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221화-단체전 (7)
“끄윽!”
부들거리는 팔로 겨우 상체를 일으킨 송아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큭!”
완패.
그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기절인지 아니면 고통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인지 대원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후유증이 남을 것 같은 치명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천천히 상체를 세운 송아는 무릎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몸 곳곳이 욱신거리고 내상도 입었는지 몸 내부가 찌릿찌릿했지만…….
‘……청수도 전장에 섰어!’
배에 구멍이 뚫렸던 청수도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했을 뿐인데 이 전장에 섰다.
양팔이 부러졌던 설천강 부대주도 기어코 이 전장에 섰다.
그런데 자신이 임무도 완수하지 못한 채 이런 곳에서 널브러져 있을 순 없었다.
힘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것을 해낸다……!
“훌륭합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선 송아는 눈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붉은 무복.
등에 빗겨 멘, 도신이 얇은 장도(長刀)가 인상적인 여인.
대체 어떻게 뽑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긴 장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강자.
“저를 상대로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은 몰랐습니다.”
적랑대 부대주 사하랑은 기어코 일어선 송아를 바라봤다.
“허나, 힘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곳으로 지원 온 적랑대에 의해 깃발은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사하랑은 송아의 코앞에 섰다.
웬만한 남자만큼이나 큰 키의 그녀는 송아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손을 뻗었다.
“1구역은 우리의 승리입니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송아의 몸을 단숨에 두들긴 사하랑은 수혈을 짚어 잠에 빠진 송아의 몸을 받아 냈다.
살인을 해선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점혈을 한 것도 있었으나.
“전장이었어도 한 번은 살려 드렸을 것 같군요.”
고작해야 일류 초입.
검기를 흉내 내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는 미숙한 실력.
그런데 그 실력으로 대원들을 이끌고 그들을 지켜 내며 자신에게 맞서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또 한 번 마주하고 싶을 정도로.
다음에 마주할 때는 함께 술을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깃발 확보했습니다!”
“호각을 부세요. 저는 바로 대주에게 합류할 테니 깃발의 사수를 맡기겠습니다.”
“예!”
대답과 함께 호각을 불기 위해 움직이는 부하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선 사하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니 더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진짜 괴물이로군요.”
거대한 용이 자리한 5구역.
다가간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벌써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지(死地).
허나.
“용이든 괴물이든 목을 물어뜯는다면 죽일 수 있습니다.”
한번 목표를 정한 늑대 무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법이다.
* * *
“끈질기군.”
9구역.
미약하게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검을 내린 가무학은 거친 호흡을 유지하며 서 있는 청수를 바라봤다.
“이 이상 싸우면 기껏 가라앉혀 놨던 부상이 다시 도질 텐데.”
“이미 도졌으니 신경 쓰지 마시게.”
아까부터 목에서 핏물이 올라오고 있으니 아마 확실하게 내상이 다시 도진 것일 게다.
쓴웃음을 지으며 청수는 흐르는 피에 미끄러지려는 검을 품에서 꺼낸 천으로 대충 손과 함께 묶었다.
이젠 진짜 한계가 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의외다.”
“뭐가 말이오?”
“너희 대에서 설가의 인물을 제외하면 딱히 걸림돌이 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 뭐 맞는 말이지.”
설천위와 설천강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한 실력.
잘 쳐줘야 절정 초입이고, 대부분 일류나 이류에 머물러 있다.
학생들의 모임치고는 상당히 강하나, 무림이라는 객관적인 지표로 봤을 때 그 이름을 내세우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수준인 건 사실이다.
저기 지방의 중소 문파에 있는 무력대라면 몰라도 진짜 무림 방파라 불리는 가문이나 문파의 무력대에 비하면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리고 눈앞의 적랑대는 그런 무력대와 맞먹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 곳.
당연히 둘은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중앙을 차지하고 힘을 분산시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니 어찌 버겁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가오.”
“나아간다고?”
“그렇소.”
어느새 상당히 정상으로 돌아온 호흡으로 깊게 심호흡을 한 청수는 검을 세웠다.
패배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부족함 따위는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좌백은 왜 이런 계획을 세웠고, 왜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는가.
또한, 설천위는 왜 이 계획을 수락했는가.
“죽지 않으면 언제고 일어서서 다시 나아갈 수 있소.”
“죽지 않으면? 설마, 살인이 불허됐다는 점을 들어 이렇게 악을 쓰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실망인데.
미간을 찡그린 가무학을 보며 청수는 웃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게 어때서 그렇소? 이만큼 좋은 수련이 어디에 있다고?”
“……수련?”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짧게 말을 끊고 청수는 땅을 박찼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청수의 검이 가무학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가무학의 머리 근처에 닿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청수의 검을 튕겨 냈다.
가무학이 휘두른 검이 그의 검을 쳐 낸 것이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반탄력에 이를 악물면서도 청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끝내 얻는 것이 있소!”
“허술하군.”
튕겨 나간 검을 다잡으며 자세를 고치는 청수의 앞으로 한 걸음.
청수의 움직임보다 반 박자 빠르게 그에게 파고든 가무학이 왼팔을 휘둘렀다.
주먹이 아닌 팔꿈치.
이렇게 근접한 거리에선 주먹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얼굴을 찢어발길 기세로 날아드는 가무학의 팔꿈치를 허리를 뒤로 젖혀 겨우 피해 낸 청수는 이내 거친 호흡을 토해 냈다.
“카학!”
“그딴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하는 거다.”
허공을 가르던 그 순간, 궤도를 바꿔 그대로 떨어진 가무학의 팔꿈치가 청수의 복부를 강타했다.
부상의 여파가 남은 복부에 일격.
거칠게 내뱉었던 호흡은 이내 각혈이 되어 청수의 입가를 붉게 물들였다.
허나, 청수는 일어섰다.
고통 따위 아까부터 전신에 가득했으니 조금 더해진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러니.
“못 지나간다.”
“말과 행동이 다르군.”
누가 수련을 각혈까지 해 가며 하는가.
지독하게 버티는 청수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가무학은 천천히 검을 세웠다.
“이제 끝내 주마.”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좋지 못할 것 같으니.
여태까지 청수가 악을 쓰며 버텨서 시간을 한참이나 끌었지만, 이젠 그럴 여력도 없어 보이니 진짜 끝을 낼 때가 됐다.
‘……이 이상은 나도 힘들군.’
주위를 가득 메운 기세에 몸의 움직임이 더뎌진 것을 넘어서서 이제 슬슬 몸이 공포에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상 영역 안에 있는 건 썩 좋지 않다.
일단 깃발을 회수한 다음에 한 번 빠져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지.
앞으로의 계획을 대충 정한 가무학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청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단숨에 어깨를 관통해 이 싸움에서 이탈시켜 주리라.
그런 각오로 내지른 검은.
“거기까지.”
냉기를 머금은 검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검의 끝을 검면으로 받아 낸 설천강의 내공이 단숨에 가무학을 휩쓴다.
살을 에는 것 같은 지독한 냉기에 단숨에 땅을 박찬 가무학은 순식간에 열 걸음 이상 거리를 벌린 뒤에야 상대를 바라봤다.
“……설천강.”
“오냐, 나다.”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6구역이 확실하게 패배한 것 같군.”
“너희에겐 아쉽게도.”
고개를 끄덕인 설천강은 희미하게 의식을 붙잡고 있는 청수의 수혈을 짚어 그를 재웠다.
“부탁하지.”
“예!”
그의 부탁에 청수의 명령으로 5구역과의 경계 지점에서 대기하던 대원 하나가 재빨리 청수에게 붙어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설천강은 이내 몇 걸음을 걸어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어차피 이 이상 이들을 공격할 리 없으니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 주는 것이 나을 터.
무엇보다.
“이 녀석의 기운은 여전히 흉흉하군.”
“무슨 짓이지?”
“뭐가?”
“왜 이점을 포기하냐?”
설천위의 기운이 닿는 범위에서 벗어나 걷는 설천강의 모습에 가무학은 오히려 경계했다.
허나, 그런 가무학의 날카로운 태도에 설천강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사람이란 욕심이 참 문제야.”
“……너희 잠룡대는 뜬금없는 소리를 많이 하는군.”
“뭐, 대주 놈을 닮은 거겠지? 그놈은 제 생각에 빠져 가끔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으니까.”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일지도.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단어도 많이 쓰고.
“자신이 유리한 곳에서 싸우고 싶다. 그게 다 욕심이라 이거야.”
“그게 어째서 욕심이지?”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욕심이지, 그럼 뭐가 욕심이겠어?”
필요하지 않다.
그 단어에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가무학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까득.
“호오? 필요하지 않다?”
“필요하지 않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가무학을 바라보며 설천강은 웃으며 검을 뽑았다.
“원한다면, 증명해 주지.”
“오냐, 반드시 증명해 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피를 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껏 살기를 뿜어대는 가무학과 설천강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쾅!!
강렬한 폭음이 경기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아니, 폭음만이 아니었다.
대지를 흔드는 강렬한 충격.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설천강과 가무학은 충격의 진원지를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
거대한 용의 꼬리가 땅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
가무학은 모르나, 설천강은 아는 것.
“……움직였네?”
아무래도 대장전이 시작된 것 같았다.
* * *
3대 6.
이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역전해야 할까.
거점인 3구역에 돌아가 다시 6구역으로 진출해서 그대로 9구역까지 차지하면 되나?
그러면 아마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깃발을 지킬 수만 있다면.
상대가 손가락이나 빨면서 지켜보고 있다면 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과의 도출을 빨랐다.
성무경은 그대로 전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2구역에서 5구역으로.
답은 간단했다.
5구역을 함락하면 된다.
거점의 점수는 5점.
9점과 15점에서 5점을 이쪽으로 가져오면 14대 10이 되어 승리한다.
거기에 더해 설천위가 무너진 순간, 상대의 전의는 바닥을 치게 될 터.
즉.
“너를 꺾는 것이 가장 확실한 승리의 수단이다.”
승리를 위해선 이것이 가장 확실하다.
설천위의 앞에 선 성무경은 검을 늘어트린 채 그를 응시했다.
자신이 이리도 가까운 거리까지 왔음에도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설천위는 한 치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성무경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상대가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염없이 기다려 줄 생각 따윈 없었다.
방심으로 무방비한 상태로 있다면, 그대로 베어서 싸움을 끝낼 뿐이다.
검을 쥔 성무경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그 순간.
“역시, 조금 아쉽네.”
뜬금없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 설천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녕 아쉬운 듯, 미련이 담긴 눈으로 성무경을 바라본 후 설천위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봤다.
전투의 여파를 우려한 좌백은 어느새 저기 구석으로 숨은 상태.
깃발을 들고 숨은 것을 보니 안심이 된다.
그리고.
“역시 강하네, 적랑대.”
“훈련한 시간이 다르다.”
“그건 그렇지.”
고작 몇 달의 수련으로 적랑대를 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너무 안일하긴 했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검을 뽑은 채 서 있는 성무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항복은?”
“없다.”
“그렇겠지?”
단호한 대답에 설천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쾅!!
땅을 후려친 패융의 꼬리가 강렬한 폭음을 만들어 내었고, 그 충격적인 모습에 성무경의 눈이 일순 돌아갔다.
그렇게 생긴 찰나의 빈틈.
“……놈!”
순식간에 자신의 품으로 파고든 설천강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성무경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주먹?”
설천위가 두 주먹을 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도와 검이 주력이라고 들었거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흘러나온 성무경의 물음에 설천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제 좀 쓸 만해진 것 같거든.”
웃음과 함께 설천위의 몸이 다시금 땅을 박찼다.
[섬벽권(閃霹拳) 제1초 일벽(一霹)]
이윽고, 설천위는 한 줄기 검은 섬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