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249화-나아가자 (1)
“흠.”
무림학관의 숙소.
홀로 방에 앉은 설천위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스킬창을 바라봤다.
무림학관으로 돌아오는 길, 진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 이 [스킬 강화권]이라는 것의 정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게임을 하면서 이렇게 성능이 좋은 보상이 있었다면 얘기조차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자신이 직접 얻진 못했더라도 커뮤니티 같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얻었다는 사람의 글을 반드시 봤을 거다.
이런 보상을 자랑하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되고, 그런 인간들만이 이런 보상을 얻을 확률이 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 보상은 게임에선 없었다.
‘……다르지.’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육도(六道)의 세계관만으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빈틈이 메워져 있으니까.
사람에게서도 그것을 느끼고 있고.
무공에서도 그것을 느끼고 있다.
게임 속에선 아버지와 절연하는 것 이외의 모습은 보인 적 없었던 서하영은 지금 아버지의 허락 아래 웃으며 창을 쥐고 있다.
온갖 고난을 감내하고 겨우 학관을 졸업해 무림맹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재능의 꽃을 피우는 철백은 학관에서 이미 그 재능의 꽃을 피웠다.
게임 속에선 본 적도 없었던 연수화라는 인물이 육도에서도 나름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남궁천과 연인 관계가 됐다.
존재조차 몰랐던 참수사신의 손녀가 동료가 되어,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주현운의 곁에 있다.
단순한 게임 속 세상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있다.
“……후.”
[뭐냐, 웬 한숨이냐?]
[어린놈이 쯧쯧.]
……저기서 혀를 차는 할배와 도둑 아저씨도 몰랐고 말이야.
“거, 나름 고민이 깊은 나이거든요?”
[어허, 아직도 사춘기란 말이냐? 쯧쯧, 이래서 사내놈들은…….]
거, 누가 들으면 할배는 처음부터 할배였는지 알겠수?
혀를 차는 천마에게 반항적인 시선을 던진 설천위는 허공에 손을 휘젓곤 침대에 누웠다.
그래, 무슨 상관이냐.
살아남기로 결정했고.
살아가기로 결정했는데.
이곳에서 나는 천희가 아니라 설천위이고.
지금의 내겐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
“무슨 상관이겠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설천위는 이내 벌떡 일어나서 자세를 고쳤다.
“그럼 최선을 다해야지.”
[암, 최선을 다해야지. 그런데 뭘 말이냐?]
거, 일일이 끼어들지 말아요.
암영의적을 살짝 흘겨보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스킬창을 열었다.
[스킬 강화권]
뭐가 됐든, 설명을 보아하니 스킬의 등급을 올려 주는 보상이다.
中下의 스킬을 中中으로, 中上의 스킬을 上下로 올려 주는 거겠지.
문제는 이 상급까지라는 제한이다.
上下까지는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과연 上下를 上中으로 올리는 게 가능할까?
또, 上中을 上上으로 올리는 건?
만약 가능하다면…….
“개사긴데…….”
너무 날로 먹는 생각인가?
고민하며 자신도 모르게 턱을 손으로 쓸면서 스킬창을 바라본 설천위는 빠르게 후보를 뽑았다.
일단 中上급.
먼저 [불굴(不屈)].
이건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부동심과는 다른 의미로 전투 중 멘탈 관리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고통을 이겨 낼 수 있게 해 주는 스킬이니까.
만약 상급으로 올라간다면, 꽤나 효과가 기대된다.
그다음은 [섬벽권(閃霹拳)].
이건 처음 익힌 권법이고, 요즘 꽤나 숙련도가 올라서 만족스러운 녀석이다.
문제는 무공의 경우 상급으로 올리면 변화가 찾아올 텐데 그 이유를 혼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캐물으면…….
‘음, 무공은 제외하자.’
어차피 혼들의 조언을 받아서 꾸준히 성장시킬 수 있는 거니까.
무공을 선택지에서 빠르게 제외시킨 설천위는 남은 스킬들을 바라봤다.
여차여차해서 익힌 스킬들.
[패령안(覇靈眼)(中中)], [불굴(不屈)(中上)], [회복(回復)(中中)], [영각(靈覺)(中中)], [영혼지체(靈魂之體)(上中)], [빙의(憑依)(中中)], [살악(殺握)(上中)], [수라(修羅)(上中)], [독기흡수(毒氣吸收)(中下)], [해독(解毒)(中中)], [독기 제어(毒氣制御)(下下)]…….
더럽게도 많네.
아니, 안 쓰는 스킬이 대체 몇 개야?
특히 독 계열.
쟤네는 왜 다 따로 있어서 스킬창을 길게 만드냐.
이 외에도 패융과 함께 쓰는 패룡 스킬들이 있긴 한데…….
걔들은 이상하게 등급이 없으니 패스.
스킬창에 숙련도도 표시되지 않은 거로 보아 성장하려면 다른 조건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머지에서 성장시킬 걸 정해야 하는데…….
“흠.”
당기는 게 몇 개 있긴 하네.
일단 상급 내에서 하급의 스킬이 중급으로 올라가거나 중급의 스킬이 상급으로 올라가는 게 가능하다면.
‘당연히 영혼지체를 올리는 건데.’
그게 될까?
짧은 고민 후, 이내 손을 움직인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영혼지체를 눌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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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강화권] 사용이 불가능한 스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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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역시!”
그렇지! 여태까지 너무 꿀을 빨았지!
여태까지 뭐 얻은 것들로 착착 성장했으니, 여기서 이걸 올리는 건 너무 날로 먹는 꿈이긴 하지.
아쉽지만 中上을 상급으로 올리는 걸로 조건을 잡아야겠네.
그렇다면 후보는…… [불굴(不屈)(中上)] 하나인가?
음, 좋은 스킬이긴 한데…….
“굳이?”
[부동심(不動心)(上中)]이 있는데?
굳이 얘를 올릴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성장시켜야겠네.’
中中에 머무르고 있는 스킬을 스킬 강화권을 써서 中上으로 올리는 게 최선으로 보인다.
후보는 [패령안(覇靈眼)(中中)], [회복(回復)(中中)], [빙의(憑依)(中中)] 이 셋으로 하자.
[영각(靈覺)(中中)]도 괜찮긴 한데, 얘는 요즘 너무 안 쓰니까 패스.
이 셋 중에 가장 먼저 성장한 녀석을 상급으로 만들자.
결정을 내린 설천위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일단, 자자.
* * *
“고생했군.”
“죄송합니다.”
“무승부 때문에 사죄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설천위 일파의 훈련장.
친선전에 나갔던 이들 전부가 모인 곳에서 팽후는 고개를 숙이는 유예린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얘기는 충분히 전해 들었네. 무승부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좋은 성과야.”
단체전은 이겼고, 개인전에서도 승이 더 많다.
거기에다 예상치 못한 괴한들의 습격에 민간인을 전부 지켜 낸 공적까지.
훌륭하다고 칭찬해 줘도 부족할 지경이니 사죄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웃으며 학생 하나하나를 바라본 팽후는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고생한 학생들에게 주는 약소한 선물이네.”
웃으며 유예린에게 주머니를 넘긴 팽후는 고개를 갸웃하는 잠룡대를 보고 웃었다.
“자네들은 대주가 말해 주지 않던가?”
“대주가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향하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 안 했어요. 거, 나름 정파의 새싹들이 욕망을 원동력으로 싸우면 안 되죠.”
“흐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지.”
설천위의 능청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보고 놀라는 유예린을 보고 웃었다.
“팽가에서 준비한 영약이다. 각자 하나씩 나눠 섭취하도록.”
“여, 영약이요?”
“이 인원한테요?”
스물이 넘는데?
아무리 팽가가 부자라곤 해도 이만한 숫자의 영약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모두가 당황할 때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유예린을 보며 팽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쓸데없는 겉치레가 없어서 좋군.”
“어른께서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게 예의라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영약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유예린을 바라보다가 가장 먼저 영약을 받은 설천위에게 물었다.
“너는 황실에서도 받아 놓고 또 받는 거냐?”
“예? 제 건 없어요?”
“있다.”
“그럼 받아야죠. 몸이 얼마나 허해졌는데.”
오는 길에 열심히 먹어서 회복하긴 했지만, 영약이란 것이 다다익선 아닌가?
거기에다 혹시 몰라서 아직 섭취하지 않은 황실의 남은 영약을 먹을 때 탈이라도 나면 먹어야 하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히히 웃으며 영약을 챙긴 설천위를 바라보던 팽후는 피식 웃었다.
“참, 천재 녀석들의 공통점이로구나.”
“예? 뭐가요?”
“뻔뻔하다는 거.”
남궁선, 그 아이도 이리 뻔뻔했지.
예의가 없진 않았으나, 남들이 예의라고 착각하는 것을 당당히 깨부쉈다.
예(禮)란 상대에 대한 존경과 배려에서 나오는 것.
상대를 향한 존경과 배려를 기본으로 말하고 행동하니, 상대의 기분을 해하지 않는다.
뻔뻔하고 능청스러워도 예(禮)를 지키는 것.
그게 어쩌면 똑똑한 녀석들의 공통점일지도.
고개를 갸웃하는 설천위를 가만히 바라본 팽후는 어느새 영약을 손에 쥐고 눈을 빛내고 있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길게 말하면, 말하는 도중에 영약을 먹을 기세로군.
“그럼 남은 본론을 짧게 말하고 나는 가도록 하지.”
고개를 돌린 팽후는 또 왜 보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를 보고 웃었다.
“오늘부로 설천위를 을(乙)로 승격시킨다. 이상!”
* * *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의 친선전 소식은 무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까지 전부.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분노했으며.
누군가는 의아해했고.
누군가는 슬퍼했다.
무림맹에선 본격적으로 무력대가 외부로 돌기 시작했다.
명목은 숨어서 민초를 괴롭히는 음지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
혈교, 혈사련 등등 여태껏 쉬쉬하던 이들을 대놓고 표적으로 삼아 추적을 시작했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하게도 사파 또한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자신들의 이름에 먹칠을 한 놈들을 붙잡겠다며, 사파도 무림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혈교와 혈사련의 잔당들이 붙잡혔고.
날뛰는 무력대에 휘말린 중소 문파의 앓는 소리가 무림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지방 곳곳으로 내려가 협력을 요구하는 이들이 친절하면 얼마나 친절하고, 그들이 돈을 주면 얼마나 주겠는가?
큰 세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들의 일탈이 무림 곳곳으로 퍼져 나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따라 움직인 이들이 또 있었으니.
황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황실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림맹이나 사천맹처럼 대놓고 병력을 움직이진 않았으나 중원 곳곳에 사람을 뿌려 수상한 자들을 찾아냈다.
말이 수상한 자들이지, 그 기준이 뚜렷한 것이 아닌지라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붙잡혀 들어갔다.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
전 중원에서 전란(戰亂)보단 심하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 혼란 속에서 무림맹과 사천맹은 더욱 바빠졌고.
사파와 정파의 충돌은 더욱 잦아졌다.
긴장감이 무림 전체를 뒤덮고 있던 그때.
시간은 그 긴장감을 견뎌 내지 못한 듯 빠르게 흘러갔고,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졸업.
충분히 수학(修學)한 자들이 드디어 갈고닦은 것을 사용할 수 있는 무대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흐음.”
사천맹.
정문을 지나 들어선 여인은 한 호흡을 들이마시며 웃었다.
“나쁘지 않아.”
기이한 긴장감.
그날 사천맹에 방문했을 땐 느껴 보지 못했던 혼란의 냄새.
더불어 느껴지는, 그때와 같은 견제의 시선.
아니.
“시기인가?”
고개를 갸웃한 백유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사천맹 내부를 걸었다.
미리 도착지를 정해 놓은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리 오너라!!”
웬 훈련장의 정문을 발로 차서 열어 버린 백유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한껏 느끼곤 웃었다.
“여기가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하다는 흑사대(黑蛇隊)가 맞아?”
“……뭐 하는 년이냐?”
분노보단 어이가 없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내의 표정에 백유는 빙긋 웃었다.
“지금부터 너희의 대빵이 될 사람.”
빡!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사내가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시작되는 전투.
온갖 고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지고.
“아이 참! 좀 천천히 가자니까!”
백유의 뒤를 겨우 따라잡은 여미려가 거친 숨과 함께 빠르게 정리되는 흑사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시작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뭐, 뱀이니까 용이 되기 좀 더 낫지 않겠냐고?
그럼 뭐, 땅꾼의 다른 이름이 용잡이인가?
백유의 억지에 한숨을 내쉬며 쓰러진 이들을 하나씩 끌고 와 곱게 눕혀 상태를 살피기 시작한 여미려는 자신도 모르게 청명한 하늘을 올려봤다.
“……그 녀석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유예린, 그 여자도 졸업한다던데.
설천위, 걔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