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219화-단체전 (5)
“……이건 대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자신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하늘의 일부를 가린 용의 모습에 곳곳에서 기괴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불신으로 눈을 비볐고.
누군가는 손을 모아 기도했으며.
누군가는 눈앞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렇게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하핫!”
한껏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백유가 웃었다.
어느새 일어나 망루의 난간을 손으로 붙잡고 한껏 상체를 앞으로 내민 그녀.
바람이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포와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눈앞에 들어온 용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이리도 늠름하게 생겼었구나! 아가!”
거대하게 솟은 뿔.
닿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품은 비늘.
도저히 마주 보는 것조차 불허할 듯한 강렬한 눈빛.
이 먼 거리에서 보아야 겨우 두 눈에 다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몸체.
강렬하기 그지없는 패융의 모습을 보며, 백유는 환희했다.
예전에 자신을 도와줬던 그 아이가 사실은 이리도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가슴이 미친 듯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강렬한 충동이 심장을 뒤흔든다.
목구멍까지 치솟은 무언가를 꿀꺽, 침과 함께 삼킨다.
하지만.
‘아아!’
참을 수 없다.
미친 듯이 샘솟는 무언가에 고개를 내린 백유의 두 눈에 담담히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설천위가 들어왔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평온한 표정.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자신은 저리도 평온하다.
저리도 압도적인 아이를 부리면서 저리도 담담하다.
겨우 침과 함께 삼킬까 말까 했던 것이 끝내 목을 타고 넘어온다.
“천위……!”
목청껏 소리치려던 것을 겨우 참고 작게 읊조리며 백유는 입술을 핥았다.
솟구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지을 순 없지만…….
“반드시, 손에 넣겠어.”
설천위를 바라보는 백유의 두 눈이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 * *
“끈질기군.”
“후욱후욱, 그게 바로 우리들의 최대 장점이라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청수를 바라보며 가무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하게 장점이라고 말하는 꼴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깃발을 찾는 다른 이에게 시선이 가지 않게 하면서 자신을 여태껏 막아 냈으니까.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슬슬 끝을 내 주마.”
실력 파악은 전부 끝났다.
거기에다 청수는 독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 움직임에서 미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아주 조금의 어색함.
손톱의 때만큼의 틈이지만, 찾아낸 이상 그것은 확실한 약점이 된다.
다음은 끝이다.
정리하고 난 뒤에 깃발을 찾는 녀석을 찾아내 정리하면 끝…….
“찾았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가무학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겨눴다.
“수고를 덜어 주는군.”
“지금이라도 당장 나를 정리하고 달려갈 생각인 것 같소만.”
“맞다.”
“아미타, 크흠, 무량수불. 아무래도 그렇게 하게 둘 순 없소이다.”
호흡을 정리하며 청수가 방어에 집중하려는 순간.
“2구역!! 깃발 확보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렬한 목소리에 가무학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깃발을 확보했으면 확보했지 뭐 이렇게 크게 자신의 위치를 알린단 말인가.
2구역이라면 대주가 직접 간 구역이니 아직 전투가 끝난 것도 아닐 텐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잠시 그쪽으로 생각이 빠진 가무학이 공격을 지체한 아주 찰나의 틈.
그 틈을 이용해 청수 또한 이젠 별로 남지 않은 내공을 쥐어짜 외쳤다.
“9구역도 확보했소이다!!”
악을 쓰듯이 외친 소리가 경기장 전체로 퍼진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미간을 찡그린 가무학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땅을 박찬 순간.
“음?!”
마치 빨려 들어가듯 청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검의 감촉에 가무학은 미간을 찡그렸다.
“숨기고 있었구나!”
“무림의 기본 아니겠소!”
단숨에 가무학의 검을 태극권의 수법으로 붙잡는 데 성공한 청수는 내공을 쥐어짜 검을 멈췄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깃발을 가진 대원이 달리기 시작했고…….
“쓸데없는 짓을.”
깃발을 구역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음을 아는 가무학은 검에 내공을 담아 비틀었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을 놓은 청수는 망설임 없이 대원을 향해 땅을 박차는 가무학의 뒷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버틸 만큼 버티긴 했으나, 그 때문에 반응이 늦어졌다.
이대로라면…….
‘잡힌다!’
도망치는 대원의 등 뒤로 가무학이 바짝 따라붙은 것을 확인한 청수는 없는 내공을 쥐어짰다.
한 수.
딱 한 번만 버텨라.
버티면 내가 그다음은 어떻게든 버텨 볼 수 있으니……!
“버텨라!!”
필사적인 의지를 담은 한 마디에 뒤를 돌아본 대원은 자신의 코앞까지 도달한 가무학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해했다.
저 버티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러니.
“우오오오!!”
버틴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마주 휘두른 대원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에 그만 이를 악물었다.
어중간하게 힘을 빼고 있으면 혀라도 깨물 것 같은 강렬한 충격.
허나 버텨 낸다.
어떻게든……!
‘……아.’
의지를 품고 이를 악문 대원의 눈에 튕겨 나온 자신의 검 너머로 처음과 같은 자세 그대로의 가무학이 들어왔다.
이건, 무리다.
일격은 막아 낼 수 있었을지라도 이어지는 모든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절대 무리다.
자신의 일초식(一招式)과 상대의 일초식(一招式)은 다르다.
나의 방어는 끝났지만, 상대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대원은 어떻게든 깃발이라도 지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죽일 일은 없으니 어떻게든 몸으로라도 막아 내면……!
대원은 그야말로 몸을 던져서 공격을 막아 내기로 결의했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지만…….
차마 눈을 뜬 채 베일 순 없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호흡, 두 호흡.
숨을 쉬는 데 이상하게 통증이 없다.
뭐지?
그런 의문과 함께 눈을 뜬 순간.
딱딱하게 굳은 가무학의 표정과 함께 익숙한 포효가 등 쪽에서부터 전신을 휩쓸었다.
[크롸라라라라라라라!!]
용의 포효.
그리고 얼추 끝에 도달했음을 인지한 대원은 그제야 자신이 왜 무사한지를 깨달았다.
“이런, 미……친 괴, 물 놈이……!!”
이를 악물고 몸을 비트는 눈앞의 녀석이 용의 마수 안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합!”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남은 대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어느새 도착한 청수의 검이 가무학의 옆을 때렸다.
여태까지와는 확실히 다른 둔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받아 내는 가무학.
제대로 힘을 해소해 내지 못한 것인지 찡그려진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크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몸을 비튼 가무학의 전신에서 두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굳어 버린 몸을 강한 의지로 강제로 풀어 버리면서 생기는 기묘한 마찰음.
굳어 버린 신경과 근육이 뼈와 관절을 붙잡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움직여 풀어 버리면서 나는 소리였다.
“적랑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한다.”
뜬금없는 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가무학의 입에서 얇은 혈선이 생겼다.
입안을 억지로 깨물어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
그 독기(毒氣)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청수는 침착하게 검을 움직였다.
지치긴 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살의와 패기로 뒤덮인 공간, 그 안으로 흐르는 것은 수 속성의 영력.
“여기부턴 잠룡의 영역이다.”
* * *
“정녕 괴물이구나!”
자신을 막아선 문율을 몰아붙이면서 성무경은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도 움직임에 장애가 있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기세.
그것을 영역의 한 중앙에서 다른 곳까지 퍼트리고 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군.’
이미 영역의 근처까지 적들을 압박했던 다른 대원들은 갑자기 몸을 괴롭히는 기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기에 빠진 상태였다.
상대는 이런 환경이 익숙하다는 듯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으니 아마 평소 수련할 때도 이런 기운 속에서 수련했든가…….
‘아니면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든가.’
뭐가 됐든, 미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승패는 승패다.
상대방이 예상 밖의 강함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승리를 포기할 것인가?
임무의 성공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
전장에 서는 자로서 목적은 반드시 쟁취해 내야 할 성과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을 걸고 전장에 서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반드시 이뤄 내야 한다.
불필요한 희생은 있어선 안 되지만.
필요한 희생이라면 어쩔 수 없다.
부하들을 바라보던 성무경은 강렬한 기세를 담아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전원!! 퇴각!!”
지금 대원들이 무턱대고 앞에서 싸우다가 전투 불능이 되는 건 필요한 희생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희생에 가까운 쓸데없는 낭비다.
“여유가 되는 자들은 외곽으로 붙어 1구역으로 향해라!”
1구역에선 깃발을 얻었다는 외침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그곳으로 향한 사하랑이 잘 해내고 있다는 증거.
그러니 지금 대원들이 해야 할 건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며 적의 계획 아래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점수라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퇴각! 1구역으로 향해 깃발 수색을 시작한다!”
성무경의 말에서 그 의미를 눈치챈 부하 하나가 다른 대원들을 이끌고 빠졌다.
그리고.
“자리를 지켜라!”
여웅은 추적하려는 잠룡대를 붙잡고, 단단한 자세로 서서 문율의 뒤에 섰다.
문율이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면 끼어들어 2대 1의 구도로 가져가기 위한 자리 선점.
만신창이가 된 손엔 어느새 간단한 응급조치가 되어 있었기에 성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훌륭하다.”
“우리 대주의 능력이라서 칭찬받아도 그리 기쁘지 않은데.”
“아니, 내가 칭찬하는 것은 너희들이다.”
여웅의 말에 고개를 저은 성무경의 시선이 그들의 뒤를 향했다.
하늘에 떠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용.
“저 용은 아마 이 전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겠지.”
저리도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이유다.
만약, 저 용이 개입할 능력이 됐다면 영역에 갇혀 방어 능력을 잃은 자신의 부하들을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을 테니까.
“거리 때문인지 혹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인지 모르겠으나.”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성무경의 기세에서 비릿한 혈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붉게 물든 두 눈동자는 어느새 서로의 거리를 좁혀 합공의 준비를 끝낸 문율과 여웅을 응시했다.
“이빨로 찢어발기면, 피가 흐르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저 용은 아마 피가 안 흐를 걸요?”
“그 용을 부리는 인간은 흐르겠지.”
문율의 어설픈 농담을 진지함으로 받아친 성무경은 붉은 혈기로 휩싸인 검을 쥔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갑작스러운 용의 등장.
예상치 못한 적의 전술.
휘말려 전부 틀어진 계획.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고, 쉽게 봐도 될 상황이 아니었지만.
“너희들을 베고, 그대로 전진해 설천위까지 베면 우리의 승리다.”
길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포기 같은 나약한 정신 따윈 진즉에 땅바닥에 버린 성무경은 하나 남은 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어후, 독한 놈.”
5구역 중앙.
패융을 불러내어 있는 힘껏 기세를 끌어올려서 여태껏 해 본 적 없던 짓을 하던 설천위는 혼들의 보고에 혀를 찼다.
역시 성무경.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녀석답답다고 해야 할까.
승리를 향한 갈망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나름대로 현실을 직시하며 짜낸 계획이라는 것이 더 소름 끼쳤고.
이에 대비해서 잠룡대를 키워 놓길 잘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대충 했으면 졌을 수도 있겠어.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버텨 주는 잠룡대의 소식을 들으며 설천위는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좌백을 바라봤다.
본인이 제안해 놓고도 반신반의하던 좌백의 얼굴엔 어느새 한 가지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생각대로 되고 있어?”
“예. 물론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설천위에게 대답하며 좌백은 곳곳에서 들려오는 싸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싸움, 우리들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