癸)였던 게 실감이 나기도 하고.
그만한 인재들이 어떻게 계(癸)에 묻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참 묘하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인 남궁선은 친구들이 기다린다며 학관으로 돌아간 당돌한 학생 녀석이 만들어 낸 풍경을 바라봤다.
“꽤 유명한 살수 집단이라고?”
“예, 이름은…….”
“아아, 됐어. 이미 사라진 녀석들 이름을 들어서 뭐해.”
대충 손을 저어 남궁천의 말을 끊은 남궁선은 걸음을 옮겨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독과 암기를 쓴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바위 같은 녀석이 독과 암기에 대응할 방법을 찾았다는 증거.
검기조차 맞아 내는 몸에 독과 암기에 대응하는 뛰어난 대처.
거기에다 자신을 습격한 암살자들을 이용해 본진을 찾아내 정리하는 수완까지.
“진짜로 탐나네.”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자신의 옆에 있는 동생이 학관에서 큰 성장을 거둬 맹에 들어온 것처럼.
이 현장을 만들어 놓은 녀석도 착실하게 배움을 쌓아 나아가고 있단 소리다.
이만한 인재, 찾기 쉽지 않은데.
아쉬움을 삼키며 턱을 쓰다듬은 남궁선은 곳곳을 뒤지는 부하들을 바라봤다.
뭐, 얘들도 어디 가서 부족하단 소리 듣는 애들은 아니니까.
“작은 문서 하나도 놓치지 마.”
“예!”
하나둘 정도는 도망갔겠지만, 철백이 어찌나 거세게 몰아붙였는지 은폐해야 할 것들조차 제대로 은폐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이 인근의 유력가들이 꽤나 시끄러워지겠어.
* * *
“……그래서 찾아서 전멸시켰다고?”
“하나 정도 놓치니까 잘 도망치더군.”
하루 정도 얌전히 철백을 기다린 뒤 그를 맞이한 설천위는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얘는 뭐, 점점 더 게임 속 모습과 가까워지네.
“독이나 암기에 대한 대처는?”
“많이 익숙해졌다.”
내공이 아닌 철기(鐵氣)라 칭하는 기운을 뼈와 근육에 녹인 철백.
당연히 독에는 취약해야 정상인데…….
“강철은 고작 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아니, 보통 철은 독에 부식되거든?
당당하게 말하는 철백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은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돌려 훈련장을 바라봤다.
철백의 무사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들.
주현운은 물론이고, 소윤혜와 잠룡대의 이들까지.
꽤나 소란스러워진 훈련장을 보고 있자니…….
“나쁘지 않은데?”
살짝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혈교나 혈사련에 깊은 원한을 새겨 놓은 건 나뿐이잖아?
그놈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노리겠지만…….
‘걔들도 나름 바쁘니까.’
화경급 이상의 고수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팽후가 무림학관에 자리 잡은 채 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는 것이 특급 고수의 존재다.
당연히 적이 더럽게 많은 혈교나 혈사련 같은 조직은 중요 거점에 화경급 이상의 고수를 상주시킨다.
무림학관의 학생 하나 죽이겠다고 움직인 노공(老公)이 미친놈이었지.
웬만하면 화경급 고수가 움직일 일은 없을 거다.
그렇다면…….
“흠, 나쁘지 않아.”
“뭐가요?”
철백의 귀환에 기뻐하며 그와 떠들던 서하영은 오랜만에 느끼는 불안감에 설천위를 바라봤다.
저 인간은 이상한 생각을 할 때 꼭 저런 표정을 짓던데…….
“제갈소를 만나야겠어.”
응, 아무래도 진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 * *
“……의뢰를 다시 받자고요?”
“응.”
학생회실.
그곳에서 제갈소와 마주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를 받자. 그리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본격적이라고 함은요?”
“학생 개인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동호회 단위로 의뢰를 받자.”
“보상은 동호회 회비고요?”
“잘 아네.”
“예산 없어요.”
현상금이 걸려 있긴 하지만, 그 금액은 그리 크지 않다.
개인이 전부 먹으면 훌륭한 용돈이 되지만, 단체에서 먹기엔…….
“예산이 왜 없어? 우린 돈 많은 친구들이 있잖아.”
“돈 많은 친구요?”
응, 돈 많은 친구.
“우리의 표적들.”
없으면 약탈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