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235화-개인전 (3)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철백과 거완의 싸움처럼 강풍이 몰아치진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소음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그것이 거듭되고 있었을 뿐.
빠르긴 하나, 속도만을 추구하지 않은 두 사람의 검술은 공격과 방어로 어우러지면서 상당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검면에 반사돼 번쩍이는 햇빛이 그야말로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으니까.
구경꾼들의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고 있다는 건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현란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였다.
물론.
“싱겁군.”
“아쉽네.”
눈이 좋은 이들은 그런 감탄 따위 하지 않았지만.
“승리를 생각했다면,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니었네요.”
“뭐, 누굴 상대했어도 힘든 몸 상태이긴 하지.”
여미려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인 백유는 비무대 위에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가무학을 바라봤다.
단체전에서의 격전.
물론 첫 상대인 청수라는 도사 쪽이 훨씬 크게 다쳤다.
지금도 저쪽에서 동료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경기를 관람하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격렬한 반항을 하는 상대와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내공과 심신의 소모를 가져온다.
그런데 거기에다 설천위의 기세에 장기간 노출되어 있었다면?
정신력은 깎일 대로 깎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설천강과 싸웠으니 몸 성히 끝났을 리가 있었겠나.
설천강과의 싸움이 끝난 후, 가무학은 족히 3주 이상은 요양해야 할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물론 설천강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게 끝나고 둘은 길거리에서 만나 또다시 술 대결을 벌였으니.
곤죽이 된 내부가 버틸 리 만무했다.
거기에다 그제도 술판을 벌였으니 뭐, 아마 겨우 숙취를 억누르고 있을 뿐 상태가 썩 좋진 못할 거다.
그건 상대인 설천강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설천강은 술이 세기로 유명한 설가의 핏줄이고.
내상의 정도도 가무학보다 훨씬 덜했다.
즉, 지금의 그는 가무학보다 족히 5할 이상 몸 상태가 좋은 상황이란 소리다.
애초에 설천강의 실력이 한발 앞선 상황에서 몸 상태까지 이 정도의 격차가 난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있나.
그 증거로.
“설가의 검이란 건 꽤나 운치가 있네. 천위는 못 쓰는 것 같지만.”
“그러게요.”
설천강의 검에선 검광이 번뜩이고 있질 않다.
검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태양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내공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전자는 당연히 반짝이는 진검을 휘두르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고.
후자는 내공의 검기나 검강의 형태로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대낮에 싸우면 어찌 됐든 검광이 만들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검기나 검강을 만들지 않고 검에 내공만을 흘려보냈다고 해도 검신에 햇빛이 번뜩여야 하고.
반대로 검기나 검강을 만들었다면 그 빛이 번뜩였을 테니까.
그런데, 설천강의 검은 반짝이지 않는다.
이유는 한 가지.
“참 상대하기 까다로운 힘이야. 빙공(氷功)이란 건.”
설천강의 내공에 의해 만들어진 서리가 검에 끼어 햇빛을 먹어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절묘하네요. 가무학의 검기를 막아 내는 수준에서 정확히 제어하고 있어요.”
검기 없이 검기를 막고 있다는 것은 설천강이 품고 있는 여유분의 힘이 지금 가무학이 펼쳐 내고 있는 힘을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증거였다.
정말 은은하게 흘려내는 힘만으로 검기를 막아 내고 있다는 소리니까.
거기에다.
“슬슬 느려지네.”
“설가의 인간들은 동시에 뭔가를 하는 데 능숙하네요.”
“천위도 그렇긴 하지.”
무공으로 싸우면서 술법도 펼치니까.
뭐, 저건 조금 얘기가 다르지만.
비무대 위에 내리기 시작한 서리들을 보며 백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끝났네.”
* * *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한번 서로 튕겨 나가며 거리를 확보하고 다시 휘두른다.
그것이 싸움의 기본.
이 속도에 차이가 생기면 그것은 치명적인 틈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큭!”
그 틈을 숨기지 못한 가무학은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는 검에 신음을 삼키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런 가무학의 공격을 가볍게 몸을 뒤로 빼는 것으로 피해 낸 설천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가무학을 바라봤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깔끔한 최후다만.”
“흥, 끝까지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
“그건 맞는 말이지만, 아쉽게도 나는 방심하다가 진 적이 조금 있어서 말이야.”
한 걸음, 담담하게 앞으로 나서는 설천강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침착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검을 세웠다.
“항복하지 않으면 상처만 늘어날 뿐이다.”
“……설가는 전부 성격이 나쁜 놈들만 모였냐?”
“성격이 좋은 집안이라곤 말 못 하겠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강은 검신 위로 선명한 검기를 피워 올리며 가무학을 바라봤다.
“기다리는 친구들이 많으니, 슬슬 끝내지.”
* * *
“승자! 설천강!”
한기에 손발이 얼어 끝내 검을 놓친 가무학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비무대를 내려갔다.
별다른 상처 없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설천강.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냐?”
“하이파이브. 손바닥끼리 부딪치는 거야.”
“그건 또 뭐냐?”
“저기 먼 곳에서 하는 일종의 승리 환영?”
“뭔 소린지 모르겠군.”
헛웃음을 지으며 설천위를 바라본 설천강은 여전히 손을 들고 있는 설천위를 보곤 한숨과 함께 손을 마주쳤다.
짝!
“됐냐?”
“오케이! 나쁘지 않았어. 형.”
“흥, 이길 싸움이었을 뿐이다.”
“그 툴툴거리는 말투만 아니었다면 멋있었을 텐데.”
“뭐?”
“아무것도 아님.”
눈을 치켜뜨는 설천강을 대충 밀어내 여웅의 곁으로 보내 버린 설천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침 형왕이 비무대 위로 올라가 제3경기의 선수를 무림학관에서 먼저 내보내라고 선언한 시점.
“그럼 누가 나갈래?”
고개를 돌린 설천위의 물음에 기다리던 이들이 슬쩍 눈치를 봤다.
앞선 싸움을 지켜보다 보니 몸이 달아올라 싸우고는 싶은데, 먼저 나서는 게 과연 맞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그 순간.
“제가 나갈게요!”
당당하게 손을 들어 올린 서하영이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 소저가 먼저 나간다네. 불만 있으신 분?”
“아미타불, 괜찮소이다.”
“문제없어.”
“괜찮네.”
“오케이. 그럼 서 소저로 결정!”
다른 이들의 빠른 동의에 활짝 웃은 서하영은 작게 고개를 꾸벅이곤 그대로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미리 조립해 놓은 창을 뒤로해서 쥔 채 비무대 위로 올라선 서하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흑룡학관 쪽을 바라봤다.
“저는 딱히 싸우고 싶은 분이 없으니 아무나 올라와 주세요!”
그제 있었던 술자리에서도 나름 재미있게 놀았던지라 딱히 악감정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그러니까 철백을 노리던 사람도 없고.
그러니 아무나 괜찮다.
그런 서하영의 선언에 흑룡학관 측의 분위기는 단숨에 거칠어졌다.
서하영은 원한 관계가 없으니 아무나 상관없다는 소리였으나, 흑룡학관 쪽에선 아무나 상관없이 다 이길 수 있다는 소리로 들렸으니까.
일순 흉흉해진 분위기에 서하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그럼 내가 나가지.”
단숨에 비무대 위로 오른 인물에 모두의 시선에 놀람이 깃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
“흑룡학관의 성무경이라고 한다.”
“무림학관의 서하영이에요.”
당당한 자세로 포권과 함께 자기소개를 하는 성무경을 향해 포권으로 인사한 서하영은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었다.
“의외네요?”
“어떤 점에서 말이지?”
“분명 아까 나왔던 분처럼 단체전의 설욕을 위해 설 소협이 나올 때 나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가무학이 그러했든, 성무경도 단체전에서 설천위와 뚜렷한 승부를 보지 못했다.
외부의 개입에 의해 흐지부지 경기가 끝났고, 상황을 고려한 성무경이 항복하는 것으로 끝났으니까.
당연히 개인전에서 재대결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하영만 그리 생각한 게 아닌 듯 무림학관 쪽에서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무경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단체전에서 마지막에 싸우지 않고 항복한 시점에서 아쉽게도 내겐 우선순위가 없다.”
성무경의 말에 그의 뒤쪽을 바라본 서하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잔잔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 이들 중에 설천위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밀렸다는 말이구나.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가네.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이 창을 작게 휘둘러 가슴 앞으로 당기는 순간.
“그리고 부하가 저리 졌으니 그 머리 되는 사람으로 또 패배를 가져올 순 없는 법이지.”
“……흐응? 그 말은요?”
“아쉽게도 이번 비무는 내가 이겨야겠어.”
승리를 예상하고 이 자리에 섰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성무경의 오만함에 서하영은 작게 웃었다.
노골적인 도발.
아니, 도발이 아닌 진심인가.
그 진심을 이해한 순간.
“그럼 시작!”
형왕의 신호가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눈을 크게 뜨고 싸움을 지켜보던 관중 하나가 그 소리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형왕의 목소리엔 묘한 기세가 담겨 있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한 것이다.
그렇게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쾅!!
단숨에 거리를 좁힌 서하영의 창이 성무경의 머리 위를 강타했다.
늦지 않게 반응해 검을 들어 막은 성무경의 발이 단숨에 돌판을 뚫고 박힐 정도의 강렬한 충격.
덩치가 크지 않은 서하영이 만들어 낸 충격이라곤 믿기 힘든, 강력한 일격.
그 일격에 지켜보던 설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소리가 있지.”
[훌륭하구나.]
[거듭되는 단련의 증거지.]
설천위 일파라고 불리는 친구들 속에서 가장 외공에 신경 쓰는 이가 누굴까?
물론 당연히 철백이다.
걔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두 번째는?
설천위?
아쉽게도 아니다.
주현운?
이쪽은 외공에 재능을 쏟을 필요가 없다.
소윤혜?
이쪽은 체질상 불가능하니 당연히 아니고.
유예린?
꽤나 신경 쓰긴 하지만, 2위는 아니다.
2위는 당연히 지금 비무대 위에서 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성무경을 비무대에 박아 버린 저 서하영이다.
서하영은 애초에 첫 만남 때부터 육체 능력 하나는 끝내줬다.
주먹을 더럽게 못 써서 계(癸)였던 거지.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뛰어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서하영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권법 하나로 이 무림에 이름을 우뚝 세운 권왕(拳王) 아닌가?
권법이야 재능으로 깨달았다곤 해도, 그 육체의 단련은 별개의 것이다.
육체가 부족하면 머리로는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기에 당연히 외공에 신경을 썼고, 권왕은 웬만한 남자들은 얼굴도 못 드는 거한이 됐다.
그렇다면, 근력의 소중함을 아는 권왕이 재능이 부족한 딸에게 무슨 수련을 시켰을까?
당연히 외공 수련이다.
몸이 강해지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나중에 깨달음을 얻어 극복하면 그것이 큰 도움이 될 거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서하영은 어린 시절부터 외공을 쌓아 왔다.
철백이나 설천위처럼 요 1, 2년 약식으로 쌓아 올린 게 아닌 진짜 외공을 십 년을 넘는 세월을 거쳐서 쌓아 올렸단 소리다.
체질상 근육이 크게 붙지 않아 티가 많이 나지 않을 뿐, 저 통이 넓은 옷 속에는 강철처럼 단련된 육체가 숨어 있다는 소리다.
옷 입으면 말라 보이는 유형의 대표라고 해야 할까.
꽈악.
자신의 창을 막아 낸 성무경을 짧게 바라본 서하영은 망설임 없이 팔을 휘둘렀다.
그 반탄력으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서하영.
빠르게 자세를 다잡은 성무경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허공으로 몸이 떠오른 이상, 회피에 한계가 생긴다.
단숨에 유리한 상황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높게 튀어 오른 서하영이 자신의 검이 닿는 범위까지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며 성무경이 검을 겨누는 그 순간.
성무경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왜?’
어째서 창의 끝을 쥐고 있는 거지?
저 창, 가벼워 보이긴 해도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라서 결코 끝을 잡고 휘두를 만한 물건은 아닐 텐데?
상식이 부정했지만, 현실을 인지한 몸은 확실하게 반응했다.
창끝을 손에 쥔 채 단숨에 휘두르는 것으로 서하영의 몸이 거대한 원을 그려 낸다.
창 전체를 검처럼 휘두르는 그 미친 근력에 성무경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하!”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창날을 마주하며 성무경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 후 앞선 두 경기를 포함해 여태껏 없었던 강렬한 충격이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