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243화-대체 왜 (3)
설천위가 운기에 들어가고.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호위를 위해 그의 주위에 자리 잡은 네 고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거라고 설천위가 말했지만, 그 말을 어찌 완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살존은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녀석들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살존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녀에게 의뢰한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
그 녀석들이 공격해 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네 고수는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그들의 부하들도 눈치껏 움직여 경기장 주위를 감쌌다.
철통같은 보안이 이루어지는 사이.
그 보안의 중심에 있는 설천위는 온전히 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싸움에서 목숨을 연명해 줬던 [회복(回復)]을 최대로 운용해 내부 장기를 치료하고.
남는 내공은 따로 움직여 아직 치료가 진행되지 않은 장기들을 보살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내상으로 손상을 입은 혈도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영약을 먹었다.
약 기운이 혈도를 보호해 주고, 내공과는 다른 약의 힘이 치료를 도울 테니까.
실제로 지금 혈도를 보호해 주고, 내부 출혈을 잡아 주는 약의 힘 덕분에 치료가 한결 쉬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더럽네.’
그 약 기운에 섞인 무언가다.
확실하게 속이기 위해 진짜 약에 한 줌을 섞어 놓은 무언가가 몸속으로 스며든다.
그것은 지금 당장 거슬리진 않는다.
애초에 거슬릴 게 없는 기운이니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미리 준비하고 예상하고 있지 않았다면, 설천위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기운.
영력(靈力)이다.
아마 어떤 주술의 흔적일 거다.
쌓이고 모이다 보면 힘을 발휘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겠지.
그렇기에 설천위는 고민했다.
지금 이것을 걷어 낼 것인가.
나중에 걷어 낼 것인가.
신의(神醫)의 충고를 듣자면 무시하는 게 맞다.
지금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괜히 신경을 다른 곳에 분산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은 무시하고, 몸이 나아져 여유가 있을 때 치워 내면 될 일이다.
그래.
그러면 될 일인데…….
‘쓰읍.’
그렇게 넘어갔다가 나중에 제대로 못 걷어 내서 ‘아닛?!’ 하면서 당하는 게 국룰인데.
내부 장기가 찢어진 극심한 통증과 그것을 치료해 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정심.
그 속에서 시답잖은 생각이나 다름없는 걱정을 하던 설천위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치운다.
불안 요소는 최대한 배제한다.
무엇보다.
할 만하다.
다른 기운도 아니고 영력(靈力)이니 갈기갈기 찢어서 흡수해 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술법의 잔해로 남아 후에 합쳐져 완성되는 것이라면 아예 분해해 버리면 문제없을 터.
조금, 아니 어쩌면 상당히 무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설천위는 서서히 영력을 움직였다.
약 기운에 편승해 몸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영력을 붙잡아 끌고 와서 분해한다.
그리고 흡수.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정체 모를 힘을 분해했다.
* * *
“역시, 수지 타산이 안 맞아.”
경기장에서 한참 떨어진 야산 위.
그곳의 나무에 자리 잡고 앉은 살존은 저 멀리서 운기하는 설천위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진짜로.”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린 살존은 팔다리를 잃은 인형을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아하핫! 이 언니 좀 보게? 의뢰 보수는 분명히 약속했잖아?”
“응, 받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팔다리가 잘려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 속에서 웃고 있는 언여휘를 보며 살존은 비수를 던졌다.
어깨를 꿰뚫은 비수 때문에 나무에 고정되어 있던 언여휘의 복부를 꿰뚫는 비수.
“그런데, 저 아이가 한 말이 참 거슬리네?”
“우리가 언니가 바라는 것을 못 구해 줄 거라는 얘기?”
“응.”
또 하나의 비수를 던진다.
방금 던진 비수의 옆에 적중하는 비수.
전투를 위해 감각을 남겨 놓아 필시 상당한 고통이 찾아왔을 법한 데도 언여휘는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릴까? 언니가 바라는 것을 우리만큼 잘 들어줄 조건을 가진 곳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수지 타산이 안 맞는 의뢰를 받아들여 준 건데 말이야.”
잠시 말을 끊은 살존은 설천위를 떠올렸다.
지나가다가 자신을 알아본 아이.
화경급 고수들조차도 길가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이 몇 년째인가.
보여도 보지 못하는 경지에 오른 지 몇 년째인가.
설령 자신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인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터인데.
‘영력으로 알아챘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나, 믿기 힘든 이야기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믿을 만해.’
저기 나무에 박혀 입만 놀리는 계집보단 훨씬 더 믿음이 간다.
무엇보다.
저들이 자신에게 요구한 의뢰 내용을 떠올리면 더욱 믿음이 간다.
“죽을 정도의 치명상이나 즉사하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입힐 것.”
괜히 최고의 기회에 복부를 찌른 것이 아니다.
죽일 생각이라면 목이나 심장을 찔렀을 거다.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
그러지 못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데 의뢰 내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부를 찔렀다.
딱히 장기를 피해 찌르진 않았으니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죽을 정도의 치명상.
내상을 입고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반 시진 안에 죽는 것이 거의 확정일 정도의 치명상이다.
그래서 일어선 모습에 놀랐지만.
“죽일 정도의 공격은 하지만 살리고 싶어 했다는 것은 저 아이가 망가지길 원한다는 소리겠지.”
인간은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면 변하는 생물이다.
더 강인해지거나 더 나약해지거나.
더 정의로워지거나 더 사악해지거나.
더 이타적으로 행동하거나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죽음의 위기는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죽음의 위기를 겪기 전의 인간과 겪은 후의 인간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기에 이들이 설천위에게 어떤 변화를 원한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약을 사용하고, 기물을 이용하고, 사람을 조종해 그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문제는 그 변화로 무엇을 추구하느냐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의뢰를 받고 수행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설천위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정말, 만에 하나 설천위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다면.
“너희를 팽해야 할까?”
선택지가 달라진다.
눈앞의 버러지들을 치워도 된다.
드물게 살기가 일렁이는 살존의 눈을 마주한 언여휘는 히죽 웃었다.
“그래서, 그게 저 녀석의 허세였다면? 어찌할 생각인데?”
“응. 그럴 가능성도 있지.”
만약 그 자리에서 설천위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은 화경급 고수 중 둘 정도는 죽였을 테니.
그들을 살리기 위한 허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 아닐 거야.”
자신을 알아채고 자신을 어려워하면서도 그 아이는 자신과 대화할 때 언제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공포가 아닌, 호기심과 믿음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허세 따위가 아닌, 담담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눈빛.
그렇기에.
“응, 일단 지켜봐야겠어.”
나무에서 뛰어내려 언여휘의 인형에 다가간 살존은 그녀의 복부에 박힌 비수를 뽑으며 언여휘의 두 눈을 마주했다.
공허한, 허나 무언가로 일렁이는 눈동자.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인간을 벗어난 괴물.
“보수를 지불해라. 너희와의 연이 이어질지 아닐지는 그 보수를 받은 뒤에 결정할 테니.”
이 괴물과 더 함께할지 안 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 *
설천위가 치료를 위해 운기에 들어가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살존의 공격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네 사람은 부하들의 만류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이 이상 설천위가 공격당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덕분에 자신들의 대장을 따라 밤을 꼬박 새운 부하들의 눈 밑에 그늘이 짙어지고 있을 때.
“흐읍.”
힘찬 호흡과 함께 설천위가 눈을 떴다.
영약을 먹은 사람이라곤 믿기 힘든, 초췌한 얼굴과 눈빛.
약 기운을 전부 치료에 쏟아붓고도 부족해서 내공까지 끌어 쓰다 보니 쌓인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공자.”
“왜 여기에 있어?”
“그래야 하니까요.”
눈을 뜨자마자 보인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느 정도 치료는 했는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어찌 됐든 관통상을 입었던 환자다.
혼들에게서 대충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들은 설천위로선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다.
“넌 또 왜 여기 있는데?”
유예린의 옆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백유에게도 한소리 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돌아가 쉬어.”
“공자랑 같이 갈게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유예린의 모습에 작게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호법을 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한 포권으로 자신을 지켜 주던 네 사람에게 하나하나 감사 인사를 한 설천위는 됐으니 빨리 돌아가서 이불이나 덮고 자라는 소국의 말에 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개소리. 우리가 머저리로 보이느냐?”
“아미타불……. 맞는 말입니다. 설 시주, 우리는 누가 은혜를 주고받은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어른입니다.”
눈을 부라리는 소국의 모습에 동의한 무진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설천위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고요.”
생각해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두 사람마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설천위는 이내 웃으며 다시 한번 포권을 했다.
“그럼, 이 후배는 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오냐.”
“그러거라.”
“고생했네.”
“아미타불…….”
네 사람의 각기 다른 대답을 들으며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유예린과 백유가 곁으로 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설천위는 손을 저었다.
“다친 건 너흰데 나를 부축해서 뭐하게?”
“그것도 그러네. 그럼 천위 부축 좀 해 줄래?”
웃으며 팔을 뻗는 백유를 보며 피식 웃은 설천위는 어느새 그녀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런 거라면 제가 해 드리죠.”
“아니, 방금 천위가 한 말 못 들었어? 다친 사람들끼리 해서…….”
“자요.”
백유의 거절에도 기어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어깨에 걸친 유예린이 그녀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아니, 왜 둘이 모이면 둘 다 애가 되냐.
첫 만남부터 이상한 내기를 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둘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설천위가 떠난 비무대 위.
“어찌 움직일 것이오?”
형왕의 물음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본 소국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물어뜯을 것이오.”
“아미타불……. 무림맹에서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진마저도 굳은 표정으로 동의하자, 형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황실의 법도이나 이번엔 그들이 선을 넘어 버렸소.”
인륜이라는 선을 아주 크게 넘어 버렸다.
단체전에서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화약을 이용한 자살 공격은 황실을 향한 조롱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후폭풍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적의로 일렁이는 세 사람의 눈빛에 곤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휘말렸구나.’
황실에게 무림의 일에 개입할 명분이 생겼다.
지금 저들은 이 자리에서 당한 굴욕에 온전히 그들을 원망하고 있겠으나, 당장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불씨가 만들어졌으니 그것을 어떻게 키울지는 그들의 입맛대로일 것이다.
무림맹과 사천맹도 그것을 고려해 움직이겠지.
살존마저 개입했으니 사파는 더더욱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언여휘.
그녀와 그 뒤에 있는 세력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앞으로 폭풍우가 불겠구나.’
이 뒤에 펼쳐질 무림의 상황이 결코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란 건 확실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