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244화-대체 왜 (4)
조용한 방 안.
침대에 걸쳐 앉은 설천위는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이유가 뭐야?”
“천위, 그걸 우리에게 직접 말하게 하다니 너무 악취미인…….”
“헛소리 마세요.”
몸을 비틀며 묘하게 웃는 백유의 옆구리를 가차 없이 찌른 유예린은 한숨과 함께 설천위를 바라봤다.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음, 뭐 목숨은 붙어 있는 느낌?”
스킬 덕에 상처는 전부 봉합해 놨으니, 솔직히 이제 적당히 먹고 적당히 쉬면 금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순 없으니 적당히 몸을 사려야겠지만.
“상처는 전부 봉합하신 것 같네요.”
“응?”
“숨길 필요 없어요. 공자가 신기한 능력을 발휘한 게 하루 이틀은 아니니까요.”
“천위는 항상 신기했지.”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백유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묘한 매력을 품은 미소.
“그러니 천위, 네 의견이 궁금해.”
“의견?”
“네가 아픈 동안, 우리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거든.”
이야기를 나눠?
백유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설천위는 유예린을 바라봤다.
조금 부끄러운 듯 살짝 시선을 돌린 유예린이 설천위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아는 것을 공유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협력이죠.”
“역시, 생각보다 잘 맞더라고.”
히죽히죽 웃으며 유예린을 바라보는 백유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신기한 점은 그런 백유의 시선에 유예린이 그리 까칠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받아 준다고 해야 하나?
“꽤나 친해졌네?”
“비슷한 사람끼리는 통하는 법이니까.”
“안 비슷해요.”
“튕기기는.”
칼같이 반박하는 유예린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던 백유는 유예린의 손에 찰싹 맞고 튕겨 나온 손을 어루만졌다.
“뭐, 여기까진 우리 사이에 나눈 농담이고, 본론은 아까 말했듯이 천위, 네 의견이 궁금해.”
“그러니까 무슨 의견? 너희끼리 얘기를 나눴는데, 왜 내 의견이 궁금해지는데?”
“천위, 나는 네가 흑룡학관에 와서 나를 도운 이유가 궁금해.”
도운 이유라…….
백유의 말에 설천위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딱히 내 미모에 반한 것 같지도 않고, 별다른 금전적인 이득도 취하지 않았지.”
흑룡학관에서 그 개고생을 하고 설천위가 실질적으로 얻은 이득이 무엇인가.
“거기에다 내가 흑룡학관의 정점에 서게 되면서 흑룡학관의 수준은 최소 한 단계 이상 올라갔지.”
없다.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보는 게 무방할 정도다.
친선전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적의 전력만 올려 줬을 뿐이니까.
그런데도, 설천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들과 함께했다.
백유와 웃으며 함께 밥을 먹고.
그녀의 곁에 모인 이들과 웃으며 술잔을 나눴다.
사파와의 전투로 목숨을 잃을 뻔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천맹의 무력대와 직접 충돌한 경험까지 있는 주제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의문이 예전부터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너를 노린 적, 분명 사파에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를 밀어줬을 리가 없으니까.”
“음.”
확신을 품은 백유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틀렸네.”
침대에 앉은 채 백유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내가 너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건 네가 친구가 되자고 말한 다음부터인 것 같은데?”
“기억하네?”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라서.”
친구가 됐다.
“친구라서 도왔다. 친구라서 함께했다. 그거론 부족하나?”
“…….”
말없이 설천위를 바라보던 백유는 찻잔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아. 금세 친구가 아니게 되겠지만. 천위, 나는 너를 믿겠어.”
“친구가 아니게 된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에이, 다 알면서. 너 은근 많이 알던…….”
“헛소리!”
백유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린 유예린은 잠시 그녀를 노려보다가 이내 손을 치웠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무슨 대화를 한진 모르겠으나, 딱히 그것을 파헤칠 용기가 없는 설천위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흠흠, 그러면 백유, 너는 내가 널 도와준 이유가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그렇지.”
“뭐,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접근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친해지고 나니 바라는 점이 있긴 했다.
“외도(外道)로 가지만 말아 줘. 네가 이끄는 사파는 패도를 걷되 외도만 가지 말아 줬으면 해.”
“……협력하자거나 그런 게 아니고?”
협력?
뭐, 필요하지.
나중에 제대로 싸우다 보면 필요해지는 때가 오긴 온다.
다만.
“외도가 아닌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 만나는 법이니 그건 자연스럽게 이뤄질걸?”
“무슨 땡중처럼 말을 하네, 천위.”
“아니, 돌려서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진짜로 그놈들이 하는 꼴을 보다 보면 자연히 힘을 합칠 수밖에 없어진다.
정사연맹.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 이 말이야.
백유와 친해진 건 우연이고,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제대로 친해졌지만.
이 친선전에서 굳이 술자리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화합을 도모한 건 목적이 있어서다.
옆집의 미운 이웃이라도 웬 강도 살인마한테 죽음을 당하는 꼴은 막아야지.
항상 친할 순 없어도 중요한 날 서로 웃으며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사이는 돼야지.
“사람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만나서 웃을 수 있어.”
“뭐,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백유는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천위, 나는 앞으로 1년 안에 학관을 졸업할 거야.”
“그러고 나면, 후계 경쟁인가?”
“그렇게 되겠지.”
사천맹(邪天盟).
맹(盟)이란 결국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이다.
지금은 사존(邪尊)의 이름값이 너무 강해 하나로 잘 뭉쳐 있지만, 사파는 같은 뜻을 지닌 이들을 찾기가 어려운 곳이다.
배신과 사기를 당하는 놈이 되레 나쁘다고 말하는 곳이니까.
그렇기에 당연히 사천맹이라는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필연적이다.
설령 사존이 자신의 무예를 전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천맹의 후계가 된다는 소리는 아니란 뜻이다.
그러니.
“네가 말한 대로 패도를 걸을 생각이야. 그게 내 성격에도 맞는 것 같고.”
담담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백유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설천위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움찔 자리에서 일어선 유예린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고…….
“무엇보다 나는 너를 믿어.”
“그그랑 이그랑 무순 상간이…….”
거침없이 설천위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마주친 백유는 웃으며 그 볼을 조물딱거렸다.
“한 걸음 더 갔다간 등에 칼 맞을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한참을 설천위의 볼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뗀 백유는 한껏 일그러진 유예린의 눈빛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조금은 솔직해지는 게 좋을걸? 이런 녀석은 밖을 돌아다니다가 뜬금없이 짝을 찾아온다고.”
나처럼.
배에 두 번째 구멍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말을 얼른 삼킨 백유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뜬금없는 행동 뒤에 바람처럼 사라진 백유의 빈자리.
대체 앞의 대화는 무엇이었는가.
몸이 허해서 그런가, 멍하니 그녀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백유에게 의외로 꽃향기가 나네.’
볼에서 나는 그녀 특유의 달콤한 향기에 설천위가 살짝 숨을 들이쉬는 순간.
“바보.”
어느새 그의 양 볼을 붙잡은 유예린이 살짝 볼을 부풀린 채 그를 내려다봤다.
“바보.”
가끔 이상해지는 유예린 또한 한참 동안 설천위의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말없이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유예린.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입을 열었다.
“유 매.”
“……왜요?”
조금 틱틱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되묻는 유예린.
흔히 볼 수 없는 반응에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곁에 있었어.”
곁에 있었다.
며칠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유예린은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봤다.
“바아보.”
살짝 늘어트린 바보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방을 나가는 유예린.
그 모습에 구경하던 혼들이 일제히 혀를 찼다.
[멍청한 놈.]
[그리 살다가 둘 다 놓치는 것이다.]
[하늘이 원망스럽게도 이놈은 그럴 일이 없어 보이지만.]
혼들의 힐책에 멍하니 유예린이 만지던 볼에 손을 댄 설천위는 깜짝 놀랐다.
대체 얼마나 반죽을 했으면 손이 살짝 닿은 것만으로 이리 얼얼하냐.
조용히 [회복]을 발동시킨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뭐, 나쁘진 않네.
일단, 살아남았잖아?
* * *
“음.”
침대에 앉은 설천위는 고민했다.
뭐, 그리 큰 고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소한 고민도 아니지만.
하지만, 고민이란 건 때에 따라 쓸모없는 시간 낭비가 될 때도 있는 법.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다.
“일단, 죽이려고 온 건 아니죠?”
“물론이지.”
좋았으, 일단 첫 번째 고민거리는 해결.
설천위가 작게 주먹을 쥐는 사이, 탁자에 앉아 있던 살존은 담담하게 차를 홀짝였다.
“음, 꽤나 좋은 찻잎을 쓰는구나.”
“제 건 아니고 유 매 거예요.”
“은신의 극을 보고자 하는 그 아이 말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살존은 찻잔을 내려놓곤 설천위를 바라봤다.
늦은 밤, 이 아이를 찾아온 이유가 있으니까.
“미안하구나.”
“됐어요. 일하다 충돌하면 그럴 수도 있죠.”
일하다 충돌하면 그럴 수도 있다.
분명 사업상 충돌하다 보면 여러 불상사가 생기는 법이지만, 등 뒤에서 칼 맞아 죽을 뻔한 인간이 할 만한 소린 아닌데.
어처구니가 없는 설천위의 대답에 피식 웃은 살존은 설천위의 두 눈을 바라봤다.
“네겐 궁금한 게 많구나. 하지만, 이 자리에선 딱 하나만 물어보마.”
설천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살존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정녕 내가 원하는 보수를 지불할 수 있느냐?”
원하는 보수를 지불할 수 있냐.
그 질문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제가 아니라면, 누구도 해내지 못할 테니까요.”
“대답이 되지 않는구나.”
근거를 물어봤지, 자신감을 물어본 게 아니다.
살존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그리 길게 보여 드리진 못하니까 짧게 보고 가세요.”
담담한 한마디와 함께 설천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키이이이잉.
살존이 내뿜은 기세에 단숨에 공간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른다.
아니, 단순히 살존이 내뿜는 기세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다.
설천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살존이 반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간이 비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이 다시 천천히 떠진 순간, 살존은 깨달았다.
자신이 떠날 때쯤 설천위가 했던 보내 주라는 말의 의미를.
때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화경급 고수들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누구?”
짧은 물음을 던지다가 어느새 완전히 떠진 설천위의 두 눈을 마주한 살존은 입을 다물었다.
묻는 것이 의미가 없었기에.
그것은 하늘임과 동시에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였다.
지금의 자신조차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는, 진정한 인외의 벽(壁).
천외천(天外天).
하늘 밖의 하늘.
설천위가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목도한 살존은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어려워하면서도 당당하게 바라보던 녀석.
또 그러면서도 급하게 돌아가던 녀석.
그것이 정녕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그때 두고 온 연인 때문에 그랬던 것인가.
나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구나.
“천마(天魔)…….”
진정한 괴물이 자신의 품 안에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