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246화-결판 (2)
사천맹의 가장 높은 건물.
그 정점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맹주의 뒤에서 허원창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맹주님.”
“뭐냐?”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맹주였으나, 허원창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깊게 숙였다.
“친선전을 습격한 무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망자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전무하다고?”
전무(全無).
아무도 없다는 뜻의 말을 듣고 드디어 맹주는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는 것에 맞춰서 천천히 고개를 든 허원창은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를 맹주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습격한 자는 혈혼귀(血魂鬼) 언여휘.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분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술사인가.”
고개를 끄덕인 맹주 구령학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안에는 단체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적혀 있었다.
우락부락한 성격과 달리 깔끔한 글씨로 야귀단주가 직접 써서 올린 보고서.
그 내용을 전부 훑어본 구령학은 두루마리를 허원창에게 다시 던졌다.
“그놈이 괴물이 되긴 했군.”
“설천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구령학은 입꼬리를 비틀며 창밖을 바라봤다.
밝게 떠 있는 달.
저 달이 자신은 참 좋다.
은은한 달빛은 세상의 많은 것을 비추는 듯하면서도 정작 그렇지 않았다.
달빛에 의존해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자신의 주변뿐.
저 멀리 있는 또 다른 진실은 보지 못한다.
결국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발밑만을 보고 걸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결국 본성을 드러내는 법.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야기된 불안감은 마음의 여유를 없애고.
여유를 잃은 채 미약한 빛에 의존하게 되면 본심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자신은 저 달빛이 좋다.
인간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저 달빛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기에 자신은 항상 달빛과 같이 사람을 바라본다.
상대를 압박하여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차단하고, 그 본심을 끌어낸다.
뭐,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스스로 긴장해서 바로 본심을 드러내지만 말이다.
‘사파의 놈들조차 믿고 따르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 그래……. 당신처럼.’
그날, 자신의 기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당돌하게 대답하던 백유.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무공을 전수했다.
그런데, 사실 그때 가장 눈길이 갔던 건 구석에 처박혀 열심히 꼬치를 뜯고 있던 놈이었다.
자신의 기세에 눌려 다른 놈들은 고개를 땅에 처박고, 목숨조차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백유가 본심을 드러내게 만드는 그 기세 속에서.
“그 미친 녀석은 꼬치를 뜯고 있었지.”
“예?”
“아무것도 아니다.”
되묻는 허원창을 쓱 보곤 고개를 저은 구령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고엔 곤괴도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냥 둬라.”
“추가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필요 없다. 소국 녀석도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곤괴도 있는 것 같고, 그 괴물 놈도 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터.
자신과 같은 오존급의 인물이 나서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다.
무림맹주 놈은 정치를 생각해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고.
설가의 그 미친놈은 가문을 지키고 있을 테니 남은 건 불존과 살존뿐.
불존도 뭐, 문파나 지키고 있을 테고.
살존은…….
‘최근 다시 살행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 같던데.’
설천위의 목에 만 냥이 걸려 있긴 하지만, 돈 때문에 움직일 위인은 아니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리고 친선전은 아마 흑룡학관의 패배로 끝날 터.
“친선전이 끝나면, 흑룡학관의 학생들은 전원 야귀단과 함께 맹으로 복귀하라고 전하도록.”
상벌은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겠지.
* * *
뇌명(雷鳴)이 비무대 위를 뒤흔든다.
일순, 시야를 가리는 번뜩임에 구경꾼들은 눈을 찡그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팔로 눈을 가렸다.
그대로 보고 있으면, 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섬광.
허나, 안력이 약한 이들과 달리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성무경은 자신이 본 광경에 드물게 감탄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섬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놀라운 속도로 파고든 백유의 주먹에 뇌전이 휘감겼다.
그 팔을 타고 흐르는 뇌전은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무차별적으로 비무대를 부수고 지졌다.
단숨에 비무대 곳곳에 그을린 자국과 함께 창이 박힌 것 같은 구멍이 난 상황.
단순히 여파만으로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내다니.
그 위력이 어떨지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능히 알 것 같았다.
그런 주먹이 거대한 용의 포효와 같은 일격으로 유예린을 덮쳤다.
그런데.
“괴물이로군.”
그조차 받아 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양손에 쥔 검으로 그 포효를 베어 냈다.
은검(隱劍)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으로 봐서 직접적인 전투 능력은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터무니없는 생각이었군.’
싸운다면 승률은 4할? 아니, 3할은 될까?
생사투에서 모든 걸 끄집어낸다고 해도 4할.
목숨을 걸기엔 썩 좋지 않은 확률이다.
무엇보다.
‘4할도 너무 넉넉하게 잡았군.’
지금 유예린은 은검(隱劍)이라는 별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봐라.
백유의 주먹에서 뻗어 나온 권기를 베어 내고도 담담하게 검을 휘두르며 맞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어디에도 숨는 모습 따윈 없다.
친선 비무인 만큼 암경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자신의 특기가 죄다 막힌 상황일 텐데.
성무경이 감탄하는 사이, 그 전투의 중심에 선 백유는 웃고 있었다.
“하핫!”
흥이 가라앉지 않는다.
싸워 보니 알겠다.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갈고닦아야 할지.
뻗어 나가는 권기가 상당히 약해진다.
아무리 상대가 유예린이라고 하지만, 너무 간단히 베여 사라졌다.
주먹에 직접 두른 뇌기는 멀쩡하지만, 뻗어 나간 뇌기가 이리 간단히 파훼를 당해서야 공격의 다양성이 너무 없다.
거기에다.
“꺄핫!”
코앞을 스치는 유예린의 검에 살짝 허리를 당겨 그것을 피해 낸 백유는 웃음소리와 함께 허리에 힘을 더했다.
뇌전의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해 움직임이 너무 단순하다.
궤적을 읽어 낸 유예린이 당연하다는 듯 검을 뻗은 것이 그 증거였다.
마지막에 반응해 피하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더라면 베이고 말았겠지.
“나쁘지 않아.”
입술을 혀로 핥으며 백유는 허리를 숙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파고든 유예린이 검을 내리쳤지만, 그대로 전진했다.
역으로 파고들어 검날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이대로 검을 쥔 유예린의 손을 쳐 내 공격을 끊어 내자.
검을 놓치게 할 순 없어도 공격의 흐름을 끊어 낼 순 있다.
그러고 나면, 부족했던 점을 고쳐 다시 공격…….
“단순하군요.”
유예린의 검을 어깨로 넘기고 파고든 그 순간, 자신을 내려보는 유예린과 두 눈이 마주친 백유는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기보다는 막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키이이이이잉!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과 함께 기와 기가 충돌하는 섬뜩한 소음이 사방을 채운다.
그리고 조금 늦게 상황을 정확히 인지한 백유는 자신의 손에 부딪힌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곤 헛웃음을 지었다.
“비수?”
“저라고 쓰지 말란 법은 없죠.”
왼손 소매에서 뻗어 나온 비수가 끝내 백유의 방어에 막혀 힘을 잃고 물러선다.
비수를 거두며 유예린은 담담하게 백유를 바라봤다.
“강하군요.”
“당연한 말을.”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백유의 모습에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자신감을 드러낼 만한 실력이다.
지금도 백유의 공격을 쳐 낸 손이 그 충격으로 저릿저릿하니까.
다만, 아쉬운 점은.
“저와 상성이 좋을 것 같진 않군요.”
“하! 그건 대봐야 알 일이지!”
유예린의 도발 아닌 도발에 코웃음을 친 백유가 다시금 땅을 박찬다.
워낙 가까웠던 터라 단숨에 거리가 좁혀진 상황.
검을 쓰는 유예린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방이 시작된다.
허나.
“인정하긴 싫지만, 살존은 강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화가 솟구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 높고도 거대한 벽은 자신이 당장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절망이다.
허나.
그 절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다.
그렇기에 벽을 오르려고 했고.
그렇기에 절망에 맞서 발악하고자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배운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아니 앞서 걸어간 인간.
그 눈에 담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등을 목도한 순간.
유예린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음을.
그것은 절망이고, 고통이었으나.
참으로 묘하게도 유예린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자신보다 먼저 태어나 무(武)를 갈고닦았던 형제들이 그러했고.
아버지가 그러했다.
허나, 뛰어넘었다.
절망 속에서 내밀어진 하나의 손을 잡고, 그 절망을 짓밟았다.
몰아치는 백유의 공격을 막아 내며 유예린은 그 순간의 절망을 떠올렸다.
흘러나오는 뇌기에 몸 곳곳이 저릿저릿해진다.
검을 쥔 손도 조금 근육이 떨리는 느낌.
허나.
“선명해지는군요.”
뇌기의 고통이 그때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보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순간을.
어떻게든 반응했으나, 끝내 지키지 못했던 순간을.
그렇기에 익혔다.
그 순간을 만들어 냈던 적의 기예를.
위태롭게 백유의 공격을 받아 내는 유예린의 몸이 일렁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흡?”
자신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을 깨달은 백유는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인지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헛손질.
치열한 공방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쾅!!
팔을 모으고 옆구리를 가린 순간, 강렬한 충격이 백유의 몸을 날려 버린다.
여태까지의 은밀하고 날카로웠던 유예린의 공격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강력한 충격.
순식간에 몇 걸음 정도의 거리로 밀려난 백유는 얼얼한 팔의 감각에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짧은 의문.
그 의문에 검이 아닌, 발차기로 백유를 날려 보냈던 유예린은 흐트러진 옷을 툭툭 털어 매무새를 다듬으며 대답했다.
“숨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며칠 전에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며칠 전에 눈으로 봤다.
그 말도 안 되는 설명에 백유는 미간을 찡그렸고, 구경하던 이들 또한 황당함에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간신히 삼켰다.
며칠 전에 저런 기예를 보인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저 말의 의미는 딱 하나다.
보고 배웠다.
그날의 전투로, 살존이 보여 준 그 기예를 보고 배웠다는 소리다.
살존이 몇 번 쓰지도 않았던 그 은신술을.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 기적 같은 기예를.
“재능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모두가 당황해하던 그때, 홀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육포를 뜯었다.
이미 말리긴 늦었으니 구경이라도 제대로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육포를 씹으며 설천위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왜 그리들 놀라? 저 나이에 초절정에 오르는 게 쉬워 보이나? 살존 정도의 기술을 보면 작은 깨달음 정도는 얻을 수도 있지.”
[흠흠, 자신은 못 하면서 남들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 참으로 이해심이 깊구나.]
[너였다면 우리들이 직접 친절히 설명해 주면서 시범을 보여 줘도 못 얻었을 깨달음이거늘…….]
아니, 이 양반들이?
왜 당신들이 한탄해?
옆구리를 살살 긁는 혼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설천위는 대충 귀를 닫았다.
괜히 반응하면 놀림만 더 심해지지.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본 설천위는 어느새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두 사람 다 멀쩡하지만 언제 상처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설천위는 가만히 비무를 지켜봤다.
그리고.
쾅!
전투는 설천위의 바람대로 막바지를 향해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