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233화-개인전 (1)
“다들 얼굴은 멀쩡하네?”
개인전 시작 전날.
점심시간에 사람들을 모은 설천위는 개개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내공을 금제하는 게 참 커?”
“……그만.”
울렁거림을 참는지 힘겹게 말을 꺼내는 설천강을 보며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멀쩡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진짜 멀쩡한 사람은 몇 안 된다.
유예린조차 얼굴색이 살짝 창백하게 변했을 정도이니 뭐.
뭐, 그 몇 없는 멀쩡한 사람 중에 가장 의외인 건…….
“의외로 술은 잘 마시나 보네?”
“처음 마셔 봤는데, 괜찮은 것 같아요!”
……얘 재능 이름이 무량대해(無量大海)가 아니라 주량대해(酒量大海)였나?
어제 사하랑 옆에서 적랑대에게 둘러싸여 하루 종일 마시던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다들 정신력과 근육이 부족하군.”
“정신력은 그렇다고 쳐도 근육은 무슨 상관이냐.”
얘는 가끔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해요.
기본적으로 똑똑한데, 이따금 뇌에 근육이 찬 것 같은 소리를 할 때가 있단 말이지.
철백의 헛소리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슬슬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을 보며 웃었다.
“일단 어제 술자리에서 별다른 다툼 없이 잘 놀아 줘서 고맙단 말부터 하고 싶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을 텐데.”
“……친선전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오, 천! 살아 있었네?”
연 소저를 못 데려와서 그런지 조용히 수련만 하더니만, 어제 뭔가 좀 느낀 게 있었나?
“생각보다 말이 통하더군.”
“뭐, 무공 쪽으로 말하면 그렇겠지?”
“의견이 달라서 얘기하기 나쁘지 않았어.”
“그건 뭐 당연하지.”
공통점이 있으면 차이점도 있으니까.
남궁천이 생각보다 어제의 술자리를 더 알차게 즐겼음을 알게 된 설천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른 이들을 둘러봤다.
“아마 우리가 죽기 전까지 사파는 우리의 적으로 있을 거야. 다만, 그것이 철천지원수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야.”
아마 사천맹과 마주쳤다면, 이런 얘기는 통하지도 않았을 거다.
사천맹엔 진짜 사천맹주가 정해 놓은 한도 앞에서 간을 보는 수준으로 막 나가는 놈들이 꽤 있으니.
대화를 해도 되는 상대라는 인식 자체가 안 생길 수도 있다.
백유가 이끄는, 그녀의 사고관이 깃든 흑룡학관이기에 가능했던 만남.
그로 인해 생기는 변화는 분명 큰 파도가 되어 돌아올 거다.
“친구가 되라곤 하지 않겠어.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해야 할 적으론 보지 마.”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 승리만을 쟁취하라는 건가.”
“그래, 그게 우리가 정파인 이유잖아?”
철백의 호응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얌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보며 웃었다.
“그렇죠? 당 소저.”
“당가는 대의를 벗어나지 않아.”
“그럼요.”
그러니 당가가 정파에 발붙이고 있지.
독과 암기를 쓰면서 정정당당하지도 않으면 진즉에 사파로 쫓겨났겠지.
당화유의 긍정과 함께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을 보며 설천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
“본론이라면?”
“정해야지.”
피식 웃으며 설천위는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강을 향해 웃었다.
“어제 술 마시면서 면상에 주먹 한 방 갈기고 싶은 상대가 하나쯤은 있지 않았나?”
* * *
“그럼 지금부터 무림학관 대 흑룡학관! 흑룡학관 대 무림학관의 친선전 개인전을 시작한다!”
“와아아아아아!”
“오오오오! 기다렸다고!!”
열렬한 반응.
형왕의 외침과 함께 비무대를 둘러싼 관중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본래라면 이렇게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 심판을 형왕이 직접 맡진 않았을 것이나, 단체전의 일도 있고 해서 형왕은 이번에 직접 비무대 심판을 자처했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더 훌륭하군.’
학생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
어중간하게 자신의 부하를 세웠다간 까딱 잘못하면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친선전이니만큼 당연히 노골적인 살수 및 암기, 암경의 사용을 금한다!”
짧게 규칙을 읊은 형왕은 몇 마디를 더 덧붙인 뒤 무림학관의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제1경기, 단체전에서 승리한 무림학관에서 먼저 선수를 내보내도록!”
제1경기.
앞으로 펼쳐질 12경기 중 첫 번째.
친선전이니만큼 한쪽이 먼저 7승을 거두더라도 경기가 끝나진 않을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세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12경기나 있으니 비록 제1경기에서 지더라도 판세를 뒤집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1경기에서 이겨 기세를 가져오는 이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나가지.”
철백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직한 걸음으로 비무대 위로 오른다.
그런 철백을 제지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개인전의 첫 시작이 될 아주 중요한 경기인데도 내공 한 점 없는 그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유는 당연히 하나.
말릴 필요가 없어서다.
쿵!
묵직한 걸음과 함께, 비무대 위에 선 철백은 당당하게 서서 입을 열었다.
“무림학관의 철백이다. 누가 나와 싸우겠는가?”
누가 자신과 싸우겠냐고 물으면서도 철백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흑룡학관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거구를 가진 사내.
그저께 있었던 술자리에서 철백과 꽤나 열띤 토론을 나눴던 사내.
“흥! 물살인 주제에 목소리 하난 크구나.”
철백의 시선에 호응이라도 하듯, 아니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망설임 없이 비무대 위로 올랐다.
“와……. 겁나 크네.”
신장도 크지만 주위를 압도하는 압도적인 근육량의 두 사람이 비무대 위에 서니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안겨 주는 두 사람의 대결이라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박빙의…….
“얼굴은 철 소협이 이겼어요!”
“응, 그건 그러네.”
“부정 못 하죠.”
“흠흠, 거완 저 친구가 참 야성적으로 생기긴 했지.”
무림학관과 흑룡학관 양측에서 나오는 기묘한 반응에 당당하게 비무대 위에 섰던 거완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회장! 회장까지 그러면 안 되지!”
“사실인 걸 어쩌냐? 저 친구는 잘생겼고, 넌 못생긴 축에 들잖아.”
돌직구를 던지네.
백유의 담담한 대답에 헛웃음을 지은 설천위는 철백과 거완을 바라봤다.
확실히 철백이 잘생기긴 했지.
야성미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미남은 미남이지.
그나저나 거완도 안면은 있다.
흑룡학관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때, 백유의 편에 섰던 친구니까.
그저께 술자리를 가질 때도 꽤 오래 대화를 나눴고.
그러다가 철백이랑 둘이 열띤 토론을 시작해서 쓱 빠졌지만.
그 토론의 결과가 이 대결의 성사인가.
뭐.
“볼만한 구경거리는 되겠네.”
솔직히 말해서 볼만한 수준을 넘어설 것 같긴 한데.
팔짱을 낀 설천위는 의자에 기대 비무대를 바라봤다.
몇몇 초대받은 손님들은 꽤나 높이가 있는 단상 위에 앉아 있고, 각 학관의 학생들은 비무대와 거의 비슷한 높이의 단상에 자리한 상황.
비무대를 둘러싼 모두가 흥미롭게 두 거한의 싸움을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움직인 것은 거완이었다.
격렬한 도약 같은 건 없었다.
외모로 놀림을 받아 생긴 분노 따윈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은 채, 담담하게 걸음을 내딛는다.
그 모습에 철백도 담담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서로를 향해 걸어간다.
그 걸음엔 어떤 조급함도, 어떤 불안감도 없다.
그저.
내가 더 강하다는 확신만이 깃들어 있을 뿐.
“흡!”
“흐압!”
서로의 주먹이 닿는 거리까지 도달한 순간, 두 사람은 일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식하리만치 정직하게 서로를 향해 휘두른다.
노리는 곳은 상대의 안면.
어떤 기교도 없이 똑바로 나아가는 주먹은 상대의 안면을 노리고 파고든다.
빠각!
주먹이 얼굴과 부딪쳐서 나는 것이라곤 상상하기 힘들 만큼 섬뜩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자, 몇 사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게 무인의 싸움은 아니…….
“……멀쩡하네?”
“살살 때렸나?”
“살살 때린 소리가 아니었는데?”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정도로 멀쩡한 두 사람.
한쪽 볼에 상대의 주먹이 붙어 있지만, 고개가 아주 조금 틀어졌을 뿐 시선은 여전히 상대를 향하고 있었다.
“좋군!”
“좋아!”
그리고 둘 사이에 무언가 통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웃은 두 사람은 동시에 주먹을 뗐다.
넓게 보폭을 벌리고.
하체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물러서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배제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빡!
거완의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내지르는 주먹.
그 주먹엔 오로지 한 가지 원리만이 담겨 있었다.
더 강하게.
상대를 완전히 부수는 것만을 목적으로.
방어 따위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위력만을 주먹에 담는다.
사파인 거완은 그렇다고 쳐도, 정파인 철백에겐 있어선 안 되는, 자신조차 돌아보지 않는 파괴만을 위한 주먹.
적수단의 단원 몇몇이 미간을 찡그렸으나, 그들의 우두머리인 무진은 오히려 감탄하며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둘 모두 진정 뛰어난 무인이로다.”
“예?”
“하지만…….”
“나무의 화려한 꽃을 보지 말고, 그 뿌리를 보아야 하는 법이니.”
무진의 질책 아닌 질책에 그의 주위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이들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의 싸움에 집중했다.
대체 뭐가…….
“……안 움직이네?”
“저렇게 주먹질을 하는데?”
적수단원 몇몇의 의아함이 담긴 물음.
그 물음에 대답한 건 그 근처에서 웃으며 지켜보던 야귀단주 소국이었다.
“뛰어난 하체가 몸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증거다. 너희처럼 허술하게 단련한 게 아니란 소리지.”
허술하다는 말에 몇몇이 발끈했으나, 차마 입을 열어 따지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소국한테 덤빌 순 없었으니까.
허나 그들의 반응에도 무진은 신경 쓰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훌륭한 청년들이오.”
참으로 훌륭하다.
“단순히 내공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육체를 단련한 것이 한눈에 보이니 어찌 칭찬하지 않겠나?”
무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 소국은 자신의 주위에서 작게 웃고 있는 야귀단 단원들을 바라봤다.
적수단원들이 제대로 말도 못 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모습.
“뒈지기 싫으면 그만 처웃어라. 너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니까.”
“……예!”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단숨에 분위기를 바꿔 버린 소국은 긴장으로 허리를 곧추세우는 단원들을 보며 혀를 찼다.
“어린 녀석들이 피를 토하는 단련으로 자신들을 따라잡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처웃는 꼬라지를 보니 조만간에 단원을 새로 모집해야겠어.”
“죄송합니다!”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보며 한 번 더 혀를 찬 소국은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이 머저리들에게 신경 쓰기보단 오랜만에 보는 볼만한 싸움에 집중하는 게 더 가치가 있으니까.
쾅!
쾅!
이젠 무슨 폭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공방.
아니, 이걸 공방(攻防)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막는다는 과정이 전혀 없는데?
마치 거대한 두 개의 성이 마주 보고 투석기만을 이용해 성벽을 부수는 것 같았다.
이 무림에서 참으로 보기 힘든 싸움.
거기에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내공이 없는 건가?”
소리가 바뀌기 시작할 때쯤부턴 거완의 주먹엔 권기(拳氣)가 깃들어 있었다.
내공을 이용한 공수(攻守).
당연히 이를 상대하기 위해선 반대쪽도 그에 맞는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데…….
“흐핫! 괴물 놈! 진짜 내공이 없구나!!”
거완과 주먹을 겨루는 철백의 몸에선 한 줌의 내공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흘러나오지 않는 걸 넘어서서 아예 깃드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하나.
“불굴(不屈)이로다!!”
절대 구부러지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
통상의 무인이 쓰지 않는 그 의지(意志)가 육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빠각!!
철백의 주먹이 여태까지와는 다른 소리를 내며 거완의 안면에 적중했고.
거완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기이한 정적이 비무대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