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228화-탐색전 (1)
“죄송합니다.”
“아니, 훌륭한 조치였어. 굳이 시간을 끌어서 애들의 치료를 늦출 필요는 없었으니까.”
흑룡학관의 학생들이 머무는 객잔.
돌아오자마자 즉시 시작된 회의에서 고개를 숙이는 성무경을 향해 백유는 손을 저었다.
“천위와 싸우다가 너까지 다쳐서 개인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면, 그게 더 큰 손해야.”
“그 괴물 같은 인간을 상대로 그 정도로 버틴 것만 해도…….”
백유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여미려는 단숨에 집중된 시선에 말을 흐렸다.
“에이! 뭘 또 그리 째려봐? 미려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허나…….”
“천위가 괴물 같은 건 사실이야. 아마 진짜 능력은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학관에서 함께했을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기세를 풍기고 있으니, 아마 그 경악스러운 술법만 성장한 것은 아닐 터.
설천위의 힘을 가늠한 백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모두를 바라봤다.
“자, 우리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있어.”
단체전은 졌지만, 그렇다고 개인전까지 질 순 없지.
“출전 명단은 정했지만, 순서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 저쪽의 대장도 나랑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아마 원하는 상대와 싸울 수 있게 될 거야.”
이런 성격의 대회는 약한 학생이 강한 학생을 만나 처참하게 지기만 하는 경기를 그 어느 쪽도 원하지 않는다.
나약한 개인을 향한 비난은 물론이고 친선전에 버리는 패를 냈다고 뒤통수가 아주 간지러워질 테니까.
그러니 상대 쪽에서도 충분한 전력을 낼 터.
백유의 말뜻을 이해한 이들의 눈이 반짝이자, 백유는 의자에 등을 기대곤 찻잔을 들었다.
“습격 때문에 쉬는 시간을 무려 사흘이나 준다고 하니 잘 생각해. 자신이 누구와 싸우고 싶은지.”
* * *
“고생 많았다.”
“고생은 무슨.”
무림학관의 객잔.
워낙 부상당한 잠룡대원이 많아서 일단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한 상황.
설천위는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철백을 향해 대충 손을 휘저었다.
“죽지 않고 버틴 녀석들이 고생했지.”
주술을 해제하긴 했어도 상당히 강력한 독이었는지 전원 발작을 일으켰다.
발작이란 것이 금세 가라앉으면 별문제가 없지만, 계속 이어지면 당연히 생명에 지장이 생긴다.
그런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버틴 녀석들이 진짜 고생한 거지.
“그런데, 왜 혼자 왔어?”
“나머지는 모여서 회의 중이다.”
“나랑 천강이 형도 없는데?”
“너는 몰라도 설천강 선배는 싸울 상대가 이미 정해진 것 같아서 그냥 시작했다.”
“아, 그 가무학? 결판 안 났다고 했나?”
“가무학이란 자가 생각보다 더 끈질기더군.”
“그럼 사흘 안에 회복하기 힘들 텐데.”
“설천강 선배도 그리 멀쩡하지 않으니 끝날 때 약속을 잡은 것 같다.”
뭐야, 왜 거기가 더 주인공 같은 전개를 펼치고 있었던 거야.
직접 못 본 게 아쉽네.
끝나고 서로 딱 ‘……이다음은 개인전에서 마무리하지.’ 이런 대사를 친 거 아니야?
“오쉣!”
“뭐냐?”
“아니, 상상하니까 오글거려서.”
뭐, 그럴 수 있긴 하지.
어휴.
그래도 오글거리는 건 여전하네.
부르르 몸을 떤 설천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멀쩡한데 굳이 회의에 빠질 필요가 없지. 가자.”
“그래, 그럴 것 같아서 내가 온 거다. 아직 본격적인 회의는 시작 안 했을 테니 가자.”
싸움을 막 끝냈으니 나름 배려한 거겠지만, 진짜 쓸모없는 배려였네.
예상대로의 반응에 설천위와 함께 방을 나선 철백은 곧장 회의를 위해 모인 별채로 향했다.
큰 방이 있어서 회의실로 쓰기로 한 곳.
도착하니 마침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모였다.
“역시 멀쩡하네요?”
“설 형이 생각보다 튼튼하긴 하죠.”
“그렇게 굴렀는데 몸이라도 튼튼해져야지.”
서하영과 주현운의 환영에 대충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마치 노린 것처럼 비워 놓은 유예린의 옆자리.
어차피 부를 생각이었나 보네.
“몸은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그럼 다행이네요.”
부드럽게 웃는 유예린.
참, 여러 번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너무 눈부셔서 부담스럽네.
“어머?”
설천위가 쓱 고개를 돌리자 소매로 입가를 가린 유예린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괜히 더 뻘쭘해진 설천위는 마침 자신의 시선에 들어온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호위가 왜 여기에 있어?”
“호위를 위한답시고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아, 그래?”
담담하게 말하며 차를 마시는 창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차피 넌 대회에도 안 나가면서 왜 회의에 낀 거야? 설마 혼자는 심심해서?”
“……그냥 흥미가 있어서 함께하는 것뿐이다.”
“맞아요! 혼자 외면당하면 쓸쓸하니까 같이 있는 거죠!”
“아니, 서 동생. 그게 아니고…… 쓸쓸하진 않…….”
“창 언니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데!”
이야, 이걸 이렇게 멕이네.
서하영 쟤는 똑똑한데 가끔 맹해서 저렇게 의도치 않게 사람을 멕인다니까.
얼굴이 붉어진 창린이 서하영을 말리기 시작하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다시 유예린을 바라봤다.
아, 아직도 웃고 있네.
“크흠, 그래서 계획은 얼추 세웠어?”
“계획…… 을 세우고 싶지만,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해서요.”
승산 있는 상대와 싸우게 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원이 승산이 있는 상대와 싸울 수 있느냐?
그건 또 아니다.
무림학관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긁어모으긴 했지만, 상대편도 흑룡학관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긁어모은 상태.
전부 이긴다는 것은 너무 과한 바람이겠지.
그러니 전략적으로 생각한다면 약한 사람을 강한 사람의 상대로 내보내는 것이 맞겠지만…….
“친선전이잖아요?”
방긋 웃은 유예린은 이곳에 모인 이들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
“사흘의 여유가 있으니,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싸우고 싶은 상대를 찾아보세요.”
어차피 단체전은 이겼겠다.
괜히 치졸한 수까지 써 가면서 승리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저도 싸우고 싶은 상대가 있거든요.”
* * *
“설 공자! 나가요!”
“응? 갑자기?”
“길거리에 보부상이 엄청 많대요! 각지에서 모인 물건들이 바글바글하다던데요?”
아!
하긴, 이만한 소식을 못 들으면 상인이 아니지.
흑룡학관은 몰라도 무림학관의 학생들 중에서 강자의 반열에 선 이들은 대체로 집이 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적당히 호기심을 끌 수 있는 물건이라면 충분히 팔 수 있겠지.
심지어 어린 나이인 만큼 주변 환경을 이용해 살짝 자극만 해도 값이 좀 비싸도 자존심 때문에라도 구입할 학생이 있을 확률도 높았고.
장사하기엔 딱 좋은 환경이긴 하네.
몇 달 전부터 이야기가 돌았을 테니 팔 물건을 준비하기에도 수월했을 테고.
“유 소저도 준비 다 했대요!”
“그래? 그럼 갈까?”
“참고로 소윤혜 언니랑 주 공자는 이미 나갔어요! 따로 돌아다닌다고…….”
어? 그래?
꽤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는데, 주현운?
설천위가 주현운의 용기에 감탄하는 순간.
[뭐라?! 내 이놈의 자식을 그냥……!]
[허허, 참으시게. 어린 친구들끼리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어허, 천 형님! 다 아시는 분이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자네야말로 다 늙어서 죽은 사람이……. 이게 다 주책일세.]
[주책이라뇨? 내 이놈을 반드시……!]
……다음에 영역을 펼쳐서 수련하면 주현운은 살아남기 힘들겠어.
조금만 더 힘을 기를 시간을 주자.
주책을 떠는 소백진을 쓱 치운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옙!”
아침 수련도 다 해서 술법이나 연구할까 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지.
잽싸게 밖으로 나가는 서하영의 뒤를 따라 나가니, 유예린과 창린이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거기에다 듬직하게 서서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철백까지.
“왜 기다리고 있어? 빨리 말했으면 바로 나왔을 텐데.”
“설 공자는 일단 환자니까요.”
“뭐, 환자 취급을 하는 건 괜찮은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유예린과 대화를 나누던 창린을 바라봤다.
흐음……. 뭐, 상관없나?
자신의 시선에 왜냐는 물음을 얼굴에 띄우는 창린에게서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럼 갈까?”
“후후, 어서 가요.”
* * *
“오,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네.”
“그러게요. 저기에서 원숭이 공연도 하고 있네요.”
저잣거리로 나오자 사람들이 꽤나 북적거리는 게 보였다.
단체전 같은 경우엔 망루에 올라가야 해서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개인전은 얘기가 다르다.
그냥 적당히 넓은 비무대 위에 올라가 싸우는 거니 구경꾼들이 구경하기에 괜찮다.
심지어 이번엔 황실에서 자신들이 올라가 구경할 곳을 만드는 김에 일반 구경꾼의 자리도 만들어서 구경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뭐, 여기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그걸 생각하고 온 건 아니겠지만.
여하튼, 무림에서 상당히 드물게 벌어지는 구경거리이다 보니 사람들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
장사꾼들도 그래서 왔을 테고.
주변 객잔들도 돈 좀 만지겠어.
생각보다 더 많이 모인 인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설천위는 걸음을 멈췄다.
“……냄새 끝내주네?”
“어서 옵쇼! 닭꼬치 하나에 철전 여덟 냥입니다!”
“가격도 양심적이고.”
이런 곳에서 장사하는 것치곤 그리 바가지요금도 아니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상인들끼리 담합하여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정도 가격 인상은 이동 시간 같은 걸 고려하면 납득 범위 내였다.
“무림인들이 주된 고객일 텐데 감히 바가지를 씌울 생각을 하는 용감한 상인은 거의 없긴 하죠.”
닭꼬치를 주문하는 설천위의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그가 주는 닭꼬치를 받아 들고 고개를 돌렸다.
“서 동생이랑 철 소협은요?”
“그새 사라졌어. 서 소저가 그냥 끌고 가던데?”
“힘이 넘치나 보네요.”
“활기차긴 하지.”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창린은 설천위가 주는 닭꼬치를 받아 들었다.
“오? 맛있는데?”
“용케 3개를 사셨네요.”
“서하영이 철백을 데리고 움직일 것 같았거든. 이만한 인파면 그럴 수 있지.”
걔, 이런 상황에서는 주위를 잘 안 돌아보니까.
지금 아주 즐거움에 들떠서 철백을 이끌고 이리저리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이럴 거면 왜 모여서 나왔나 싶긴 한데…….
“뭐, 우린 우리대로 놀자고.”
창린이 껴 있어서 데이트라고 하기엔 묘했지만, 뭐 셋이서 논다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유예린이랑 단둘만 있으면 긴장돼서 제대로…….
“흠흠.”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헛기침과 함께 털어 낸 설천위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예린의 시선을 의식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돌아다니자.”
이럴 땐 딴생각을 할 겨를 없이 싸돌아다니는 게 최고지.
당당하게 앞장을 선 설천위는 그대로 유예린과 창린을 데리고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노점에서 음식을 사 먹고.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고.
동물들의 묘기도 구경하고.
차력 쇼도 보고.
암살자도 보고.
“……응?”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호오? 이상하구나. 딱히 신경 쓸 이유는 없을 터인데.”
단숨에 뒤를 잡힌 설천위.
그 순간 반응한 창린이 도를 뽑기 직전.
“누구시죠?”
그녀를 막은 유예린은 담담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위협적이나 살기는 없었다.
“어리석구나. 내가 살기를 품지 않았다고 해서 긴장을 풀다니. 죽기에 딱 좋아.”
매혹적인 목소리.
남자라면 한 번쯤 돌아볼 것 같은 눈부신 외모와 굴곡진 몸매.
설천위가 보고 반응한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외모다.
하지만.
‘……몰랐어.’
이런 사람이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마른침을 삼킨 유예린이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후배 설천위가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호오, 역시 넌 날 알고 있구나.”
얼굴에 늘어진 한 줄기 긴 앞머리를 옆으로 치운 여인은 설천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상하구나, 내 얼굴을 아는 이가 이 무림에 그리 많지 않거늘.”
“……그냥 예뻐서 본 거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안 된다. 네 반응은 명백히 나를 아는 이의 것이었으니.”
“그렇겠죠?”
답을 요구하는 여인의 모습에 설천위가 자신의 실수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고민하는 순간.
“천위, 양손의 꽃이 아니라 사방이 꽃이구나?”
여미려를 대동한 백유가 미소와 함께 등장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사방이 가로막힌 상황.
겉으로만 보면 참 좋은 그림인데…….
‘이 누님 때문에 좋지가 않네?’
매혹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변장 따윈 하지 않는 당당한 암살자.
그 별호는 살존(殺尊).
무려 오존(五尊)의 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