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245화-결판 (1)
“……천마(天魔).”
자신이 느낀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은 살존은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목숨 빚을 진 것은 나로구나.”
저런 괴물을 품고 있었구나.
그 자리에서 단 일격이라도 저 괴물이 손을 썼다면…….
“뭐, 대충 증명은 됐죠?”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는 설천위의 물음에 살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천위에게 패를 하나 던진 살존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든 한 번 의뢰를 받아들여 주마.”
살(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은패.
무려 살존의 명패(名牌)다.
어떤 부탁이라도 한 가지 살존에게 할 수 있는.
하지만 정작 그 패를 받은 설천위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에, 이런 거 필요 없는데.”
“……필요 없어?”
“그럼요. 뭐 원수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살인 청부 의뢰를 넣어서 뭐해요?”
아니, 너랑 원수진 사람은 많은 것 같던데?
어처구니없는 설천위의 대답에 살존이 허탈하게 웃는 순간.
패를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은 설천위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의뢰 말고 부탁이나 들어주세요. 나름 귀여운 후배이니 그 정돈 해 줄 수 있잖아요?”
“소가 놈에겐 무슨 후배냐고 아저씨라고 불렀던 녀석이 말은 잘하는구나.”
“……그때 근처에 있었어요?”
“물론이다.”
피식 웃으며 설천위가 내민 패를 다시 회수한 살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마.”
“너무 늦진 마시고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살존의 빈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뭐, 살존은 이 정도면 됐지.
가끔 흑화해서 중간 보스가 되는 인물이긴 하지만, 길만 틀어지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중립이다.
호흡만 잘 맞추면 아군으로 돌아설 수도 있고.
적의 뒤를 언제든지 찌를 수 있는 암살자는 전략적인 면에서는 사기나 다름없는 패다.
은(隱)의 궁극.
그 경지에 도달한 암살자이니 후에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배에 구멍 한 번 난 것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
유 매나 백유에게 공격한 건 아직 조금 화가 덜 풀렸지만.
그건 뭐, 나중에 친해지고 풀면 되지.
안 죽이고 살려 준 게 어디야.
살존이 죽일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기도 하고.
아니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천마 할배를 불러냈겠지.
[꽤나 무리가 가는구나.]
“아무래도 그러네요.”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곤 하나, 상처는 거의 다 치유됐는데 잠깐 빙의한 것만으로 몸이 삐걱거린다.
최선의 몸 상태로도 일격 정도가 한계인가.
웬만한 상대면 그 일격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끝나고 움직일 수 없다면 쓸 수 있는 방식이 상당히 한정되는데.
“역시 천마 할배는 좀 더 아껴야겠어요.”
[음, 내가 생각해도 무리가 있구나.]
천마의 긍정에 설천위는 자리에 누운 채 그를 바라봤다.
옛날에는 막연하게 현경의 끝자락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던 천마 할배의 경지.
최근 성장하면서 느낄 수 있게 됐다.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고.
생전에는 진정 천마(天魔)라는 별호를 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괴물이었음을.
그렇기에 궁금했다.
천마 할배는 내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박치기의 후유증으로 개안한 영안(靈眼) 덕에 만나게 된 천마(天魔).
정파 무림의 새싹들이 자라는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자꾸 천마를 향하는 눈동자를 숨기기 위해 눈을 감은 설천위는 이내 천천히 잠에 빠져들어 갔다.
살존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중간에 깼던지라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잠이 솔솔…….
“천위!”
“엉?”
뻐근한 몸이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뿌옇던 시야가 몇 번의 깜빡임으로 선명해지고, 이내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한 설천위는 한껏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잠들었는데, 또 왜?”
“방금은 무슨, 대낮이다. 천위.”
“……진짜네?”
헛웃음을 짓는 철백의 뒤로 보이는 문에서 들어온 햇빛에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왜 불렀어?”
“음, 일이 조금 복잡해져서 말이야.”
“복잡해져?”
“형왕께서 친선전의 중지를 선언했네. 자네가 쉬는 사이에 적수단과 야귀단의 동의도 얻은 모양이야.”
음.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단체전처럼 결과적으로 문제없이 끝난 게 아니니까.
폭탄 테러야 막았지만, 학생들 중 중상자가 셋이나 나왔다.
나를 뺀 둘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중상은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경상도 아니지.
중지야 당연한 수순인데…….
“복잡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데?”
“그게…… 각 학관의 대표가 반대하고 나섰다.”
“응?”
“결착을 짓지 않고 헤어지면, 후에 만났을 때 시원하지 않다는 게 이유라더군.”
아니, 잠깐.
“각 학관의 대표?”
대표라면…….
“흑룡학관이야 당연히 백유일 거고, 우리는?”
“당연히 유 소저다.”
“……왜?”
아니, 유 매가 대표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대체 왜 반대하는데?
……그러고 보니 원래라면 누구보다 빨리 와서 내 상태를 확인했을 텐데, 없네?
“왜 반대하는데?”
“천위, 방금 말했다. 후에 만났을 때 시원하지 않은 것이 싫다더군.”
“아니, 그러니까 왜 시원하지 않느냐고?”
패가 더 많은 흑룡학관이면 몰라도 우리는 승이 더 많으니까 당연히…….
[껄껄, 이렇게 보면 그 아이가 이 녀석을 왜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단 말이지.]
[닮은꼴이니 좋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기.
혼들의 대화에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설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학관과 학관 사이에 감정이 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본인들이 찝찝한 게 싫은 거네.”
“응? 무슨 말인가?”
“아니, 둘 다 애라고.”
백유는 그렇다고 쳐도 유예린까지 그럴 줄이야…….
아니, 잠깐.
“설마 둘이서 결판을 짓겠다, 그런 조건을 내건 건…….”
“어떻게 알았나? 대표끼리 붙어서 결착을 짓겠다고 하더군.”
“아오!”
진짜 애네!
배때기에 구멍이 뚫렸는데 대련은 무슨 대련!
살존이 아무리 내장을 빗겨 찔렀다곤 해도 배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싸우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잖아.
“시작은?”
“형왕께서 고민하시자, 아예 지금 당장 하겠다며 비무대로 향했네.”
아니, 진짜.
갑자기 왜들 그러냐.
깊게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대충 맨손 세수를 하고 옷을 걸쳤다.
“뭐 해? 말리러 가야지.”
“말린다고 말려질 분위기가 아니었다만.”
단호한 표정으로 모두의 의견을 끊어 낸 채 비무대로 향하던 유예린의 얼굴을 떠올린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켜보는 게 어떤가?”
“야 씨, 넌 서 소저가 배에 구멍이 뚫리고 싸우러 간다고 하면 안 말릴 거냐?”
“……막겠지?”
“그럼 따라와, 자식아.”
“흠흠.”
설천위의 역지사지 화법에 “서 매는 그럴 일 없을…….”이라고 작게 자신감 없이 중얼거리는 철백을 뒤로한 채 설천위는 달렸다.
기가 허해져 축축 처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달렸다.
비무대가 있는 경기장에 도착하니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지만 억지로 삼킨 설천위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느새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을 지나 무림학관의 자리에 도착하니 어수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대장전에 모두가 당황한 듯했다.
“아미타불, 설 시주 오셨습니까?”
“혜송 스님, 안 말리고 뭐 했어요?”
“흠흠, 제가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인간의 화를 조절하겠다고 조금 타락시켜 놨더니 아주 능글거리는 것만 늘었어.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혜송을 한 차례 쏘아본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서하영을 바라봤다.
자신의 죄를 아는지 뻘쭘한 뒤통수로 그저 먼 산을 바라보는 서하영.
그 뒤통수를 짧게 노려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비무대 위에 선 유예린과 백유.
그리고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작게 고개를 젓고 있는 형왕.
형왕이 무슨 생각으로 친선전을 중지하려고 했는지 뻔하다.
실질적인 부상자도 나왔고, 경기를 속행해 인파가 모였다가 또다시 습격을 당하면 그땐 정말 말도 못 할 치욕이 된다.
그러니 부상자를 핑계로 아예 경기를 멈출 생각이었겠지.
그게 조금은 덜 치욕적이니까.
그런데, 유예린과 백유가 아예 기습적으로 경기를 시작해 버렸다.
적이 미리 일정을 알고 대비할 수는 없는 상황.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형왕이 두 학생의 억지에 어울려 준 이유다.
차라리 두 사람의 대련을 끝으로 결착을 짓고 잘 마무리했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황실의 명예엔 그럭저럭 도움이 될 거다.
문제는.
“싸우다 죽는 이가 나와선 안 되네.”
“예.”
“물론이죠~.”
아니, 너희 기세가 물론이 아닌 기센데?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서로를 노려보는 유예린과 백유를 번갈아 바라본 형왕은 작은 한숨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시작한다.
급하게 몰려든 적수단과 야귀단이 이미 비무대 주위를 철통처럼 지키고 있다.
약간의 귀빈과 운이 좋은,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구경꾼만 있는 상황.
나쁘지 않은 상황이니, 제발 둘 다 무사히 비무가 끝나기만 하면 좋을 것 같다.
형왕의 작은 소망과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고.
설천위가 채 말리기도 전에 시작된 비무에 유예린과 백유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백유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유예린의 평소 전투 방식과는 맞지 않는 저돌적인 돌격.
순식간에 비무대 중앙에서 마주한 두 여인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유예린은 검신이 조금 짧은 검을.
백유는 자신의 두 주먹을.
강렬한 충격은 없었다.
그저 부딪히고 튕겨 나기를 반복한다.
분명 정면에서 내려쳤다고 생각한 유예린의 검이 어느새 백유의 옆구리를 찔렀고.
유예린의 검을 막았다고 생각한 백유의 손이 유예린의 가슴을 찌르고 있을 뿐.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한 방어.
그와 비슷한 공격.
두 가지가 어우러져 유예린과 백유의 공방은 그야말로 무협지 속의 환상적인 공방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미타불.”
“하.”
급하게 달려와 호위를 자처하던 무진과 소국조차 감탄할 정도로.
그 안의 수 싸움이 치열했다.
단순히 수 싸움만 치열한 게 아니었다.
철저하기 그지없는, 완벽한 공방 뒤에 보이는 감정.
“저놈이 참 죄가 많군.”
무림학관의 관중석에서 뻘쭘하게 앉아 있는 설천위를 보며 혀를 찬 소국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위협적인 적은 없어 보인다.
하긴 그만큼 쏟아붓고도 큰 소득이 없었는데 이런 기습적인 경기에 수작을 부릴 여유는 없겠지.
이 경기의 진행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에 납득하면서도 소국은 기세를 펼쳤다.
이 이상 호위가 빗나가 치욕을 당할 순 없었으니까.
소국과 무진이 잔잔하게 기세를 퍼트리며 호위에 집중할 때.
“역시 까다롭네!”
튕겨 나온 주먹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백유가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흑룡학관에선 거의 맛보지 못한 손맛.
언제 베일지 모른다는 긴장감.
그렇기에.
“좋아!”
성장한다.
슬슬 정체기에 들어가고 있던 무공이 단숨에 성장한다.
“예전에 천위가 나한테 약도를 하나 주고 갔었거든!”
학관을 점령한 뒤에 설천위가 준 약도의 정체를 알았다.
흑룡학관 지하에 숨어 있는 창고의 위치.
아마 전대 학관장도 몰랐을 비고(祕庫).
그 안에서 찾은 것들은 꽤나 맛있었다.
덕분에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앞당길 수 있었고.
그렇게 앞당긴 시간은 정체기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 정체기가 지금.
“하핫!”
해소되고 있다.
유예린의 검을 튕겨 내는 손에 묵빛의 기운이 서린다.
동시에, 그녀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다.
[크르르르르르르.]
마치 설천위가 전장에 섰을 때 흘러나오는 소리와 같은 울음소리가 비무대 위에서 퍼져 나간다.
동시에 서서히 천둥이 몰려오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의 공기가 떨린다.
파직, 파직.
묵빛의 기 사이로 흐르는 번뜩임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특한 자들의 하늘을 지배하는 것은 뇌운을 두른 흑룡 아니, 현룡(玄龍)이니.
[뇌명(雷鳴)]
용의 포효가 유예린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