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230화-탐색전 (3)
“그래서, 아무런 일도 없으셨다고요?”
“어. 나는 별일 없었는데…….”
살존에게서 도망쳐 숙소로 돌아오고 한참 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찾아와 안전을 확인하는 유예린을 보며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유 매의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이곳저곳 찢어진 옷.
드문드문 단순한 힘에 의해 찢어진 것 같은 흔적도 보였다.
꽤나 격렬하게, 또 과격하게 싸웠다는 증거.
설천위의 물음에 잠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유예린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찢어진 곳들을 가렸다.
“조금, 대련을 했을 뿐이에요.”
“대련?”
누구랑?
아니, 갑자기?
대체 유예린이랑 대련을 해서 이렇게까지 만들 정도의 사람이 누구…….
생각을 이어 가다가 이내 답에 도달한 설천위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유예린을 바라봤다.
“설마, 백유랑?”
“꽤나 호쾌한 분이시더군요.”
너도 가끔 너무 호쾌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떠오른 말을 굳이 꺼내진 않은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유예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따라와. 치료해 줄 테니까.”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따라오는 유예린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설천위는 신의의 조언으로 미리 준비해 놓은 상비약을 꺼냈다.
딱히 내상을 입을 정도로 싸우진 않은 것 같아 보이니 간단한 외상에 약만 바르면 되겠지.
“갑자기 대련은 왜 한 거야?”
“……조금, 기분을 풀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나 그 사람이나.”
그러니까 기분을 왜 대련으로 푸느냐고.
어차피 며칠 뒤면 싸워야 할 상대랑.
전력 노출이잖아.
한숨을 삼키며 유예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 멀쩡하게 돌아왔으니 충분해.”
“멀쩡하진 않은……. 흡!”
“어? 여긴 좀 세게 맞았는데?”
시퍼렇다 못해 보라색으로 변한 어깨에 설천위는 구태여 힘을 줘 약을 발랐다.
나름 고통이 있는지 유예린이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본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뗐다.
“나를 지켜줄 필요는 없는데.”
“……그냥, 아무것도 못 하는 제가 싫었을 뿐이에요.”
“어쩔 수 없지. 그 아줌마가 나이가 몇인데.”
아마 못해도 오십은 넘겼을걸?
게임에서도 정확한 나이는 안 나와서 잘 모르겠지만.
살존(殺尊)이라는 별호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십 년도 더 전이다.
그 아줌마의 재능도 장난 아니긴 한데, 현경이란 경지는 그리 간단하게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삼십 대 중후반이다.
유예린이랑은 최소 십 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소리지.
“나이는 핑계가 될 수 없어요.”
물론 유예린은 그런 것이 변명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지만.
“에이,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나이가 왜 핑계가 안 돼?”
“죽음은 핑계로 되돌릴 수 없어요.”
약간의 불안감이 담긴 눈동자.
그 안에 심어진 불안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몇 번이나 납치돼 죽을 위기를 넘긴 어떤 놈 때문이 아닐까.
연락을 하지 않는 것에 유독 화를 내는 유예린의 행동을 떠올리며 설천위는 쓰게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벽을 의지만으로 넘을 순 없어. 알잖아? 조급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알지만…….”
입술을 깨무는 유예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왜일까.
지금 이 순간에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혼자라서 불안하다면 옆을 봐.”
“……예?”
“옆을 보라고. 반드시 곁에 있어 줄 테니까.”
“…….”
묘한 침묵.
내 말이 너무 오글거렸나.
뒤늦은 후회가 설천위의 사지의 신경을 뒤틀려던 그 순간.
“바보.”
작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유예린이 어느새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을 등진 채 활짝 웃었다.
“바보.”
* * *
“천위.”
“엉.”
“어제 밤늦게 유 소저가 자네의 방에서 나왔다는 정보가 있던데.”
“우리 서로 그런 부분은 파고들지 말자. 너 내가 본 게 없는 것 같아? 권왕 선배한테 편지라도 부칠까?”
“흠흠, 날씨가 참 좋구먼.”
이른 아침.
철백과 함께 기마 자세를 하던 설천위는 불리해지자 딴 곳을 바라보는 철백을 보며 혀를 찼다.
“나는 공인된 사이이지만, 넌 아직 반쪽이잖아? 분발해라. 넌 걸리면 죽어.”
“어허, 죽는다니? 어떤 의미로 이미 허락을 받은 거나…….”
“아니, 권왕 선배 말고. 내가 알기론 서 소저 오빠들이 장난 아닐걸? 오죽하면 자기 아버지를 압박해서 학관을 찾게 만들겠냐.”
“아…….”
그걸 이제 깨달았냐.
이 곰탱아.
아니, 머리는 좋으면서 이런 부분은 왜 저리 둔할까.
“……그럼 일단 형님들을 찾아뵈어야 하나?”
“뭐, 사랑의 도피라는 선택지도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동생을 아끼는 형님들이라면 당연히 서 소저도 형님들을 좋아할 터. 가족이 갈라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뭐, 그런 쪽은 철저하네.
생각해 보면 철백은 가정사가 평범하면서도 꽤나 독특하지.
……나중에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 하나.
무림맹에 들어간 뒤에 생각해 봐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철백과 대화를 나누던 설천위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무릎을 폈다.
동시에.
쿵!
그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바벨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확실히 내공이란 게 대단해.
딱히 운용하지 않아도 수련 중에 근육에 스며들어 말이 안 되는 성능을 만들어 내니까.
내공 없이 이런 수련은 무리지.
응.
무리…….
쾅!!
“야, 바닥 부서진다. 천천히 내려놔라.”
“음. 주의하지.”
자신의 세 배는 되는 무게를 짊어지던 철백이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며 근육을 푸는 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슬 기초의 완성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림맹에 들어가서 이삼 년은 구르고 나서야 깨닫고 개화를 준비했을 재능이…….
‘장난 없겠는데.’
최소 4년은 빨라졌다.
백유보다 이쪽이 더 장난 아니게 성장할 것 같기도 하고.
백유야 플레이어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어느 정도 제한이 있는 재능이었지만, 철백은 그딴 거 없는 아예 한계를 모르는 재능이니까.
솔직히, 진짜 기대된다.
그나저나.
“……쟤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냐?”
“음, 듣자 하니 어제 문율을 비롯한 잠룡대와 만났다고 하더군.”
“문율이랑?”
눈빛을 보아하니 아주 제대로 빠진 것 같은데?
무슨 아침부터…….
“꺗?!”
오, 비명도 뭔가 변했다.
다른 쪽에서 수련하던 문율을 보는 데 빠져 주변 경계에 소홀했는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하랑의 모습에 설천위는 시선을 돌렸다.
사하랑을 놀라게 한 원인.
벽에 기대서 걷던 설천강의 두 눈이 사하랑을 향하고 있었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뒈져 가고 있어?”
“어제 가무학이란 친구와 만나 술 대결을 벌였다더군.”
“경기장에서 못 끝낸 경기를 술 대결로 했다고?”
아니, 이 인간들이 드디어 미친 거야?
“부상을 숨기며 자신은 멀쩡하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려 불이 붙었다고 하던데.”
“정녕 미쳤구나.”
특히 가무학.
걔 진짜 돌아이네.
청수랑 싸워 힘을 소진한 상태에서 천강이 형이랑 싸웠으면 진짜 몸속이 아주 개판이 됐을 텐데.
그다음 날 바로 술 싸움을 벌여?
죽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구나.
“어젯밤 여 소저가 업고 돌아왔다던데.”
“그건 또 장난 없네.”
……설마 여웅 앞이라고 객기를 부린 건가?
아니 뭐, 설가의 핏줄은 원래 술을 잘 마시니 그리 객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긴 하는데…….
“흑룡학관의 학생이 무슨 일이냐?”
왜 멀쩡한 척 사하랑을 경계하러 가냐고.
꿀물이나 처먹고 침대에 누워나 있지.
“형, 저리 꺼져.”
“뭐, 인마?”
“괜히 꼬장 부리지 말고 저리 가라고. 우리 친선전으로 왔어. 구경 좀 오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잘못이지 않으냐? 다른 학관의 수련을 지켜보는 것인데.]
“에이, 어차피 하는 거라곤 체력 단련밖에 없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천마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설천강을 내쫓은 설천위는 어색하게 서 있는 사하랑을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사람을 불렀다.
“문율아! 이리 와 봐!”
“네!”
“자, 잠……!”
설천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사하랑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도착한 문율이 특유의 순한 눈빛으로 설천위와 사하랑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순한 얼굴과 달리, 살짝 헤쳐진 옷 사이로 드러나는 선명한 근육.
그 위로 흐르는 땀.
대충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묻는 문율을 보며 설천위는 사하랑을 가리켰다.
“흑룡학관에서 교류를 위해 찾아오셨다. 대충 안내해 드리고, 사람들이랑 교류 좀 해.”
“네? 교류요?”
“어. 교류. 뭐, 우리가 여기에 흑룡학관이랑 서로 죽이려고 온 건 아니잖아? 무공에 관한 견해도 좀 나누고, 서로의 발전을 위한 그런 좋은 시간을 가지라고.”
“예? 그게 무슨…….”
“자, 실행! 어차피 너희는 이제 시간도 없으니까 적랑대에게 배울 점을 찾아 배워라.”
문율을 사하랑 쪽으로 밀어 버린 설천위는 사하랑을 보며 웃었다.
“이 친구한테 이야기 좀 들으면 이 친구를 적랑대가 있는 곳에 데리고 가서 배울 점을 알려 주세요. 백유에게 제가 보냈다고 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문율을 사하랑에게 팔아넘긴 설천위는 어색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취지는 참 좋으나, 뜬금없구나.]
“이게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이란 거예요.”
[그림?]
“그런 게 있습니다.”
사파라고 꼭 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혼들의 물음에 대충 답하며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다시 철백의 곁으로 향했다.
어느새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철백은 이번엔 선 채로 바벨을 머리 위로 들었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저거 거의 200㎏은 넘을 것 같은데.
인간인가, 이거.
과격하다 못해 선을 넘어 버린 철백의 수련을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나.
얘가 강해지면 나야 좋지.
수련이나 하자.
오후에는 어제 하다 만 데이트나 마저 할까.
* * *
“흐응? 그래서, 천위가 보냈다고?”
“예.”
흑룡학관의 학생들이 머물고 있는 객잔.
1층에서 차를 마시던 백유는 자신의 앞에 선 문율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너는 천위랑 조금 닮은 향기가 나네?”
“형님에게는 많은 것을 배우고 본받고 있습니다.”
“응, 그래 보여.”
귀여운 외모와 다른, 굳센 태도로 대답하는 문율을 보며 백유는 웃었다.
“좋아. 허락할게. 애초에 친선전이니 교류를 위한 이런 행동은 좋다고 생각하거든.”
“감사합니다.”
“성무경.”
“예. 회장.”
“들었지? 부대주랑 같이 이것저것 알려 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성무경이 문율에게 턱짓했다.
그 모습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문율이 그 뒤를 따르고, 사하랑도 그 뒤를 따르던 순간.
“아, 하랑아?”
“예.”
백유가 사하랑을 멈춰 세웠다.
그 부름에 사하랑을 비롯한 다른 이들까지 멈춘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순간.
백유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나는 네 뜻을 존중해. 자유로워야 사파지.”
“……그건.”
“에이, 딱히 부정 안 해도 돼.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게 사파잖아? 단.”
짧게 말을 끊은 백유는 짙은 미소와 함께 사하랑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모든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는 거야. 그 책임을 위해선 이곳에서 뭐가 필요할지 말 안 해도 알지?”
사파에서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백유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사하랑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좋아! 이해했으면 됐어! 참고로 난 언제나 응원한다고. 상담 같은 것도 환영이야! 미려는 이런 쪽에선 재미가 없어서.”
“회장, 회장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여미려가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을 손짓으로 끊은 백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쪽에서 손을 내밀었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어찌 보면 이쪽에서 손을 내민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단순히 사하랑의 개인적 일탈일 뿐.
학관 단위의 움직임은 아니다.
그렇다면 학관 단위로 움직이려면 어찌해야 할까.
짧은 고민을 품던 백유의 시야에 숙취로 아직도 책상 위에 머리를 박고 있는 가무학이 보였다.
“응. 어울리는 데는 역시 술자리만 한 게 없지?”
어디, 무림학관의 샌님들이랑 한번 놀아 볼까?
그 녀석이랑 같이 마시고 싶기도 하고.
상처에서 퍼지는 미약한 욱신거림을 느끼며 백유는 혀로 붉은 입술을 핥았다.
“무림학관에 전해. 술자리나 한번 가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