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220화-단체전 (6)
“무슨 일이지? 꽤나 위축됐는데.”
“……헛소리!”
조금 늦은 대답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적을 보며 설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장했군.’
제압이라는 조건 때문에 애를 먹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상대하는 데 여유가 생겼다.
6구역 중앙에서 싸우다 보니 5구역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동생 놈의 영역 밖에 있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흥! 그 콧대를 꺾어 주마!”
설천강의 자기평가를 도발로 인식한 상대가 거친 콧김을 뿜으며 달려들었다.
강자를 상대하면서 오는 피로감으로 몸이 무겁기 그지없을 텐데, 움직임엔 아직도 힘이 넘쳤다.
지독한 싸움에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
적랑대의 수련도 보통 수준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설천강은 상대의 검을 받아 냈다.
냉기를 머금은 검이 상대의 검과 맞부딪치는 순간, 철이라는 훌륭한 매개체를 타고 냉기가 스며든다.
지금쯤 손잡이에까지 도달한 냉기로 검을 쥐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터인데, 참으로 훌륭하다.
허나.
“조급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흡!”
설천강의 한마디에 미약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기합성과 함께 자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설천강은 옆구리로 파고드는 다른 상대의 검을 피하며 전신에서 냉기를 일으켰다.
“9구역으로 간 녀석이 생각보다 안 오는 모양이야.”
“대답하지 마라! 상대하는 것에 집중해!”
“쯧, 청수가 꽤나 끈질기다고 말해 주려고 했을 뿐인데 너무 야박하군.”
입이 놀아선 안 된다.
경박할 필요는 없으나, 전투에서 심리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고 고작 입을 놀리는 것으로 상대의 심리를 뒤흔들 수 있다면 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 상대하는 것이 사파라면 더더욱.
“그 녀석이 도사이긴 한데 뼛속은 중 출신이라 고행에 또 강하거든.”
도사라고 고행을 하지 않는 건 아니나, 일반적으로는 중이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하지.
뭐, 그럼 소림의 중들만 다 끈질기고 독하겠는가?
“그냥 하는 말이야. 우리 얼굴 마주한 지도 꽤 오래됐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좀 나누자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능청스러운 대꾸에 설천강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아마 잠룡대에 들어오기 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식으로 입을 열진 않았겠지.
오만하게, 그저 끊임없이 도발하는 날카로운 언행만 보였을 거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으나 금세 적응해 무시당하는 그런 도발만 했겠지.
참, 많이도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 너무 감상적인가.
깊어지려는 상념에서 억지로 빠져나온 설천강은 자신의 검에 의식을 집중했다.
이리 잡생각에 빠진 상황에서도 검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반쯤 무아(無我)의 영역에 닿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대체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맞물림을 만들어 내는 상대의 합공.
아마 웬만한 초절정 고수를 상대로도 능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일 거다.
다만.
“슬슬 시간 초과다.”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상대의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검을 쥔 손의 떨림은 도저히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파는 독하지. 아주 독해.”
이 상황에서도 검을 놓지 않는 상대를 바라보며 설천강은 일순 공격의 공백이 찾아온 순간, 검을 내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기에 우리의 검도 독해졌다. 더욱더 차가워졌다.”
설가(雪家)의 무공은 북해의 얼음과 같다.
단단하여 깨지지 않는다.
설가에서 무림학관에 제공한 무공이 괜히 화경(化勁)의 기본을 닦을 수 있게 해 주는 설화수(雪化手)가 아니었다.
설가의 무공 자체가 전체적으로 긴 싸움을 이어 나가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항복해라. 이 이상 싸우면 후유증이 남아.”
“개, 소……리…….”
설천강이 밟은 땅에서 스며든 한기에 발이 얼고, 검과 검기가 부딪히며 쌓인 냉기에 손이 얼었다.
이미 주변의 온도조차 떨어져 입김까지 나오는 상황.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에 실패한 상대에게 더 이상 이길 수 있는 기회 따윈 없었다.
이것이 설가의 싸움이다.
크게 내공을 운용해 냉기를 만들어 내면 빠르게 온도를 낮출 순 있으나 내공의 낭비가 매우 심하다.
그렇기에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냉기를 뿌려 공간을 장악하고 상대를 얼린다.
이렇게 된 이상, 외부의 개입이 없는 한 이변 따윈 없다.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두르는 상대의 공격은 이미 한 줌의 위력도 없이 허공을 갈랐다.
눈먼 맹인이라면 맞았을지도 모르는 느릿한 공격.
그 공격을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 낸 설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제압하는 것이 싫다니까.”
순간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움직인 설천강은 단숨에 상대의 혈도를 점해 상대를 제압하곤 그대로 땅을 박찼다.
뒤이어 아직도 애를 쓰고 있는 다른 이들의 혈까지 점해 그들 전부를 기절시킨 설천강은 쓰러진 이들 속에서 검을 거뒀다.
그러곤…….
“쯧, 진짜 귀찮게 하는군.”
기절한 이들을 대충 잡아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주변엔 한기가 치밀어 이대로 방치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설천강이 움직이는 사이.
“……역시 1구역으로 갈 걸 그랬나.”
경계선에서 깃발을 지키며 앉아 있던 규학은 주변에 가득 차오른 익숙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잘 보이지 않는 1번 구역.
그곳에선 깃발을 찾았다는 신호가 오질 않았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잘 버티고 있으면 다행인데.
* * *
“거슬리는군.”
문율의 검을 쳐 낸 성무경은 주위에 가득한 끈적한 기세에 혀를 찼다.
자신이 꺾일 정도의 기세는 아니나, 확실히 심력의 소모가 크다.
이 정도라면, 다른 대원들은 제 실력을 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터.
이길 싸움도 질 상황이 만들어질 확률이 매우 높았다.
‘……6구역과 9구역은 포기해야겠군.’
이쪽에서 인원을 보냈는데, 상대가 깃발을 찾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즉, 이쪽이 보낸 인원을 막을 수 있는 상대가 각 구역에 있다는 소리다.
그런 상황에서 이 힘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 싸우면 승산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잘해 봐야 큰 상처 없이 빠져나와 이쪽의 싸움에 합류하는 것이 고작일 거다.
‘이곳과 1구역을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
그래도 3대 6이다.
점수로 따지면 6점이 뒤처지는 상황.
경기의 끝은 해가 지는 순간.
물론.
‘그 전에 끝내 주지.’
싸울 사람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끝나게 될 터.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여웅의 주먹을 왼손으로 받아 내며 성무경은 결심을 굳혔다.
조금 힘을 소모하더라도 이 싸움은 빠르게 끝내는 것이 맞다.
결심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흉포한 기세가 솟구쳤다.
설천위가 현재 흑룡학관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1순위로 백유를 뽑는다면, 2순위는 성무경이다.
그 이유로는 타고난 리더십, 포기를 모르는 성격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그가 본래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출신이라는 점이다.
무공이란 전통이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적게는 수 세대, 많게는 수십 세대에 걸쳐 쌓아 온 거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 전통을 무시하는 인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천하 십대 고수의 일인인 권왕(拳王)이나 서하영 같은 이들이 그러하고.
아직 개화하진 못했으나,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주현운이 그러하다.
즉, 대종사(大宗師)의 기질을 가진 자들.
물론, 이들은 있던 걸 배워도 더럽게 강해진다.
백유나 유예린이 그 예다.
그리고 성무경 또한 이 대종사(大宗師)의 기질을 가진 천재 중 하나다.
[적랑검(赤狼劍) 제6초]
붉은 성무경의 내공이 검을 휘감는 순간, 강렬한 오한을 느낀 문율과 여웅은 본능적으로 목을 가렸다.
당장에라도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예리한 살기.
그리고 그 살기가 극에 이르는 순간.
[선혈잔선(鮮血殘線)]
일순의 찌르기가 선을 만들어 낸다.
점이 아닌 선을.
그리고 그 선의 끝.
붉은 늑대의 검은 목을 물어뜯는 짐승의 그것이 되어 상대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다.
그야말로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살수(殺手).
그 끔찍한 공세에 좀 떨어진 곳에서 깃발을 지키던 다른 잠룡대원이 반발하려던 그 순간.
콰가가가가각!!
거칠기 그지없는 소리가 주변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역시, 살인을 피하며 싸우는 것은 어렵군.”
담담하게 말하며, 검을 내리는 성무경의 건너편.
순식간에 몇 곳이나 이가 나간 검 뒤로 이를 악문 문율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참, 속임수에 능한 늑대군요.”
“속임수는 무슨, 그저 목을 물려다 어깨를 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군.”
조금 전에 느꼈던 감각을 되새기며 성무경은 다시금 문율과 여웅을 향해 검을 겨눴다.
문율에게 집중한 탓에 문율의 어깨를 관통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여웅의 경우는 그녀의 주먹에 막혀 공격에 실패했다.
약해진 상태라 차등을 뒀는데 아무래도 힘의 배분에 실패한 것 같았다.
허나, 이젠 문율도 약해진 상태.
“균등하게 꿰뚫어 주마.”
붉게 일렁이는 기운과 함께 또다시 날카로운 살기가 문율과 여웅의 목을 노린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지금 당장에라도 목을 꿰뚫을 것 같은 기세.
자신도 모르게 목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느낀 문율은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조금 전의 공격.
단숨에 박아 넣는 이빨이 아니었다.
목을 물어뜯기 위해 발톱으로 길을 만들어 내는, 그야말로 흉포한 돌격이 동반된 송곳니였다.
찌르기가 점이 아닌 선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터.
무엇보다.
주먹이든 검이든, 한번 내지르면 다시 내지르기 위해서 회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회수는 곧…….
“흡!”
콰가가가각!
틈이 된다.
휘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버티기 시작한 문율은 이 기세가 멈추길 기다렸다.
한 번 멈추면 돌아가야만 다시 전진할 수 있다.
그 틈을 찌르면 충분히 반격할 수 있…….
“많이들 착각하더군.”
순간,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문율의 안색이 일순 창백해졌다.
뛰어난 머리가 곧바로 상황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상대는 검을 회수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 공격을 위해 검을 거두는 것은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다.
팔을 쭉 뻗은 상태로 휘두르는 검은 제대로 된 위력을 갖출 수 없으니까.
그런데 상대는, 그 자세를 갖추기 위해 검을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는 것을 선택했다.
“몸을 사릴 생각이 없다면, 전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문율의 앞에 서서 내공을 머금은 검을 휘둘러 단숨에 그를 쳐 낸 성무경은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파고드는 여웅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훌륭하다.”
냉철하게 파고드는 여웅의 공격을 받아 내며 성무경은 움직였다.
여웅의 공격을 쳐 내고, 오른손에 쥔 검으로 문율을 압박한다.
문율의 몸엔 순식간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성무경의 왼손을 뚫지 못한 여웅은 점점 피곤해지는 몸의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초절정과 절정이라는 벽이 이리도 높고 아득한 것이었던가.
설 대주의 기세 속에서 합공을 하는데도……!
이길 수 없는 건가……!
벽과도 같이 단단한 적의 방어 속에서 끝내 문율의 무릎이 꺾였다.
“훌륭하다. 이 정도로 끈기 있는 녀석은 참으로 오랜만이군.”
하지만 성무경은 오히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여기까지 버틴 문율을 칭찬했다.
참으로 훌륭한 기세와 의지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문율의 빈자리로 인해 순식간에 열세에 몰린 여웅의 무릎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땅에 닿았다.
삐이이익!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호각 소리.
“1구역은 우리가 확보했군.”
그것이 1구역에서 들려온 소리임을 깨달은 성무경은 이내 몸을 돌려 2구역의 경계에 서서 깃발을 지키고 있는 잠룡대를 바라봤다.
“순순히 물러서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일 것이다.”
기세는 인정하나 현실은 현실이다.
문율과 여웅이 쓰러진 시점에서 이류에서 잘해 봐야 일류 수준인 다른 대원으론 승산이 없었다.
성무경의 냉정한 한마디에 이를 악문 잠룡대원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문율을 따라 이검조(二劍組)가 된 이다.
그는 한 걸음 내디디며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는 이검조(二劍組)! 항시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이윽고 남은 한 걸음마저 떼는 상대를 보며 성무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지.”
현실을 향한 반항과 함께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성무경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잠시 뒤, 2구역의 깃발은 성무경의 손에 들렸다.
팍!
쓰러진 잠룡대원의 사이에서 깃발을 땅에 꽂은 성무경은 저 먼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설천위를 응시했다.
“자,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