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237화-개인전 (5)
서하영의 창이 밀림과도 같은 창격을 만들어 냈을 때, 지켜본 모두가 감탄했다.
여태까지 보여 준 것과는 전혀 다른 공격 패턴인데도 어찌 저리 부드럽게 해내는가.
서하영의 창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한 수.
성무경을 응원하는 흑룡학관의 학생들조차 다수가 서하영의 승리를 점칠 정도로 압도적인 한 수.
그 역량에 야귀단주 소국조차 감탄했으나.
“허어.”
이어지는 광경에 그 소국조차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공간을 찢어발기고 사방을 옥죄는 공격 속에서 망설임 없이 전진하는 뚝심.
변화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아무리 빨라져도 그 위력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의 말도 안 되는 강맹한 공격들과는 아무리 그래도 그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두 대 정도는 이 악물고 버틸 수 있는 정도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니, 베이면 살이 갈라지고 피가 나는 건 똑같은데 버틸 수 있는 공격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잘못해 창에 뼈라도 닿으면 그대로 부러질 텐데.
그 즉시 패배 확정이다.
심하면 죽을 수도 있고.
그러니.
“돌았구나!”
저 돌진은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쾅!!
강렬한 폭음이 비무대 전체를 또다시 뒤흔든다.
두 거한이 싸울 때보다도 더욱 강력한 충격.
그들은 자신의 육체로 모든 충격을 해소해 냈다면, 지금 비무대 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그 힘을 외부로 흘려 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무대는 그야말로 개판이 된 지 오래.
그 비무대를 바라보는 관중들 속에서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분명 목을 찌르지 않았나?”
“왜 복부 쪽에서 막고 있지?”
상황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일반 관중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상황.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주변과 달리 부서진 석판과 흩어진 모래로 난장판이 된 비무대 위에 선 서하영은 두 눈에 서늘한 빛을 품고 성무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날카롭네요.”
“허나 닿지 않았군.”
창을 쥐는 손과 손 사이.
금속으로 된 그 창대로 성무경의 검을 받아 낸 서하영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창을 돌렸다.
강한 회전과 함께 성무경의 검을 튕겨 내면서 거리를 벌린다.
조금 전의 일격.
‘……찌르기였지요.’
단, 그냥 찌르기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찌르는 사선 찌르기였다.
노리는 곳은 복부.
참으로 간단한 찌르기였지만, 문제는 그와 연계된 성무경의 살기였다.
정확하게 목을 노리는 살기.
지금 당장에라도 목을 물어뜯겠다는 찐득한 살기를 거침없이 흘려 내고 있었다.
의식을 목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허상의 이빨.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에게만 통하는, 기세를 이용한 공격.
당하면 위험하다.
그러니 거리를 벌려야 한다.
저 이빨이 닿지 않을 거리까지.
물론.
“흡!”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
자신이 검을 튕겨 내며 거리를 벌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는 성무경을 보고 서하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철저한 사람이다.
무림학관에서 어울리는 이들 중에는 없는 유형의 무인.
철저한 분석과 계획으로 적을 옭아매고 몰아붙여 끝내 숨통을 끊는 전술을 쓰는 사람.
공부가 된다.
이런 사람에겐 단순한 계획은 통하지 않는구나.
상대의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으면서도, 그 변화를 계획의 범위 안에 수정해 넣는 인간.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인간.
단 한 순간의 빈틈에 계산을 끝내고 달려들 수 있는 인간.
참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이 아닐 수 없었다.
캉!
달려드는 성무경의 검을 또 한 번 튕겨 내자,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자세를 고친 성무경이 또다시 선택을 강요한다.
가슴쯤으로 올린 팔.
공격은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살기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아래를 노린다.
아래에서 시작해 심장을 꿰뚫겠다는 강한 의지를 살기로 내뿜는다.
자신의 코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으르렁대는 저 늑대가 과연 몰이를 위한 미끼일까, 아니면 진짜 목을 물어뜯기 위해 온 사냥꾼일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막아야 한다.
잘못 고르면, 목이나 가슴 둘 중 한 곳에 바람구멍이 생긴다.
선택의 강요.
피가 마르는 긴장감에 뇌가 타 버릴 것 같은 고뇌의 순간.
쿵!!
양발을 땅에 붙이고 선 서하영은 창을 땅에 내리찍었다.
그리고.
“흡!”
창을 돌린다.
코앞까지 다가온 성무경의 검을 초고속으로 회전한 서하영의 창이 쳐 낸다.
아까와 달리 살기대로 아래에서 솟구쳐 심장을 노리던 찌르기가 튕겨져 나가 자세가 살짝 흐트러진 성무경은 이내 헛웃음과 함께 자세를 고쳤다.
“미쳤군.”
“저희 집안의 가훈이에요.”
홀로 무공을 깨닫고, 홀로 성장한 권왕은 무림에 흔히 퍼져 있는 여러 잡기술에 수도 없이 당했다.
흙을 뿌리거나 침을 뱉는 것은 기본이요.
소리로 균형 감각을 흐트러트리고, 기이한 환술로 눈을 속이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들에게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 줄 스승이 없었던 권왕은 직접 몸을 부딪쳐 그 파훼법을 익히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자신의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두 눈을 감은 채 창을 쥔 서하영은 정확하게 창끝을 성무경에게 겨누며 웃었다.
“눈을 현혹하는 자가 있다면 눈을 감아라. 귀를 현혹하는 자가 있다면 귀를 닫아라.”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흔들릴 일도 없으니.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감각뿐.
눈을 감고, 귀를 닫아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감각이 있으니.
그건 바로 혼에 새긴, 본능과 기감(氣感)이다.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육감(六感) 또한 흔들리지 않으리라.”
* * *
“아미타불, 훌륭한 후배입니다.”
“누가 보면 불교에 귀의한 앤 줄 알겠어.”
눈을 감고 부동심을 말하는 서하영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소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무경의 실력은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데려가서 써먹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다.
조금만 가르치면 저기 구석에 서서 딴짓을 하고 있는 부단주 놈 정도는 될 정도로 쓸 만해 보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상대가 너무 괴물이다.
늑대의 이빨은 훌륭했으나, 한 마리로는 저 범에게 닿기엔 역부족이다.
상처 정도는 낼 수 있겠으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소국의 아쉬움이 담긴 평가와 함께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간 서하영의 창이 성무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기감을 흔드는 성무경의 공격은 분명 엄청났다.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조차 성무경이 살기를 뿜어내는 방향으로 공격했다고 여겼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잡기술은 안타깝게도 한계가 있었다.
성무경이 정말 그 변화의 극(極)을 추구했다면 몰라도 어중간하게 필살의 한 수로 갈고닦은 반쪽짜리 기술론 무리였다.
그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오로지 창(槍)이라는 무기의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괴물이니까.
쾅! 쾅!
어느새 완전히 기본으로 돌아가 창을 휘두르기 시작한 서하영의 공격에 성무경의 몸은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능히 갈가리 찢어 버릴 늑대의 이빨이 백호의 앞발에 막혀 부러진다.
두 눈을 감고 호흡조차 최소한으로 줄여 온전히 모든 감각을 창과 자신에게 집중한 서하영의 창은 그야말로 성무경의 손발을 막았다.
“괴물 놈들이군.”
저 녀석도 얼마 안 남았군.
성무경을 압박하는 서하영을 보며 피식 웃은 소국은 고개를 돌려 무림학관에 앉아 있는 이들을 봤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녀석들을 모아 놨을까.
아니, 모아 놓은 것뿐이라면 흑룡학관도 절대 밀리지 않지.
그렇다면.
‘……네 녀석이 원인인 거냐?’
재미있다는 듯이 육포를 뜯으며 구경에 몰두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 저놈이 원인이 맞는 듯싶다.
저 모자라 보이는 녀석이 어떻게 저 무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여자의 위세를 등에 업었다고 하기엔 본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고.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기엔…….
‘우리 쪽에서도 저놈에게 반한 녀석들이 꽤 있는 것 같고.’
백유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설천위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꽤 많다는 건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대체 뭐가 원인일까.
‘……아니, 그럴 만도 한가.’
설천위에 관한 정보는 이미 웬만큼은 다 전해 들었다.
사파의 지역에 와서 사파에게 쫓겨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도 흑룡학관에 홀로 찾아와 아무렇지 않게 친구를 사귈 수 있을 정도의 대범한 성격.
진영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만을 보는 시야는 위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파의 젊은 녀석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이지.
물론, 그냥 사이만 좋은 거라면 딱히 문제가 안 되겠지만…….
‘무림을 뒤흔들 놈인데.’
당장 옆에 있는 저 너구리 같은 노인네도 계속해서 설천위를 살피고 있다.
황실의 앞과 뒤, 양쪽 다 설천위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리.
거기에다 사파도 얽혀 있고.
혈교나 혈사련, 사혈천 같은 미친놈들도 엮여 있다던데…….
“단명하거나 영웅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이겠군.”
“아미타불, 무슨 말씀이시오?”
“아무것도 아니다.”
옆에서 게슴츠레 눈을 뜨는 땡중에게 대충 손을 휘저은 소국은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끝났군.”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전투의 결과가 분명해졌다.
서하영은 이곳저곳에 베였는지 흐르는 피가 그 의복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베인 곳은 주로 팔다리.
눈을 감았으니 완전한 회피는 힘들었을 테고 그러니 의식을 최대한 몸과 머리에 집중해 급소를 보호한 탓이겠지.
이는 반대로 말하면 성무경의 검이 끝내 서하영의 급소에 닿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친선전 비무이니 급소를 제대로 노리는 건 금지되어 있다곤 해도 근처를 공격하면 급소를 공격당한 것으로 취급하거늘.
그런 공격의 흔적조차 없었다.
반면, 성무경은…….
“후욱.”
거칠어진 숨을 깊이 몰아쉴 정도로 이곳저곳을 베인 상태.
서하영과 달리 몸에 상처가 꽤 많았다.
어깨나 옆구리, 심지어 가슴에도 얇게 베인 흔적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하영이 방어를 위해 창을 휘두르는 것을 선택해 찌르기가 적어서 바람구멍은 없다는 점일까.
물론 이대로 더 싸우면 눈을 감고 있는 서하영의 틈을 찔러 역전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승자! 무림학관의 서하영!”
친선전에서 그 정도의 기회까진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이상 싸움이 길어지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크게 다친다.
이쯤에서 끊는 것이 맞다.
물론, 실전에선 그딴 거 없지만.
그리고 아마 실전이라면…….
‘저 녀석의 승률이 7할 정도 되려나.’
친선전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진짜 이빨은 숨겼으니 이기는 게 더 이상하지.
참으로 이성적인 녀석이다.
다른 놈들이라면 감정이 앞서서 살수를 펼쳤을 터인데.
평소와는 상황이 다르니 이번의 패배는 어쩔 수 없나.
가볍게 혀를 찬 소국은 흑룡학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다음에는 어떤 녀석이 나올지 기대되는군.”
솔직히 말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애들 친선전인데, 기대할 게 뭐가 있겠는가.
흑룡학관이야 그렇다고 쳐도 무림학관의 샌님들은 그야말로 소중하게 기른 온실 속 화초 같은 녀석들일 텐데.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단체전에서 어떤 괴물 놈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고.
개인전의 3경기 모두가 역시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슬슬 다음 경기가 기대되었다.
과연 누가 나설까?
기대감을 품은 소국이 웃을 때, 흑룡학관에서 조용히 움직인 이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검을 등에 빗겨 맨 채 조용히 비무대 위에 선 이를 확인한 소국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저놈이?
아무래도.
“이 이상의 패배는 마음에 안 드나 보지?”
흑룡학관에서 나온 녀석의 정체를 파악하고 소국이 웃는 사이, 무림학관 쪽에서도 한 명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무림학관의 남궁천이라고 하오!”
“……시백.”
당당하기 그지없는 남궁천과 조용한 분위기의 시백.
그 둘의 대비되는 모습에 관중들의 시선이 다시 남궁천에게로 향하던 그 순간.
당당한 태도와 달리 남궁천은 오랜만에 긴장감을 느끼며 검을 쥐고 있었다.
비무대 위로 오르기 전, 설천위가 한 충고 때문이다.
‘조심해라. 위험하니까.’
무려 설천위가 경고할 정도의 상대.
“한 수 배우겠소이다!”
짧은 인사와 함께 남궁천이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려 내려긋는 순간.
쿠구구구구.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 제1초 창천(蒼天)]
하늘이 비무대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