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250화-나아가자 (2)
졸업.
무림학관에도 찾아온, 피할 수 없는 그 행사는 그리 화려하게 치러지진 않았다.
애초에 졸업은 학관의 수업을 끝내는 것일 뿐이고 본격적인 시작은 무림맹에서부터이니까.
그들의 앞날을 위한 조언과 적당한 축하만 건네주면 충분할 일이다.
그렇기에.
“벌써 끝나네요.”
팽후의 연설이 끝난 뒤, 연무장을 걸어가는 서하영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번에 친했던 이들 중에 상당수가 졸업하기 때문이다.
을(乙)인 유예린을 비롯해 남궁천, 당화유, 혜송, 설천강까지.
병(丙) 등급에 있던 이들 전원이 졸업한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병(丙)을 뽑는 시험이 치러질 거라고 한다.
물론 그 후보로 이미 많은 수의 사람이 올라오고 있지만.
서하영과 철백도 당연히 그 후보에 들어가 있다.
사실 실력으로는 이미 충분한 그들이지만, 아무래도 강해진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았던 터라 그 실적에 조금 아쉬움이 있다.
설천위처럼 큰 성과를 달성해 낸 것도 아니다 보니 조금 애매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병의 승급이 거의 확정적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설 소협은요?”
“아까 유 소저를 따라가더군.”
“아.”
그럼 끼어들면 안 되겠네.
철백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일단 다른 졸업생들에게 먼저 인사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유 언니랑은 조금 있다가 인사하지 뭐.
그렇게 서하영이 당화유를 발견하고 달려가던 그때.
“여기서 뭐 해?”
“오랜만에 그리운 생각이 들어서 올라왔어요.”
“……그리운 생각?”
무림학관 내에서도 꽤 높은 편에 속하는 전각의 지붕 위.
혼들의 도움을 얻어 그곳에 앉아 있는 유예린을 찾아온 설천위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운 생각이라니.
여기에 그런 생각을 할 거리가…….
고개를 갸웃하던 설천위는 바로 아래에 보이는 풍경에 헛웃음을 지었다.
“계(癸)의 숙소가 보이는구나, 여기.”
설천위가 원래 지내던 곳.
이 무림학관에서 가장 뒤처지는 이들이 지내는 곳.
“항상 저기에 서서 검을 휘둘렀죠.”
그렇겠지.
설천위라는 인간은 게임 속에서도 웬만하면 무림맹에 들어가긴 하니까.
어떻게든 이류의 끝자락에 간신히 턱걸이해서 일반 대원으로라도 무림맹에 들어가긴 한다.
그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영적인 존재와 만난 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낸다.
허나,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성장했어도 너무나도 늦게 발견한 재능은 끝내 그에게 최종 전선에 설 자격을 주지 않았다.
“걱정했어요.”
원래 설천위가 갔을 길을 생각하며 쓰게 웃던 설천위는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작게 웃으며, 자신의 무릎을 팔로 감싼 채 고개를 돌린 유예린이 그를 바라봤다.
“시간이 날 때면 여기에 앉아 지켜봤어요.”
작게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토닥이는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지금도 걱정돼?”
“네. 걱정돼요.”
망설임 없는 대답.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설천위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니까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아니, 그놈들이 열 받게 하잖아.
개짓거리를 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그래요. 어쩔 수 없지요.”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볼을 꼬집으며 유예린은 웃었다.
“그러니 약속해 줘요.”
“약속?”
“네, 약속.”
잡은 볼을 살짝 당겨 늘리며 유예린은 빙긋 웃었다.
“일 년 정도 떨어지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곁에 있어 주겠단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
“그거야…….”
당연하지.
그렇게 대답하려던 순간.
말문이 막힌 설천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코앞에 있는 유예린의 두 눈을 바라봤다.
시리도록 맑아서 보고 있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
달콤한 향이 그 눈동자를 따라 흐르고.
따뜻한 숨결이 멀어진다.
그리고 설천위의 입술을 손으로 훑는 유예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힌다.
“이 누나는 언제까지라도 너를 기다려 줄 테니까.”
네가 나아갔던 것처럼, 나도 나아갈 거야.
그때 그랬던 것처럼.
네가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기에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던 그때처럼.
* * *
무림학관의 졸업식이 끝나고.
평소 친했던 이들과 함께 이동해 무림맹에 도착한 유예린은 자신이 배정받은 곳을 향했다.
“아버지.”
그렇게 도착한 단주실.
암은단(暗隱團) 단주(團主) 유석천을 마주한 그의 딸 유예린은 담담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약속한 대로 대주로 취임하겠습니다.”
“부단주로 시작하는 선택지도 있다.”
살펴보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은 유석천은 담담한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무림맹에 들어오기 전부터 대주로 활동하고 싶다고 주장한 딸이지만, 실력으로 본다면 부단주로 시작하는 게 맞다.
무림학관도 을(乙)로 졸업했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아뇨. 대주가 좋습니다.”
“이유는?”
“저는 어차피 이 단엔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까요.”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무림맹 내에서 이동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뭔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이동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원래 있던 단에서 불화가 있었다거나, 혹은 다른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야 이동하는 것이 보통인데…….
벌써부터 이동을 언급하는 딸의 모습에 유석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딸을 바라봤다.
“설마 그 녀석 때문이냐? 듣자 하니, 흑룡공자(黑龍公子)라고 불린다더군?”
“그 별호, 설 공자는 질색해요.”
장난으로 부르면 몸을 비틀며 싫어하던 모습이 꽤나 귀여웠는데.
뭐, 세간에선 흑룡이 흑룡학관과 겹치니 다른 거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흑룡보다 인상이 강한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걸로 굳혀지고 있는 모양새다.
싫어하던 설천위를 떠올리며 유예린이 작게 웃자, 유석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일에 사적인 감정을 끌고 오지 마라.”
살짝 노기(怒氣)가 서린 유석천의 목소리에 유예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감정 이전에 합리적인 판단이에요.”
“합리적인 판단?”
“네.”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담담하게 유석천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판단의 증거는 일 년 후에 자연스레 아시게 될 거예요.”
* * *
“그래서, 그날 대체 뭘 한 건가요?”
“뭘?”
“둘만 사라졌던 그…….”
히히 웃으며 다가오는 주현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 버린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너, 요즘 그런 거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흠흠, 존경하는 형님들은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아주 능청도 많이 늘었어.
얘가 친해지니까 점점 본성이 나오네.
소윤혜랑 첫 만남 때는 호탕한 호걸인 척을 했다더니.
“그래서 오늘 예정은?”
“병(丙) 승급 시험 준비요.”
병(丙)이라.
음, 그거 중요하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주현운을 바라봤다.
최근 비무로 느낀 결과, 사실 무력만이라면 절대 부족하지 않다.
다만, 실적이 부족할 뿐.
병(丙)이란 것이 나름 단주급으로 무림맹에 임관할 수 있는 진정한 상위 등급이다 보니 승급 조건이 꽤 까다로웠다.
심지어 을(乙)로 승급했던 당화유도 사고를 쳤다는 이유로 강등시킬 정도였으니까.
상위 등급이라는 것은 꽤나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실력으로도, 실적으로도.
지금 주현운을 비롯한 다른 학생에게 부족한 건 이 실적이다.
그렇기에 승급 시험 준비는 당연히 외부 임무다.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갈 것 같으니 며칠 걸릴 것 같아요.”
“산적?”
“아마도요.”
사천맹이 활동하니 녹림 녀석들이 대세가 되어 버렸나.
요즘 산적 소식이 많이 들리네.
작게 턱을 쓰다듬은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산적 놈들 사이에 혈사련이나 혈교가 껴 있을 확률이 높지만 주현운이 그런 거에 당할 인물인가?
천무지체의 급이 있지.
웬만하면 문제 터질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혼자 움직이지 않고 소윤혜랑 같이 움직일 테니 더더욱.
적당히 실적 점수를 쌓고 나면, 시험을 봐서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알아서들 잘하겠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야.”
훈련장에서 떠나는 주현운을 배웅한 설천위는 그대로 마보를 시작했다.
“어, 설 공자?”
“응? 어디 가?”
“네! 산적 토벌하러여!”
“……너도?”
“네!”
산적이 스폰 몹은 아닐 텐데?
역시 게임이었나?
뭔 산적이 그리 많아?
당차게 외치고 손을 흔들며 떠나는 서하영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쪽도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짐이 가벼운 거로 봐선 저쪽도 며칠 안에 돌아올 테니까.
마보나 계속하자.
* * *
“갔다 왔어요!”
“저도요!”
주현운과 서하영이 돌아왔다.
포상금이랍시고 두둑하게 챙긴 돈으로 맛있는 음식까지 사서.
“다녀왔다.”
소리 소문 없이 나갔다 돌아온 철백도 고기를 내밀었다.
요즘 산적들은 현상금이 꽤 되나 봐.
이거 참……. 그만한 현상금이 붙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을까.
조금 씁쓸한 생각을 하며 설천위는 고기를 뜯었다.
그리고.
“다녀왔어요!”
고작 2주 정도 만에 또 밖을 나갔다 온 서하영이 고기를 사 왔다.
줄줄이 이어서 나갔다 돌아오는 친구들.
하나같이 현상금을 두둑하게 받았는지 올 때마다 고기를 사 왔다.
어쩔 땐 일주일 만에, 어쩔 땐 3주 만에.
하나둘 나가서 고기를 사 왔다.
두 달쯤 지났을 때, 설천위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무림맹 근처에 산적이 그렇게 많아?”
그럴 리가 없는데?
“사, 산적 맞는데여?”
사 온 고기를 내밀다가 슬쩍 눈을 돌리는 서하영의 모습에 설천위의 눈이 빠르게 가늘어졌다.
“산적의 현상금이 이렇게 짭짤한 것도 영 이상하고.”
무엇보다.
“산적 따위한테 상처를 입었을 리가 없지.”
서하영의 오른팔.
살짝 배어 나온 피에 붉어진 옷을 보며 설천위가 물었다.
“어떤 녀석이야?”
“……쌍검귀라고 불리던 사람이요.”
응, 네임드는 아니네.
그냥저냥 유명한 흑도나 사파의 고수인가?
“여태까지 잡아온 녀석들 전부?”
“아뇨. 처음엔 산적이 맞았는데, 잡다 보니…….”
“현운이 너도?”
“넵.”
응, 그럼 철백도 그렇겠네?
소 소저도 그럴 테고?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이 자식들 정신이 있어, 없어!!”
“히익?!”
“우리가 혈교랑 혈사련한테 걸어 놓은 시비가 얼만데, 혼자서 현상범을 사냥하러 다녀!”
“그, 그래서 둘이서…….”
“가끔 혼자도 다녔잖아!”
“……죄송해요.”
아니, 전엔 승급에 별로 관심도 없더니 왜 이렇게 열심히들 하는 거야.
무엇보다 실적은 적당히 쌓기만 하면 시험으로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데, 대체 왜…….
미간을 찡그린 채 친구들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지금 밖에 나가 있는 철백도 현상범을 때려잡고 있겠지.
아주 정의의 사도 나셨어요.
그나저나.
“의뢰는 누가 준 거야?”
“의뢰요?”
“그래. 무림맹에서 현상범을 죄다 학관에 떠넘기진 않았을 거 아니야?”
요즘 무림맹이 바빠도 현상범을 전부 학생들에게 떠넘긴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분명 의뢰를 넣는 이가 따로 있을 터.
예를 들면…….
“황실?”
“네. 일단 관에서 준 의뢰이긴 한데…….”
“응.”
제대로 움직이는구나, 이 녀석들.
무림인이란 칼을 써서 무림인을 베고 있다?
여태까지 방관하던 현상범들을 미끼로 적극적인 의뢰를 넣어서?
뭐, 철백이 오면 다 같이 상의해 봐야겠네, 이건.
만약 관이 이쪽을 이용해 먹고 버릴 칼로 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쉽사리 휘둘려 줄 순 없지.”
* * *
“흠.”
숲속.
정보대로 추적에 성공해 붙잡은 범인을 살피던 철백은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나 정확한 정보,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수준의 범인.
‘……이상하다 여기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수상하군.’
현상범을 잡는 건 사실 그들을 제압하는 것보다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알려 주는 정보를 제공해 주면서 의뢰를 한다?
아무래도 그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역시 이번 의뢰가 끝나면 돌아가서 상의를…….
깡!
고개를 돌린 순간, 옆구리에서 들린 금속성에 철백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사람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는데 역으로 부러져 버린 비수의 상태에 그만 경악한 암살자의 머리를 솥뚜껑만 한 철백의 손이 붙잡는다.
돌아가서 상의하려고 했는데, 조금 일이 길어지겠어.
주변에서 느껴지는 다수의 기척에 암살자의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한 철백은 짧은 단말마와 함께 자세를 고쳤다.
“일이 꼬이는군.”
상의하기 전에 먼저 일을 해결해야 될 수도 있겠어.
물론 그 전에 먼저…….
“대체 왜 나를 먼저 노렸는지 그 이유부터 들어 볼까?”
멍청한 암살자들의 속내부터 파악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