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226화-만시(萬尸) (3)
수룡으로 변한 패융의 두 번째 낙하.
그 자체로 폭격이나 다름없는 공격.
본래라면 그 충격으로 온갖 것들이 사방으로 튀어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겠으나…….
“하핫!”
설천위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언여휘의 머리 위.
거대한 결계가 패융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것은 패융을 멈추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몸 주위를 돌며 파괴력을 만들어 내는 물의 힘조차 흩어 내고 있었다.
[괜히 노괴가 아니구나.]
[미친 것들은 대체로 재능이 확실하지.]
“꺄하! 칭찬 고맙네! 늙다리들!”
어깨를 으쓱인 언여휘는 서서히 누그러들기 시작하는 패융의 기세를 느끼곤 설천위를 바라봤다.
“우리 동생, 진짜 말도 안 되네?”
“잘 막아 놓고 뭐라는 거냐.”
언여휘의 말을 들으며 설천위는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천천히.
허나, 멈추지 않는다.
영력을 뿌리며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잘 막아? 응, 잘 막았지.”
설천위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언여휘는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런 물건까지 쓰는데, 당연히 막아 내야지.”
“그게 뭔데?”
“인간을 쥐어짜 놓은 거.”
언여휘의 간단하기 그지없는 설명에 설천위는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몇이나?”
“몰라. 한 백은 넘지 않았을까? 널 상대하려면 그 정돈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지.”
“그럼, 저 강시들까지 포함하면 이번 일을 위해 최소 천은 죽였겠군.”
“뭐, 대충 그쯤 되지 않았을까?”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언여휘는 구슬을 이리저리 만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그 덕분에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나름 가치 있는 노력이었지.”
“노력? 희생이 아니라?”
“어머, 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호호 웃은 언여휘는 구슬을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 설천위와 두 눈을 마주한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람이 타인을 짓밟고 그 목숨 위에 서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희생이란 단어 따위로 포장할 일이 아니지.
“내가 노력해서 얻은 힘인데 희생이라니, 거참 섭섭한 말이네.”
“과연.”
언여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순순히 인정했다.
“너는 역시 인간이 아니네.”
“어머? 그런 섭섭한 소리를?”
“섭섭하고 뭐고, 그게 팩트인걸.”
어느새 언여휘와 세 걸음 정도의 거리까지 근접한 설천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언여휘를 향해 도를 겨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음……. 나는 아직 많긴 한데…….”
살짝 몸을 꼬며 배시시 웃던 언여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설천위의 차가운 시선에 씩 웃었다.
“아무래도 넌 더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늙어서 눈치는 빠르구나.”
[참수(斬首)]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치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설천위의 도가 언여휘의 목을 베었다.
“어머, 소녀한테 늙었다니? 뭐, 눈치가 빠른 건 정답이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목.
완전히 잘려서 허공에 떠오른 얼굴이 그대로 부유하며 입을 움직였다.
“전에 무림학관을 습격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이번엔 나름대로 많이 준비해 왔어. 이 몸도 그 준비 중 하나.”
“아예 죽지 않는 인형을 보냈나?”
“응. 아, 참고로 전에 했던 그 낙인도 이젠 안 통해.”
“아예 분리시켰군.”
본체와 아예 연결되지 않은, 혼의 파편으로 만든 분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대충 언여휘의 상태를 가늠한 설천위는 도를 집어넣었다.
“어머? 그만 싸우게? 나야 좋긴 한데, 의외네?”
“너를 상대하는 데 도(刀)는 비효율적이라 집어넣은 것뿐이다.”
목을 베어도 죽지 않는다면 도는 의미가 없지.
소백진 본인이 직접 싸워도 별 소용이 없을 거다.
설천위의 의도를 이해한 언여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술사들의 싸움이라는 게 이런 거지. 무인들처럼 야만적으로 싸우진 않거든.”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바라봤다.
패융을 막고 있는 결계.
낙하하던 힘은 거의 사라졌지만, 패융의 주위를 감싸는 물의 힘을 상쇄하기 위해 아직도 그 힘을 뿌리며 버티고 있다.
거기에다.
“꽤나 신기한 수를 쓰는군.”
“관록의 차이라고 할까?”
공중에 떠 있던 머리를 다시 목 위에 붙이며, 언여휘는 가슴을 내밀었다.
“내용물을 말해 줄까?”
“아니. 굳이 말 안 해 줘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군. 독 아니면 저주겠지.”
설천위의 시선 끝.
결계의 아래에 자리 잡은 보라색 형태의 구체는 기이한 광택을 내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마 결계가 부서지면 사방으로 흩어지는 형태의 술식일 터.
아까 구슬을 던진 건 저것의 발동을 위해서겠지.
“반쯤 정답! 정확히는 둘 다야!”
“그래?”
그건 몰랐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언여휘를 바라봤다.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 밝은 분위기.
언제라도 대화할 생각이 있다는 듯 무방비한 자세.
그런 그녀를 보며, 설천위는 가장 궁금했던 점을 꺼냈다.
“목적이 뭐냐?”
“응? 뭐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다.”
“아, 설마 억지로 화를 참으면서 내게 말을 거는 이유가 궁금해서 그런 거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언여휘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그렇게 깊은 뜻이 있진 않은데.”
“거짓말도 작작해라. 황제의 이름을 내걸고 열린 경기에 이곳에 모인 화경급 고수가 최소 셋 이상.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습격을 한다고?”
“못 할 거 있나? 황제 본인이 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황실이 무림과 엮이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황실이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림인끼리의 싸움일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수백 단위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오면 결국 황실도 움직일 텐데.”
가장 궁금한 것이 이거다.
언여휘는 술사다.
그러므로 무림인보다 황실이 더 위협적인 상황.
황실에는 황제를 보필하는 수많은 술사가 있으니 당연히 무림보다 건드리기 어렵다.
또한, 황제가 부리는 병력은 술법으로 막기 힘드니 당연히 술사는 무림보다 황실이 상대하기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괜히 음지의 조직들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이는 게 아니다.
숫자에서 나오는 권력이라는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언여휘의 이런 행동은 그 권력을 향해 도전장을 던지다 못해 아예 침까지 뱉는 수준이다.
이 일이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갈 터.
이 육도(六道) 세계의 황실은 더럽게 부패한 곳이긴 해도 철저하게 지켜지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바로 외부를 향한 황실의 권위는 절대적이란 것.
그들은 이 사실에 아주 광적으로 집착한다.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과 피로 피를 씻어 내는 권력 다툼 속에서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키려고 기를 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밥그릇을 외부에 뺏기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황제의 이름을 걸고 개최한 대회에서 이런 난장판을 벌인다?
그 대가는 3족을 멸하는 정도로도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친선전을 언여휘가 습격한다는 일 자체가 게임 속에선 없었던 사건이기에 설천위는 화를 꾹 참고 그녀의 속내를 떠보고 있는 것이다.
모르고 넘어가선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에.
“우리 동생은 생각도 깊네?”
“당신 같은 늙다리한테 동생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데.”
“어머,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입에 발린 말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호호 웃으며 묻는 언여휘를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궁금한 건 사실이야.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고.”
“응응.”
“그런데 말이야.”
그대로 언여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설천위는 지그시 그녀를 눌렀다.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거든.”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동심(不動心)]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설천위의 눈에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이들이 보였다.
독에 당했는지 발작을 일으키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이들.
성무경과 사하랑에게 제압되어 몸을 떠는 이들.
생각보다 독이 더 넓게 퍼졌는지, 꽤나 거리가 떨어진 6구역이나 9구역에서도 고통스런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수개월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노력 전체가 부정당해 버렸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성장하기 위해 악을 쓰던 이들이 부정당했다.
가족이라 말하기엔 쑥스럽고 단순한 친구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까운 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괴롭게 신음하고 있다.
“후.”
가볍게 호흡을 내뱉은 설천위는 천천히 언여휘의 머리에 올린 손에서 힘을 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경기장 전체에 흐르는 이 악취.
이것이 독이자 주술의 일종이라면.
“오랜만에 쓰는군.”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설천위는 다시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짝!!
경쾌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로 시작한 파장은 영력을 품은 거대한 울림이 되어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사계(挱界) 파주(破呪)]
영력을 품고 퍼져 나가던 독이 흩어진다.
독 자체는 남았으나 그 안에 담긴 영력이 흩어지는 것으로 그 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어머?”
단숨에 주위로 퍼져 나간 독들의 효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을 확인한 언여휘는 놀란 얼굴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파마(破魔) 쪽 주술도 쓸 줄 알았어?”
“수색 계열이다.”
“응, 기본은 그런 것 같은데……. 참.”
주변을 보며 고개를 저은 언여휘는 다시 설천위를 바라봤다.
“역시 그냥 상대하는 건 무리 같네.”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뭐, 딱히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둘까? 본심을 안 보이는 대화는 서로를 지치게만 할 뿐이지.”
“그걸 알았으면 순순히 대답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간단하게 말한 후 설천위는 수습을 시작한 형왕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다시금 언여휘를 바라봤다.
노골적으로 시간을 끄는 언여휘의 행동에 맞춰 준 이유.
“만시(萬尸).”
설천위의 한 마디에 움찔한 언여휘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딱딱하게 굳은 시선.
대체 어디서 그 단어를 들은 것이냐.
그런 의문이 담긴 시선에 설천위는 말없이 양팔로 뒷짐을 졌다.
“천 이상의 시체와 그 이상의 혼을 제물로 바쳐 빚어내는 악귀(惡鬼).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재(災)에 근접한 힘을 가지며 조금만 성장을 거쳐도 재(災)에 도달하는 괴물.”
“너!”
“어떻게 알았냐고?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지.”
대체 이걸 왜 언여휘가 여기에서 소환하려는 건지 궁금하긴 했으나, 이 이상 궁금증에 빠져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다른 구역의 주술적 효력은 전부 한 번에 깨트려 놨으니 형왕이 제대로 조치를 취한다면 큰 탈 없이 전원 구조될 터.
그러니, 이젠 이쪽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크르르르르.]
머리 위에서, 설천위의 뜻에 호응한 패융이 몸으로 원을 만들어 내며 하늘을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그런 패융에게서 뿌려진 영력이 설천위가 아까부터 살짝살짝 흘리던 영력과 반응한다.
[흑관(黑棺) 수룡대관(水龍大棺)]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관이 되어 사방을 감싼다.
단숨에 4구역 전체를 가둔 관 위로 패융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근처로 접근하면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흉흉한 기세로.
“어차피 분신이니 그냥 처리하고 끝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계획도 짐작이 안 가고.
제대로 된 타격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화풀이라도 할 수밖에.”
고개를 돌린 설천위의 눈에 언여휘의 뒤쪽에 있는 강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존재가 들어왔다.
웬만한 2층 전각 정도는 될 듯 보이는 거대한 크기의 악귀.
몸 곳곳을 이루는 시체들 때문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외형이었으나, 설천위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악귀를 바라봤다.
그 순간, 공간을 가르며 나타난 거대한 팔이 설천위의 머리 위를 가린다.
“만시 정도면, 훌륭한 경험치가 되겠지.”
[살악(殺握)]
이윽고 그 거대한 팔이 악귀의 머리통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