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231화-탐색전 (4)
“이상하리만치 주위에 흔적이 없더구나.”
“진짜 혼자 왔단 소리예요?”
“그런 것 같다.”
그건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인데.
곤괴의 정보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한 손으로 턱을 쓸었다.
언여휘가 강시들을 끌고 온 흔적은 찾았지만, 문제는 강시들을 끌고 온 흔적만 찾았다는 점이었다.
다른 술사들 없이, 그리고 다른 무인들 없이 언여휘 혼자만 움직였다는 소리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저랑 싸우러 오는데, 고작 강시들만 이끌고 왔다고요?”
“네 힘을 직접 겪어 본 녀석치고는 꽤 안일하긴 하구나.”
“그냥 안일한 수준이 아니죠.”
구마(龜魔).
그 녀석은 게임 본편에선 안 나왔던 녀석이지만, 그만한 강자에게 악귀를 집어넣을 수 있는 녀석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언여휘는 그 녀석과 연이 있다.
물론 정보를 확실하게 얻었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다.
정보가 있는데, 이렇게 안일하게 움직였다?
설령 내가 구마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너무 안일한데.
그것을 알고도 이렇게 움직였단 거라면…….
“노리는 게 더 있네요.”
“음, 아무래도 그렇지 않나 싶구나. 혈혼귀(血魂鬼)에 대한 악명은 나도 많이 들었거늘, 그 악명을 생각하면 상당히 허술한 공격이었다.”
곤괴의 동의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고 지금 당장 천하를 이 잡듯이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기다려야겠죠.”
“네 녀석처럼 속이 검은 녀석이라면 놈이 속내를 드러낸 뒤에도 큰 탈은 없을 것 같으니 딱히 걱정은 안 한다.”
“어? 걱정하셨어요?”
“안 한대도?”
“에이, 제가 손주 같은 나이이긴 하죠. 다 이해합니다.”
“이놈이?”
“그나저나, 혜아는요?”
“그 아이라면 숙소에 두고 왔다. 이런 곳에 아이를 데려올 순 없으니.”
곤괴의 대답에 설천위는 쓱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고요하기 그지없는 객잔의 분위기.
객잔 1층이란 곳이 식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시대다.
당연히 이런 곳에 와서 식사하는 사람은 딱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면 대개 술을 한 잔씩 기울이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의 친선전이 열리는 곳에 모인 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을 리 없었고, 떠들지 않을 리 없었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만 떠들어도 하루 종일 술안주로 써먹을 수 있는 것들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이 객잔은 이리도 조용할까.
이유야 뭐 간단하다.
“너무 간단히 받아들였나?”
문율을 흑룡학관에 보낸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저녁 시간쯤에 사하랑과 함께 돌아온 문율이 흑룡학관의 말을 전했다.
흑룡학관 쪽에서 같이 술자리를 가지길 원한다고.
시합은 이틀 뒤에 있으니 오늘 술을 마시는 건 그래도 괜찮지 않느냐는 논리.
당연히 백유의 제안이었고.
그 제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술 퍼마시면서 친하게 하하호호 할 사이는 아니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완곡하게 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할 때, 유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해 버린 거다.
그 결과가 이거.
“칼 두고 오라고 한 건 잘한 것 같기도 하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눈을 부라리며 술을 자작하고 있는 놈들이다.
분위기가 괜찮은 건 문율과 사하랑이 있는 곳과…….
“의외로구나. 저 아이는 마음이 깊은 만큼 질투도 깊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유예린과 백유가 있는 자리다.
웃으며 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참…….
두 사람이 좋은 분위기로 저러고 있으니 다른 이들도 불편한 분위기이긴 하나 대놓고 문제를 일으키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둘이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쯧, 저기 처자들이 너만 바라보는구나. 이 늙은이는 슬슬 빠져야겠어.”
“가시게요? 혜아 줄 고기라도 좀 싸 가시지.”
“저쪽에 이미 챙겨 놓은 아이가 있구나.”
곤괴의 말대로, 한쪽에서 보따리를 쥔 채 기다리고 있는 서하영을 발견한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혜아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요.”
“오냐.”
고개를 끄덕이곤 서하영과 몇 마디 나눈 후 고기를 받아 사라지는 곤괴.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몸을 돌려 백유와 유예린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래서, 대화 좀 나눴어?”
“예. 나눴죠.”
“응. 나눴지.”
대답도 비슷하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은 설천위는 쓱 주위를 둘러봤다.
어색한 공기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라 현실인가.
모두의 시선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해? 안 놀고? 여기를 빌린 것도 다 돈인데, 안 놀면 손해다?”
얘들이 돈 귀한 줄 모르네.
“놀 땐 놀고, 싸울 땐 싸워야지. 우리가 뭐 서로 원수 진 사이는 아니잖아?”
“원수다만.”
“응?”
갑자기 튀어나온 대답에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흑룡학관의 무리에 섞여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를 바라봤다.
백유의 명령으로 참석하긴 했지만, 넘치는 불만을 주체할 수 없는 표정.
“내 주위에 정파 놈들의 손에 죽은 이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오, 너 좀 있는 집안의 자식? 어디 집안?”
“흥, 이름을 댄다고 알긴 하느냐?”
“아니, 모르겠지?”
무슨 당연한 말을.
사파에 유명한 세력이 있긴 하지만, 그걸 전부 기억하진 못한다.
하물며, 얼굴을 봐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엑스트라의 가문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런데.
“죽은 이들이 있는 거랑 우리가 원수인 거랑 무슨 상관이냐?”
“……말이 안 통하는군. 네 녀석 같으면 옆집 사람을 죽인 사람과 하하호호 웃으며 지낼 수 있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묻는 녀석의 말에 주위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물며, 정파의 이들조차 몇 명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설천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있지.”
있다.
“옆집 사는 녀석이 다른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다가 역풍을 맞고 뒈진 거라면, 굳이 원수가 될 이유가 없지.”
“……뭐라?”
사파 전체를 비하하는 말로 들릴 여지가 있는 소리에 설천위와 대화하던 이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조차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설천위의 말대로라면, 사파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뒈져도 할 말이 없는 놈들 아닌가.
흑룡학관 사람들의 기세가 흉흉해지자, 무림학관의 이들 또한 기세를 끌어올려 객잔 내부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순간.
“그런데, 네 녀석의 그 비유는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아.”
설천위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의 곁에서 지켜보던 백유의 눈동자도 흥미진진함으로 반짝이는 순간.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우리가 딱히 대의명분 때문에 싸우는 건 아니잖아? 다 자기 밥그릇 지키려고 싸우는 거지.”
“뭐라?”
“설 소협!”
이번엔 흑룡학관뿐 아니라 무림학관에서도 반발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설천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무(武)란 결국 폭력이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공포가 된다.”
“아미타불, 설 시주. 정파의 무(武)는 자기 수양의…….”
“그거야 너희 사정이고. 일반 백성에겐 그딴 건 상관없어. 막말로, 스님이란 놈이 내려와서 단숨에 담벼락을 한주먹에 부수고 탁발을 요구하면 거기에 고기라도 한 점 안 넣을 수 있겠나?”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 위에서 무(武)는 먹고산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힘쓰는 것밖에 없는 수많은 무림 방파들이 나름대로 잘 먹고 잘사는 이유가 뭐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고기를 처먹고 술을 마시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의 무(武)가 폭력이라는 증거지. 아니면 이만한 돈을 어디서 얻었겠어? 뭐, 나무 기둥에 주먹질하면 돈이 나오나?”
“……아미타불.”
“흥, 정파 놈이 머리가 돌았구나.”
“그런데 말이야. 그 폭력이란 것도 겉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단 말이지.”
피식 웃은 설천위는 맨 처음 말을 꺼냈던 이를 바라봤다.
“우리는 너희의 존재를 위협이라 말하고, 그것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을 명목으로 내세워 폭력을 합리화했지.”
사파 놈들은 나쁘다.
그러니 우리가 지켜 주겠다.
그런데, 우리가 배가 고프니 돈을 좀 나눠 줘라.
간단하게 정리하면, 정파의 수금 원리는 이거다.
그런데.
“너희도 비슷하잖아?”
세상에 위협적인 건 많다. 나도 포함해서 말이지.
그러니 우리가 지켜 줄 테니 순순히 돈을 내놔라.
이게 사파의 논리다.
정파와 사파의 차이점은 위협의 대상에 자신을 대놓고 넣느냐 넣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딱히 원수가 될 이유가 없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겠다고 경쟁하다가 칼 맞아 죽은 건데, 뭐 어쩌겠어?”
“개소리…….”
“그러니까, 이렇게 모인 거야.”
상대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서로 밥그릇을 다투는 수준의 이웃이지만, 그 한도를 넘은 놈들이 있거든?”
설천위의 말에 직접 본 것이 있는 성무경이 가장 먼저 그 뜻을 이해했다.
“……단체전에서 봤던 것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인간이길 포기한 놈들.”
사파에도 규율은 있다.
무림맹이 내세운 규칙보다 훨씬 자유로우나 확고한 것.
선을 넘지 말 것.
사람을 사고파는 짓이나 사람을 제물로 삼아 힘을 얻는 짓.
그런 짓들은 사존(邪尊)이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설령 도덕적인 것이, 아니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니 그 길이 외도(外道)가 아님은 확실했다.
“우리 밥그릇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일에 너무 상심하지 말자고. 무림이란 게 원래 그런 곳이잖아?”
“그런 개소리를……!”
설천위의 무책임한 말에 결국 처음 말을 꺼냈던 흑룡학관의 학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순간.
설천위의 두 눈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크르르르르르.]
또 다른 한 쌍의 눈 또한 그를 향했다.
설천위의 등 뒤로 피어오른 용의 형상.
패융의 황금색 눈동자가 상대를 응시한다.
“마음에 안 들면 싸워라. 당당하게 검을 겨눠라.”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단숨에 객잔의 공기를 움켜쥐었다.
몇몇 이들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몇몇 이들은 역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정파와 사파를 떠나 무인의 근본은 그거잖아? 둘 사이의 문제에선 이긴 놈이 정의다.”
한순간에 객잔을 채우던 기세가 사라진다.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느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는 순간.
자리에 앉은 설천위가 술잔을 들며 웃었다.
“그러니, 우리 이 자리에선 무인 대 무인으로 어울려 놀자고. 앞으로 이틀이면 일단 어떤 놈들이 더 정의로운지 결판 날 테니까.”
고개를 돌려 백유를 바라본 설천위는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그렇지?”
“쿡.”
설천위의 물음에 작게 웃은 백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 그 잔에 부딪혔다.
“천위, 역시 정파보단 사파가 어울리지 않나?”
“어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설천위의 대답에 다시금 웃은 백유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곤 흑룡학관의 학생들을 바라봤다.
살짝 비딱하게 꺾은 고개와 함께 묘한 기세를 풍기며, 백유가 물었다.
“우리가 누구냐?”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성무경이었다.
술잔을 든 채 드물게 입꼬리를 올린 성무경이 대답했다.
“우리는 허울을 벗어 버린 이무기입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허울이란 가식이다.
가식을 벗어 버린 몸은 그 속살이 검을지 몰라도.
“우리는 흑룡이니.”
용은 용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해라. 하고자 하는 것을 이뤄내라. 그러나.”
퉁.
술잔을 내려놓으며 백유는 입꼬리를 올렸다.
“용으로서의 고고함을 결코 잊지 마라. 사도(邪道)를 걸어도 외도(外道)는 걷지 마라.”
사이한 길을 걸어도 결코 길을 벗어나진 않는 것.
그것이 사도(邪道)다.
당당하게 웃는 백유를 보던 설천위는 술병을 들어 그녀의 잔에 가득 채웠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백유는 다시금 술잔을 들어 유예린을 바라봤다.
“일단, 술 싸움부터 이겨 주지. 나는 지금 승리가 몹시 고프거든.”
“그건 안타깝게도 같은 의견이네요.”
유예린의 대답에 눈치껏 그녀의 잔에도 술을 채워 준 설천위는 쓱 자리에서 빠졌다.
뭐, 일단 이런저런 개소리를 씨부렁거려 공기를 바꿔 놨으니 나머진 알아서들 잘하겠지.
시작부터 하하호호 웃으며 어울려 놀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까.
이번 기회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생각에 한 가지 변화만 생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길을 벗어난 놈들이 상대라면 서로 손을 잡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
정사연합이 뭐 별건가?
이러다 보면 만들어지는 거지.
그나저나.
“왜 궁상맞게 혼자 드십니까?”
“혓바닥 하나는 괜찮게 놀리더구나.”
객잔의 구석.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곳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는 자신의 앞에 앉은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맹주께서 주의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었어.”
야귀단주 소국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