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236화-개인전 (4)
창을 몸으로 당겨 만드는 작은 회전.
짧은 순간에 한 바퀴를 돌아 작은 원을 만들어 낸 순간.
더욱 가속한 회전은 팔을 펴는 것과 동시에 더 큰 원을 만들어 낸다.
아니, 인간이 허공에서 몸을 트는 것만으로 저만한 회전력을 내는 것이 실로 가능한 일인가.
발을 대지에 붙인 상태에서 시작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군!’
감탄은 감탄이고.
육체는 확실하게 반응한 성무경이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검을 눕혔다.
그리고 왼손으로 검면을 받치는 순간.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는 서하영의 몸에서 생겨난 거대한 원이 검에 닿는다.
그 순간, 강렬한 폭음과 먼지구름이 경기장 전체를 가득 메웠다.
쾅!!
서 있는 것도 요령이 필요할 정도로 강력한 흔들림이 경기장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격렬한 진동 속에서 겨우 균형을 잡은 구경꾼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 거대한 덩치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주먹질을 할 때도 이런 큰 충격은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들의 의아함에 더욱 불을 붙이고, 모두가 자욱한 먼지구름을 뚫고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게슴츠레 눈을 뜨는 순간.
“하!!”
훙!
강력한 바람이 먼지구름을 사방으로 흐트러트린다.
순식간에 옅어진 먼지구름 덕에 시야가 확보된 이들이 눈을 크게 뜨자, 그들의 눈에 꽤나 믿기 힘든 광경이 들어왔다.
비무대 위의 돌판을 몇 개나 부수고 뒤로 밀려난 성무경.
그의 발은 비무대 아래의 모래에 깊이 박힌 채 기다란 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정하지.”
모래 속에서 발을 빼내며 옆에 있는 그나마 멀쩡한 돌 위로 올라선 성무경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하영을 향해 검을 겨눴다.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은 인정하겠다.”
“알아주셨다니 다행이네요.”
“모를 수가 없지.”
격렬한 힘의 충돌로 인한 여파 때문일까.
조금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성무경은 조금 전의 공방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회전의 비밀은 역시 창인가?”
“네.”
“그렇다곤 해도, 정말 말이 안 되는 숙련도군.”
처음의 작은 회전.
그리고 점차 커지는 회전.
창을 회전력을 올리는 추로 이용했다는 소리다.
처음엔 몸에 붙여 회전을 쉽게 만들고, 점차 속도가 붙자 몸에서 떨어트려서 위력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말은 간단하지만, 창을 회전의 속도를 올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걸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해냈다.
“창을 쥔 지 이제 겨우 2년쯤 된 거로 아는데.”
“그렇죠? 생각보다 잘 아시네요?”
……이게 재능이란 것인가.
젓가락을 쥘 때부터 창을 쥔 사람이라도 결코 조금 전에 보인 회전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거늘.
재능의 격차란 것이 이리도 대단한 것인가.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킨 성무경은 이내 쓰게 웃었다.
‘나도 부러워할 처지는 아닌가.’
노력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재능이 없었다면 남들보다 이리 앞서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
작게 올라오던 질투심이라는 쓸모없는 감정을 빠르게 쳐낸 성무경은 어느새 자세를 고친 서하영을 바라보며 검을 몸쪽으로 당겼다.
뭐가 됐든, 지금은 이 싸움에 집중해야 한다.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방금 전에 알았지 않은가.
거기에다.
‘근력으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단련된 육체. 오랜 시간 쌓아 온 듯한 내공. 명문의 후예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군.’
조금 전에 얻은 정보로 서하영에 대한 평가를 끊임없이 수정하며 전략을 세우는 바로 그 순간.
“그런데 의외네요.”
“……뭐가 말이지?”
“조금 전의 공격, 웬만하면 어디 하나쯤은 부러졌을 텐데요. 어떻게 해소했나요?”
어떻게 해소했냐.
그 의문에 성무경은 서하영의 두 눈을 마주한 뒤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계산이었군.’
첫 일격.
자신의 도발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공격한 듯한 그 일격.
자신의 두 다리를 땅에 박아 넣을 정도로 강력했으나, 그 충격을 해소하지 못하고 빈틈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허공으로 튀어 올랐던 그 공격.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몰린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두 다리가 모래에 박히면 충격을 해소해 내기 힘들 테니까.
서하영을 향한 평가를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더 올린 성무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살려면 뭔들 못 하겠나?”
“그것도 그러네요.”
성무경의 간단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창을 가볍게 돌리며 그를 바라봤다.
“그럼, 시작할까요?”
“언제든지.”
성무경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서하영의 몸이 또다시 사라졌다.
아니, 관중석에 있는 일반인들만이 눈앞에서 그녀가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초속(超速)의 영역에 들어선 성무경은 두 눈으로 똑바로 서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허초(虛招)도 없는 직진(直進).
상대를 속이겠다는 생각 따윈 전혀 없는 듯, 단숨에 자신의 정면을 향해 파고드는 서하영을 보며 성무경은 검을 움직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상대가 먼저 가속한 시점에서 이미 공격권을 뺏긴 것이니 방어를 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상대의 궤적을 읽고 방어에 집중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상식 따윈 통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지!’
바로 눈앞의 상대가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의 대장이 그러하지 않은가.
며칠 전에 싸웠던 설천위 놈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정석 따위 전부 잊어라.
지금 이 순간, 이 몸을 눈앞의 상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유일한 힘은 본능뿐이다.
쾅!!
돌진해 오는 서하영의 머리 위로 떨어진 성무경의 검이 그녀의 창과 격돌해 거대한 폭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두 사람의 창과 검에 흐르는 기(氣)가 사방을 밝힌다.
하늘 위에 뜬 태양 아래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진짜배기.
성무경의 붉은 검기(劍氣).
서하영의 청백의 창기(槍氣).
두 빛이 섞이며,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경을 만들어 낸다.
서하영의 창이 거대한 백호처럼 그 입을 벌리고, 성무경의 검이 적랑처럼 대호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든다.
서하영의 창이 거대한 백호를 그려 내듯 강력한 일격으로 성무경을 몰아붙이고 있다면, 성무경의 검은 늑대들이 합공을 하듯 짜임새 있는 날렵함으로 그 힘을 몰아내고 있었다.
창의 느림과 검의 빠름.
두 무기의 특색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듯한 광경에 적수단의 단주 무진은 소리 없는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훌륭한 후배들이다.
어찌 저리도 자신의 무(武)를 정직하게 갈고닦았다는 말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武)의 기본.
그것을 저 둘은 너무나도 확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아미타불, 보고 배울 점이 많은 후배들이로군요.”
“아쉽게도 같은 의견이다.”
무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국은 비무대 위를 지켜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 정사대전에선 창에 죽는 놈들이 꽤 많겠군.”
“아미타불, 이런 좋은 날에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하지 마시오.”
드물게 강한 어조로 노려보는 무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소국은 주위에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봤다.
“저 땡중한테 한 말이 아니라, 너희에게 한 말이니 잘 들어 둬라.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 저 아이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놈은 부단주밖에 없어 보이니까.”
부하들을 비웃으며 소국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맹주가 가라고 하기에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나들이 삼아 나온 것인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가.
설가의 그 괴물 녀석도 그렇고.
‘……기대되는군.’
저놈들이 앞으로 더욱 성장하면 얼마나 재미있어질까.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린 소국은 이내 작은 감탄과 함께 웃었다.
“배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녀석이군.”
* * *
거칠기 그지없는 공격.
단련을 거듭해 만들어 낸 압도적인 균형 감각과 근력.
그것을 이용해 만들어 내는 끊임없는 공격은 창이라는 무기에서 나올 수 있는 빈틈을 확실하게 메워 줬다.
긴 길이로 인해 생기는 필연적인 공간의 빈틈과 속도의 부족함.
그것을 끝없는 연계와 강한 힘으로 메운 것이다.
그나마 그 중간중간 빈틈을 찾아서 반격하는 것도 성무경쯤 되는 실력자이기에 가능한 일.
상대가 만약 그 같은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마구 몰아붙이는 서하영의 창이 만들어 낸 거친 폭풍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필시 무너졌을 것이다.
‘백 년 묵은 범과 싸우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오랜 세월을 묵은 대호(大虎)가 휘두르는 앞발은 살아 있는 거목조차 쓰러뜨리고, 그 이빨은 바위조차 부순다고 들었다.
눈앞의 서하영의 창이 바로 그랬다.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공격은 대호가 휘두르는 앞발과도 같았고, 드문드문 파고드는 치명적인 일격은 그 이빨과도 같았다.
만약, 속도가 조금이라도 더 빨랐다면?
그 앞발을 막아 내는 것이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그 이빨 사이에 검을 끼워 넣는 것이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아찔한 상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억지로 털어 내며 성무경은 검을 세웠다.
거친 대호와의 전투라곤 하지만 그런 대호도 결국엔 늑대 무리에 둘러싸여 끝내 목이 뜯겨 죽는 법.
자신의 이빨이라고 대호의 목에 박히지 말란 법은 없다.
틈은 반드시 생길 것이고.
그 틈을 노린다면 분명…….
성무경의 눈이 단 한 순간의 틈을 포착해 내기 위해 더욱더 깊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본능에 따라 휘두르는 검에 이성이 끼어들고.
그 이성은 계산에 따라 공방을 정했다.
처음과 달리 이성의 개입이 가능해진 이유.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서 서하영이 휘두르는 창에.
위협적인 면모는 그대로이나, 그 속도와 위력에 익숙해지면 어느새 여유가 생기기 마련.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으나, 지금 공격의 주도권은 서하영이 쥐고 있다.
서하영의 입장에선 자신의 빈틈을 최소화하는 것에 그 여유를 쏟고 있을 터.
그러니,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승리를 향한 열쇠가…….
‘……거칠어졌어?’
차분해질수록 더더욱 선명하게 이상(異常)이 감지된다.
여태까지와는 명백하게 다른.
아주 작은 티끌과도 같은 변화.
허나, 마주한 검에서 그것을 느낀 순간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거칠어졌다.
조금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옆에서 본다면, 눈치채는 게 힘들 정도로.
아주 조금.
거칠어졌다.
그리고 빨라졌다.
창은 거리를 정확하게 벌리고 그 거리의 이점을 유지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무기.
그 안에 속도의 개입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더 거칠어진다는 것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성무경은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의 그 회전을 만들어 낼 정도로 창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저 강맹함 외에 하나를 더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근력과 균형 감각으로 몰아치는 창격에 잊고 있었던 사실.
대부분의 창술가는 변화를 주력으로 삼는다는 것.
촤라라라라라락.
여태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허공을 난자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 순간, 서하영과 두 눈을 마주한 성무경은 헛웃음을 삼켰다.
자신이 상대의 수를 읽고 있었듯, 상대도 자신의 수를 읽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느리고 강맹했던 공격은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 창의 탄성을 이용해 펼치는 엄청난 변화가 단숨에 사방을 가득 메운다.
그 하나하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예기(銳氣)를 품은 공격.
살기만 없을 뿐 닿는 순간, 살을 가르고 뼈를 베어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공격이다.
그야말로 창의 밀림(密林).
인지한 순간, 이미 사방에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밀림을 무대로 한 마리의 범이 사냥을 시작한다.
[풍영류창(風泳流槍) 제3초 삭풍(朔風)]
북해의 바람을 품은 백호의 발톱이 성무경을 집어삼켰다.
서하영 쪽으로 완전히 승기가 기울어진 듯한 그 순간.
[적랑검(赤狼劍) 제1초 랑아(狼牙)]
삶을 갈구하는 늑대의 이빨이 백호가 만들어 낸 삭풍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