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238화-개인전 (6)
하늘이 떨어진다.
비무대 주위에서 구경하던 구경꾼들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릴 정도로 선명한 붕괴.
“이, 이게 무슨!”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단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던 엄청난 기(氣)의 유동이 멈췄기 때문이다.
한 자루의 검이 하늘을 지탱하고 있다.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무너지던 것이 하늘이 아님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괴물이군.’
이내 감탄하고야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일격을 선보인 남궁천과, 그런 일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낸 시백에게.
그리고 이내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더 발전했네?”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이들이 고민하는 사이, 조금 전 공수의 흐름을 읽어 낸 설천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본 새에 상당히 발전했다.
역시, 남궁선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재능을 가진 수재답다.
물론 그것도 남궁선 같은 괴물이랑 비교하니 수재이지, 남궁천의 재능도 충분히 천재의 영역에 닿아 있다.
20살 내외로 초절정에 오르는 이들은 반드시 무림에 이름을 새긴다고들 하니까.
화경이면 말할 것도 없고.
그나저나.
“역시 상대가 영 안 좋네.”
그게 참 아쉽다.
다른 녀석이 상대라면 무난히 승리를 가져왔을 텐데.
하필 시백이네.
“아는 사람인가요?”
“아, 얼굴은 본 적이 없는데 조금 정보를 알아.”
옆에서 묻는 유예린에게 대답하며 설천위는 남궁천의 검을 쳐 내고 담담하게 서서 검을 늘어트린 시백을 바라봤다.
시백.
흑룡학관에 다니는, 몇 안 되는 초절정 무인 중 하나.
예전에 설천위가 흑룡학관에서 그 난리를 쳤을 때도 침묵하던, 숨어 있던 이들 중 하나.
무려 사천맹 대호법(大護法)의 직계 제자다.
즉, 다음 대의 호법이란 소리.
호법(護法)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으론 법을 수호한다는 뜻이 있고.
그 외엔 불교에서 불법을 지키거나 요괴나 질병 등을 물리치는 법력을 뜻하기도 한다.
허나, 무림의 세력들에게 호법이란 지키는 자를 뜻한다.
마치 불법을 지키는 불교의 신처럼 가문 혹은 문파를 수호하는 이들.
당연히 그들이 수호하는 최우선 대상은 그 조직의 중심이 되는 수장들이다.
그렇다면 사천맹의 대호법이 하는 일이 뭐겠는가?
바로 사천맹주를 호위하는 일일 것이다.
그 괴물 같은 사천맹주를 지키는 사람이란 소리다.
즉, 사천맹주에게 위해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와 싸워 시간 벌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다.
그 경지는 최소 화경의 끝자락.
‘……게임 속에선 현경에 오르는 경우도 있지.’
물론 꽤나 나중에 미친 듯이 강한 괴물들이 나올 때나 등장하니 지금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렇게 강한 대호법의 직계 제자가 바로 시백이다.
해서 시백은 흑룡학관의 어떤 정치 싸움에도 개입하지 않다가 졸업하는 것이 정석일 텐데…….
아마, 그가 초절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학생이 대다수일 정도로 힘을 숨기고 살았을 거다.
예전에 흑룡학관에 갔을 때, 여러모로 아예 고려 대상에 넣지 않은 이유도 그거고.
회유도, 설득도 안 될 인물이니까.
그런 그가 백유가 이끄는 학생회의 일원으로, 이 친선전에 출전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변화다.
일단, 대호법이 시백이 움직이는 것을 허락했다는 소리고.
그 말은 곧 백유가 제대로 후계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소리니까.
‘……너무 빠른데.’
최소 3년은 있다가 벌어져야 할 후계 경쟁이 벌써부터 시작된 건가.
아니, 다른 녀석들은 원래 하고 있었을 테니 그냥 백유의 개입이 3년 정도 빨라진 것뿐인가.
잠시 고개를 돌려 흑룡학관 쪽에 앉은 백유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자신과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드는 백유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뭐, 나쁘진 않지.
백유는 미쳤긴 해도 외도(外道)를 걷진 않으니까.
잘못된 놈이 사천맹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보단 훨씬 낫다.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첫 시작으로 강력한 일격을 펼쳤는데, 꽤 쉽게 막힌 탓인지 신중하게 거리를 재는 남궁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새 검을 몇 번 주고받았는지 깔끔하게 정리됐던 바닥에 베인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정적이 흐른다.
상대의 역량을 가늠하고, 상대가 낼 수 있는 수와 자신이 낼 수 있는 수를 고민하며 수 싸움에 들어간다.
이미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초절정에 들어선 무인들의 수 싸움.
앞선 세 경기보다 더 뚜렷하고 품위 있는 수 싸움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역시, 둘 다 나름 뼈대 있는 출신답다.
정통 무인이라는 느낌?
앞선 싸운 녀석들은 하나같이 짐승의 영역에 발을 들인 본능을 품고 싸웠는데 말이야.
아!
‘형은 아닌가?’
상대가 상태가 안 좋아 저렇게까지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이겼으니 딱히 뽐낼 기회가 없었던 건가?
하긴 제대로 배운, 뼈대 있는 집안의 무인이 제대로 싸우면 저런 모습일지도?
설천위가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멍하니 비무대 위를 바라보던 그 순간.
남궁천이 먼저 작게 발을 움직였다.
반보(半步).
아주 작은 전진.
짧은 거리를 좁히는 그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남궁천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하!’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전신을 난자하는 것 같은 강렬한 예기에 조금 전까지 고심하던 수가 전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벨 수 있는가?
아니.
‘베이지 않을 수 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머릿속을 가득 차오르는, 완벽에 가까운 제공권(制空圈).
자신의 영역을 완벽하게 통제해 공격의 범위 안에 넣은 그 제공권에 마른침을 삼키며 남궁천은 검을 뻗었다.
이미 반보 내딛는 것으로 영역과 영역의 싸움에 들어섰다.
이쪽의 제공권을 더욱 짙게 구축해 상대의 제공권을 밀어내는 수밖에.
결심을 세운 순간, 그 뜻을 품은 검이 공간을 가른다.
저 드넓은 하늘을 품은 검은 그만큼이나 막대한 무게로 상대를 내려친다.
창궁무애검에는 기본적으로 내려치기가 많다.
그것이 무게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려친다.
쾅!!
첫 일격이 막혔듯, 다음 일격도 너무나 간단하게 막혔다.
방어를 위한 검법.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막아 내는 검.
‘역시, 지키는 검이로구나!’
이 무림에 지키기 위한 검은 그리 많지 않거늘.
기쁘다.
여태껏 보지 못한 검을 상대한다는 것이.
새로운 배움이.
물론.
‘질 생각은 없다!’
자신의 검을 막아 낸 상대를 보며 남궁천은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중검(重劍)은 막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막았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막은 것인가?
아니다.
하늘은 여전히 머리 위에 있고, 여전히 자신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짓누른다.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검을 더욱 강하게 누르는 남궁천의 압박에 여태껏 무표정하게 방어를 하던 시백의 눈빛이 변했다.
약간의 흥미.
동시에.
키이이잉!
맞물린 두 사람의 검에서 검기가 서로 충돌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내력 싸움과는 다른, 검수의 자존심 싸움.
누가 더 선명하고 날카로운 검기를 만들어 냈는가.
지는 사람의 검이 토막 나는 거다.
두 사람의 검이 굉음과 함께 맞물리는 광경을 보며 구경하는 이들의 입가에는 흥미진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젊은 무인일수록 저런 대결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법.
자존심을 건 저 대결에서 과연 누가 먼저 물러설까.
지켜보는 이들의 흥미진진함이 점점 더 강해져 갈 때.
“호오?”
변화가 일어났다.
누군가의 감탄을 시작으로, 시백의 뒷발이 살짝 밀려난 것이다.
검기는 박빙이나 힘에서 밀리고 있다는 증거.
이대로 가면 자세는 흐트러지고, 흐트러진 자세에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 검은 적의 검에 먹힐 것이다.
시백의 열세가 뚜렷해지는 순간.
누군가는 그가 끝까지 자존심 대결을 하길 바랐고.
누군가는 그가 일단 물러서기를 바랐다.
제4경기가 흑룡학관의 허무한 패배가 되지 않기를 몇 사람은 기원했고.
시백은 그들의 기대에 호응이라도 하듯, 반걸음 몸을 움직였다.
거의 정면을 바라보던 몸이 돌아가고.
적의 힘을 흘려 내는 방법으로 자세가 바뀐다.
그에 따라 힘에서 밀린 시백이 자존심을 버린 것이라 여긴 몇몇이 야유를 보내려던 바로 그 순간.
반걸음 물러서던 왼발을 축으로 시백의 오른발이 단숨에 앞으로 나아갔다.
일보 이상.
검과 검을 나누기 위해 서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 것이다.
그 순간, 비무를 지켜보던 이들은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검수 간의 자존심 대결이라고 여기고 보던 광경에 큰 오류가 있었음을.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됐던 것이다.
시백에겐 검수로서의 자존심 자체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지키는 것.
그리고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윈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단숨에 파고든 시백의 오른팔이 접히고, 팔꿈치가 남궁천의 오른팔을 후려친다.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기습.
치명상은 아니나, 왼팔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이어지는 전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왼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이니까.
자존심 같은 허울에 얽매이지 않은 시백이 단숨에 승기를 가져왔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
“역시, 자네는 뛰어나군.”
시백의 일격에 밀려나는 것이 당연했을 남궁천이 입꼬리를 올린 채 시백을 바라보며 몸을 틀었다.
그 모습에 시백은 상황을 인지했다.
자신이 상대를 빨아들이기 위해 검에 힘을 풀었던 그 순간, 상대도 기다렸다는 듯이 힘을 풀고 대비하고 있었음을.
흑룡학관에서 상대하던 무식한 녀석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무인임을.
허울을 버리고 실리(實利)를 챙길 줄 아는 계산이 가능한 무인임을.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의 반격을 훌륭하게 받아 내고 다시금 검을 휘두르는 남궁천의 모습을 인지한 순간, 시백은 움직였다.
살짝 거리를 벌린다.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남궁천이 따라붙진 않았다.
남궁천에게도 어느 정도의 거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저 거리에 맞춰 검의 궤도가 바뀔 뿐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이쪽의 검을 세운다.
[천수지경(天守池境)]
하늘을 지키는 못의 경계는 거대하니.
단숨에 제공권을 넓힌 시백의 검이 남궁천의 검을 사전에 차단한다.
검이 온전히 힘을 받기도 전에 미리 파고들어 그 흐름을 끊어 낸 것이다.
수비의 극치.
상대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것을 미리 차단하는 것.
검법을 파훼한 것이 아니다.
그냥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검이 시작되는 점에 자신의 검을 찔러 넣어 검식을 펼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검에 쾌를 담을 정도로 완벽하고도 날카로운 수비.
빠르게.
하지만 확실하게.
상대의 틈을 찌른다.
공격은 시작하기 전에 막고.
수비는 갖춰지기 전에 뚫는다.
남궁천이 그려 내는 하늘은 드높고 거대하나, 결국 아직 닿지 않는 하늘.
얼마든지 그 아래에서 헤엄칠 수 있다.
찌르고, 벤다.
“흐읍!”
거듭 끊기는 자신의 공격을 이어 나가기 위해 남궁천은 억지로 몸을 들이밀어 기세를 가져오려 했으나, 그 또한 막힌다.
정확하게 거리를 유지해 공격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모든 공격을 차단당하고, 이쪽의 상처는 늘고만 있다.
자잘한 상처들이긴 하지만, 쌓이고 쌓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출혈로 이어진다.
거기에다.
‘……장난 아니군.’
드문드문 자신의 빈틈을 노리는 강렬한 눈빛.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치명상을 노리고 파고들 검을 상대가 품고 있으니 섣부르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물론, 상대도 자신의 검을 경계하느라 그 한 수를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후.’
고민의 순간.
상처를 각오하고 뚫을 것인가.
이대로 이슬비에 계속 젖다가 쓰러질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남궁천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나만 고민할 순 없지.”
결정을 내린 남궁천이 한마디를 꺼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시백이 반응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검을 자신의 몸쪽으로 붙이는 방어.
그와 동시에 상체를 낮추고 땅을 박찬 남궁천의 몸이 시백의 제공권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이대로 몸이 난자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무식한 돌진.
그 돌진 속에서 남궁천이 검을 들어 올린 채 입꼬리를 비틀었다.
무식하기 그지없는 남궁천의 내려치기가 시백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막든가.
베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