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247화-결판 (3)
“하핫! 역시 떡잎부터 다르더니만.”
비무대에서 꽤나 떨어진 나무 위.
팔다리가 잘린 언여휘의 인형을 옆에 앉힌 채 비무를 구경하던 살존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응, 잘 따라 하네.”
자신의 수월(水月)을 저리도 잘 따라 하는 후배를 발견했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것이 몇 번 보고 따라 한 것이라면 더더욱 기껍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아직 무기를 숨기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네.”
물론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발차기를 사용한 선택은 좋았다.
애초에 무기까지 수월의 영역에 넣는 게 쉬울 리가 없으니까.
자신도 몇 년 고민해서 완성해 낸 수법이지 않은가.
보고 단박에 전부 따라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물론, 저만큼이라도 따라 했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히히, 괴물이네?”
“너만 하겠니?”
옆에서 웃는 언여휘의 인형 이마에 비수를 박아 넣은 살존은 다시 관전에 집중했다.
솔직히 흥미롭다.
원래라면 이런 종류의 대련은 백유라는 저 아이가 더 유리한 것이 맞다.
은(隱)의 묘리가 주력인 유예린에게 친선 비무는 제약이 너무 많으니까.
한데, 그것을 자신의 기예를 익히는 것으로 극복해 냈다.
단순한 암경(暗勁)이 아니라, 하나의 무(武)로서 은(隱)을 펼쳐 냈다.
이기기 위해 공격을 숨긴 치졸한 수가 아니라, 갈고닦아 극에 이른 하나의 무(武)라고.
그리 주장하는 것이다.
저만한 기예를 보여 주는데, 그것이 치졸한 수라고 몰아갈 수 있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상황으로 인해 생기는 불균형을 이런 식으로 극복해 내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꼰 채 팔로 턱을 괸 살존의 눈이 흥미진진하게 비무대 위를 향하고.
그때, 백유가 먼저 땅을 박찼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거침없이 휘두르는 주먹이 유예린의 머리를 노린다.
허나 흩어진다.
호수에 비친 달처럼 닿지 않고 사라진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은(隱)의 극치.
단순히 빨라서 잔상이 남은 것이 아니었다.
원래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져 눈이 자신도 모르게 남아 있는 허상을 좇은 것이다.
기척은 물론이고 호흡,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와 진동 등등.
모든 것을 극한으로 흐트러트린, 그야말로 은신의 극(極).
물론, 아직은 조금 미흡하기에 볼 수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최소한 지금 저 자리에 서 있는 백유의 눈엔 보이지 않는 게 확실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유예린의 승리를 점쳤다.
상황이 이렇게 기울어지면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쯧.”
가볍게 혀를 차는 설천위의 모습에 그리 생각하던 이들은 미간을 찡그렸다.
유예린이 유리하면 설천위가 혀를 찰 리가 없을 테니까.
아무리 백유랑 친하다곤 해도 일단 그가 응원할 대상은 유예린이 아닌가.
그렇기에 의아함을 품은 이들이 미간을 찡그린 그 순간.
쾅!!
강렬한 폭음이 그들의 정신을 깨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고작 이 정도로 유리해지지 않는다고.
그리 말하는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이 사방을 뒤흔든다.
“벼락보다 느리다면 닿을 수 있지!”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흥에 차 외치는 백유의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그녀의 주먹에 발차기가 막힌 유예린은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군요.”
“뇌명(雷鳴)이니까!”
은신이 풀리는 공격의 순간.
그 찰나의 반응으로 방어에 성공했다.
첫 일격을 막아 냈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방어.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게 고작이군요.’
은신으로 공격권을 가져올 순 있으나, 그 공격이 유효타로 이어지긴 힘들다는 뜻이다.
반대로, 백유 또한 공격의 주도권을 쥘 수 없으니 확실한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황.
서로가 서로의 수에 맞물려 버린 상황이다.
몸 상태를 생각하면.
아니, 후에 만나 싸울 수도 있는 관계란 것을 생각하면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다.
이렇게 구경꾼이 많은 곳에서 서로의 수를 완전히 드러내는 건 우책(愚策)이니까.
허나.
“간다!”
“오세요.”
아쉽게도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꺾는다!’
‘꺾어 드리죠!’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며 다시금 격돌하는 두 사람.
백유의 공격을 유예린이 은신으로 피하고.
빈틈을 찌르는 공격을 백유가 막아 내고.
그 틈을 파고드는 반격을 유예린이 피해 내고.
은신으로 사라져 또다시 공격의 기회를 붙잡고.
마치 미리 합이라도 맞춰 놓은 것처럼 연속적인 공방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일견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미모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공방에 담긴 무학이 너무나도 깊고 넓기에 느껴지는 아름다움.
“허어.”
“아미타불…….”
소국과 무진마저 감탄하며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변화가 찾아왔다.
물론, 그 이유마저 갑자기 찾아온 건 아니었다.
백유는 유예린과의 공방에서 더더욱 선명하게 뇌기(雷氣)를 느꼈다.
은신으로 드러나는 유예린에게 일순간 반응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단숨에 뇌기를 옮겨 반격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몸에 흐르는 뇌기는 용과 같이 그 전신을 휘감았고,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백유의 의지 아래 들어갔다.
손끝에 흐르는 한 줌의 뇌기조차 온전하게 다룰 수 있게 됐을 때.
백유에게 갑자기 변화가 찾아왔다.
이는 유예린도 마찬가지였다.
거듭되는 백유와의 공방으로 더더욱 선명하게 은(隱)의 묘리를 깨달았다.
숨는 묘리를 선명하게 깨달았다는 것은 꽤 묘한 말이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선명하게 숨을 수 있게 됐다.
단숨에 사라지고.
단숨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숨기는 것에서.
검을 숨기는 것까지.
은신은 더더욱 완벽해졌고, 깊어졌으며, 넓어졌다.
그때, 유예린에게도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하게도 두 사람에게 변화가 찾아온 시점은 놀랍도록 일치해서.
“흡!”
그 변화는 단숨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뇌기를 두른 백유의 몸이 사라진다.
유예린과 같은 은(隱)의 묘리가 아니다.
단순히 너무 빨리 눈앞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파직파직.
그녀가 지나친 자리에 남은 뇌기가 바닥을 그을리고.
“허어!”
“이게 무슨?”
그 빈자리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백유도, 유예린도.
싸우던 이들이 사라진 텅 빈 비무대의 위.
백유가 남긴 뇌기만이 비무대 위에서 일렁이는 그 순간.
강렬한 폭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강력한 폭음.
모두가 귀를 막을 때, 천마의 조언에 따라 내공으로 귀를 보호하던 설천위와 그 일파는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봤다.
공중에서 떨어진 백유가 비무대 구석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더니 그곳에 나타난 유예린의 발차기가 허공에서 떨어진 백유의 주먹과 충돌했다.
바닥에 뿌린 뇌기가 유예린이 갈 자리를 제한해 운신의 폭을 좁히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유예린이 백유의 몰이에 당한 것이다.
유예린의 열세가 예상되는 그 순간.
발차기를 내지른 유예린의 소매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백유의 어깨를 노린 일격.
정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말도 안 되는 동작에서 튀어나온 소검(小劍).
그 소검이 백유의 어깨를 꿰뚫으려는 순간.
백유의 몸에 휘감은 뇌기가 그 소검을 막아 냈다.
말도 안 되는 동작에서 튀어나왔기에 위력이 다소 부족한 소검은 쉽사리 튕겨 나왔고…….
“후.”
두 번째 검이 그 소검을 때렸다.
[암은검(暗隱劍) 오의(奧義) 암음(暗音)].
검과 검이 부딪혀 울려 퍼지는 소리가 백유를 덮친다.
그 즉시, 몸을 비튼 백유의 몸에서 강렬한 뇌기가 터져 나온다.
몸을 파고드는 유예린의 음공을 튕겨 내기 위한 방어.
동시에.
[뇌명(雷鳴)].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섬뜩함을 품은 백유의 주먹이 허공에 모인 유예린의 검 위를 때렸다.
그야말로 찰나에 일어난, 말도 안 되는 공방.
쾅!!
강렬한 폭발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튕겨 나온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자세를 고친 백유가 착지하고, 몇 걸음이나 밀려난 유예린이 자세를 다잡는다.
지이잉.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해 떨리는 검을 한 차례 휘둘러서 남은 기세를 털어 낸 유예린은 담담한 눈동자로 백유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백유 또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 여파를 털어 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
눈이 서로 마주친 두 사람이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그 순간.
“그만!!”
“그만!!”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로 올라온 형왕과 설천위가 서로를 바라봤다.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짧게 흘러가고.
“흠, 내가 먼저 하지.”
“예, 그러시죠.”
설천위가 한 걸음 물러서자, 형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도 기세를 가라앉히지 못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 이상의 비무는 허락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비무는 무승부로 하겠다.”
“…….”
“…….”
침묵.
그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형왕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저리도 서로 결착을 짓고 싶어 하는데 왜 굳이?
딱 봐도 죽을 정도는 아니…….
“회장님!”
흑룡학관에서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챈 여미려가 비무대 위로 달려갔다.
아니, 여태까지 왜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상처가 얼마나 벌어진 거예요!”
백유의 복부.
흥건하게 배어 나온 피에 의복이 축축하게 젖은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유예린도 마찬가지.
그제야 두 사람의 격렬한 싸움에 빠져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가면 결착이 나기도 전에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으니.
말리는 게 당연했다.
여미려가 비무대 위로 올라가자, 미간을 찡그린 백유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리고.
“아직…….”
“안 돼요!”
입술이 붉다.
입안에 머금은 피를 삼켰다는 증거.
왜 형왕의 결정에 바로 반발하지 않은 것인지 이제 알겠다.
그땐 도저히 삼킬 수가 없어서 피를 입에 머금고 있었구나.
거침없이 백유의 어깨를 찰싹 때린 여미려가 백유를 챙기는 사이.
“……저도.”
“씁.”
마찬가지로 입술이 붉은 유예린을 향해 눈을 부라린 설천위는 뒤이어 비무대 위로 올라온 서하영에게 유예린을 맡겼다.
그리고.
“이거 발라 줘.”
“아, 고마워요.”
“실력 좋은 신의가 만든 약이라 잘 들을 거야.”
여미려에게 신의의 특제 약을 넘겨주곤 비무대 위에 섰다.
백유와 유예린은 각자 학관에서 올라온 이들이 데려간 상황.
텅 빈 비무대 위에 서서 설천위는 형왕을 바라봤다.
“끝내도 될 것 같습니다.”
“음.”
별다른 말 없이, 빠르게 정리된 상황에 고개를 끄덕인 형왕은 몸을 돌려 별로 남지 않은 구경꾼들을 향해 선언했다.
“이로써 무림학관 대 흑룡학관! 흑룡학관 대 무림학관의 친선 비무를 종료한다!!”
무승부.
최종적으로 벌어진 대표전의 무승부로, 두 학관의 친선전이 드디어 끝이 났다.
* * *
“왜 보러 안 가셨어요?”
“뭘 말이냐?”
“친선전이요.”
“그러는 너는?”
“저야 뭐 창천단장이라 어쩔 수 없었죠.”
“아직도 단장이라 칭하고 다니는 거냐?”
“에이, 아직 한참 멀었죠.”
겸손한 말과 달리 한껏 여유로운 자세로 차를 마시는 남궁선의 모습에 팽후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둘 다 찾아갔다간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뭐, 그건 그렇죠.”
귀여운 후배들의 싸움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지.
사천맹.
현 맹주는 꽤나 이성적이고 선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래는 그렇지 않다.
애초에 맹주가 강제로 굴복시켜 모은 이들이 지금의 사천맹이다.
사존(邪尊)이라는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진 모래성이란 소리다.
이쪽에서 괜히 찾아갔다가 그걸 빌미로 삼아 저쪽에서 시비를 걸어올 테니 어쩔 수가 없었다.
후배들의 싸움 구경을 하겠다고 전쟁을 불사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지.
“잘들 하고 있으려나?”
“듣자 하니 언여휘가 습격했다고 하더구나.”
“뭐, 그럼 천위가 알아서 막았겠네요.”
“그렇다고 하더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남궁선의 맞은편에 앉은 팽후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찌 됐느냐?”
분위기가 바뀐 팽후.
그 시선에 자세를 고친 남궁선은 찻잔을 내려놓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대답했다.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짧으면 일 년 안에.”
무림이 흔들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