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217화-단체전 (3)
“먼저 거점을 정하도록 하겠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직후 형왕은 각 대의 대주를 큰 탁자 앞으로 불렀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은 거대한 모형이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一(일)로 시작해 오른쪽 아래에서 九(구)로 끝나는 9등분 된 모형.
一(일), 四(사), 七(칠)에는 물을 상징하듯 파란색 도료가 칠해져 있고, 드문드문 섬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이(二), 五(오), 八(팔)에는 자갈을 상징하는 것 같은 회색과 갈대를 표현한 것 같은 노란색이 섞여 있었다.
실제로 중간 지점으로 보이는 곳에는 갈대가 꽤나 자라 있었고.
그리고 三(삼), 六(육), 九(구)에 해당하는 구역엔 초록색 바탕에 갈색의 선이 몇 개 그려져 있었는데…….
“……이건 장난 없네.”
고개를 돌려 얼핏 살펴보니 그것들이 통나무를 이용해 만든 간이 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탁자 위에 놓인 모형에는 갈색의 선이 몇 개나 그려져 있었다.
“보다시피 오른쪽은 몇 개의 엄폐물이 있는 작은 숲이고 중앙은 물가, 왼쪽은 호수다. 너희는 이 아홉 개의 구역 중 한 곳을 골라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
형왕의 설명에 설천위와 성무경은 가만히 모형을 바라봤다.
단순히 후에 나올 불만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이렇게 거점을 정할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황실이 괜히 이렇게 거창한 준비를 한 건 아닐 터.
무엇보다.
굳이 거점이라는 단어를 따로 쓰는 걸 보면…….
“거점의 깃발은 5점, 그 외의 지역은 2점이다. 또한, 손에 넣은 깃발은 해가 지기 전까지 소지하고 있어야 점수로 인정되며, 그 구역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그럼 그렇지.
점수의 차등이 있다면 당연히 깃발의 가치가 달라진다.
거점은 지키기 좋은 곳으로 정해야 할 터.
“고민할 시간을 일각 주도록 하마.”
그리고 그것이 전략을 위한 장치임을 인정하듯 형왕은 대원들과 의견을 나눌 시간을 줬다.
그 말에 곧바로 몸을 돌린 설천위는 즉시 대원들을 모았다.
모이자마자 설천강이 기막을 펼쳐 소리를 차단했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무난한 건 삼(三)이나 구(九)겠군.”
“나무가 있고 엄폐물이 있다는 건 큰 이점이죠.”
설천강의 말에 문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무인들이 기척을 잘 감지한다고 해도 그만큼 상대가 은신을 잘하면 의미가 없다.
은·엄폐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허나.
“그 엄폐물은 적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군요.”
이쪽이 숨을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적도 숨어 가며 들어올 수 있다는 소리다.
만약 적에게 은신술이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경계에 실패하면 그대로 깃발을 뺏길 터.
“고민이 되는군요.”
가장 무난하지만 적의 전력을 몰라 생기는 구멍 때문에 선택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만히 의견을 듣던 설천위는 여태껏 조용히 고민하던 좌백을 바라봤다.
“좌백, 네 의견은?”
“저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예, 하나는 저희의 이름을 살리는 거죠. 정확히 말해 이름값을 해 보는 선택입니다.”
“호수군.”
“예.”
좌백의 긍정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호수로 향했다.
“할 만한데?”
“음, 확실히 나쁘지 않군.”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설천위의 물을 품은 영력 속에서 수련한 기간이 꽤 길다.
덕분에 물속에서 움직이는 법을 꽤나 터득했고, 실제로 실험해 보니 성과가 퍽 좋았다.
전문적으로 수공(水功)을 익힌 무인에겐 안 되겠으나 같은 학생 수준의 적에겐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수준은 됐다.
“나쁘지 않네. 그럼 다음 수는?”
“이건 조금 도박에 가까운 수입니다.”
도박이라.
“그건 상당히 혹하는 단어 선택이네.”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는 팔짱을 낀 채 좌백을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좌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수는…….”
* * *
‘궁금하군.’
일각의 회의 시간이 끝나고.
형왕의 호출에 다시금 탁자 앞에 선 성무경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궁금하다.
저 괴짜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됐든, 깨부수면 될 일이다.’
그것을 위해 수련해 왔고.
그것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
살상이 금지됐다는 것은 다소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스런 일이다.
부하들이 죽을 일이 현저히 적어졌다는 소리니.
“그럼 선택을 시작하지.”
여러모로 생각을 이어 가던 성무경은 형왕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서로 허공에서 얽히는 시선.
그 시선 끝에 성무경은 먼저 손을 뻗었다.
“저희는 삼(三)을 고르겠습니다.”
“음, 흑룡학관에서 먼저 골랐군. 무림학관은 불만 없나?”
“예, 저희가 생각하던 곳과 다르니 괜찮습니다.”
“좋네. 그럼 무림학관에서 원하는 거점은 어딘가?”
본래라면 따로 종이를 나눠 줘 숫자를 적게 할 생각이었으나, 뭐 어떤가.
양쪽 다 불만이 없다면 문제없지.
형왕의 인정하에 빠르게 진행되는 거점 선택.
설천위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희는 오(五)로 하겠습니다.”
* * *
“호오? 이거 흥미롭군.”
단체전 구경을 위해 세운 망루 중 하나.
붉은 장포를 입은 노인은 중앙으로 걸어가는 잠룡대의 모습에 수염을 씰룩였다.
“천원(天元)이라……. 오만인가, 자신감인가.”
천원(天元)이란 바둑에서 바둑판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장의 중앙.
아홉 개의 구역 중 한가운데.
본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곳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중앙이라는 것은 사방이 뚫렸다는 소리다.
다른 거점을 치기 위해 움직였던 적들이 방향을 꺾어 일제히 밀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리다.
당연히 수비에 좋지 않다.
두 번째로 지형이 좋지 않다.
땅의 반 이상이 자갈밭인 데다 중간중간에 뭉쳐 있는 갈대들은 엄폐물로 쓰기엔 너무 초라하다.
즉, 완전히 확 트여 있는 곳이란 소리다.
방어를 위한 곳으로는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
그런데.
“궁금하구나.”
굳이 왜 저곳을 골랐을까.
듣자 하니 이번에 나온 무림맹의 대표엔 최근 이름이 높아지고 있는 그 녀석도 있다던데.
“천원(天元)이라는 수를 사람들이 자주 쓰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수염을 쓸며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중을 바라봤다.
“적수단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아미타불, 저는 개인적으로 저 학생들을 알지 못해 그들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해서 딱 뭐라고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니 괜찮네. 그저 생각을 말해 줬으면 좋겠네만.”
노인의 거듭된 질문에 무진은 작게 불호를 외고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잠룡대를 바라봤다.
“제가 듣기론, 잠룡대의 대주가 술법에 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저리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허어, 술법이라.”
적수단주 무진의 솔직한 대답에 노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림맹에서 그런 괴력난신을 가르친단 말이오?”
“아닙니다. 다만 저 아이가 재능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어.”
무진의 대답에 한층 더 깊게 미간을 찡그린 노인은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야귀단주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야귀단(野鬼團).
사천맹의 주축이 되는 단들 중 하나로, 그 단주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소국이다.
“본인 또한 저 아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답을 드릴 순 없겠으나…….”
잠시 말끝을 흐린 소국은 가볍게 혀를 찼다.
“우리 아이들이 꽤나 고생할 것은 확실해 보이오.”
“허어, 그 정도인가?”
사천맹에서 직접 나온 단주가 순순히 불리함을 인정할 정도로?
소국의 대답에 한층 더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노인은 다시 전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노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양쪽 대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깃발은 해당 구역에서 나올 수 없다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규칙이네요.”
9번 구역으로 가는 길.
일반 대원과 함께 깃발을 찾으러 가며, 청수는 주위를 살폈다.
사실 지금은 적이 주변에 있을 리 없으니 굳이 이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이왕 하는 거 철저하게 하는 게 좋다.
상대가 6번 지역을 무시하고 이쪽으로 달려올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신속하게, 하지만 신중하게 전진하며 9번 구역을 훑어가던 청수는 주위를 둘러보곤 걸음을 멈췄다.
“깃발 수색을 시작한다. 동료와 열 보 이상 떨어지지 마라.”
“예!”
짧고 굵직한 대답과 함께 수색을 시작하는 대원들.
그들과 함께 깃발을 찾으며 조심스럽게 걷던 청수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희미하던 기척이 순식간에 선명해져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근원지는…….
“내려오는 게 어떤가?”
“생각보다 담담하네?”
청수의 부름에 입꼬리를 비튼 상대는 순순히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한 손에 검을 쥔 채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적랑대 무인.
그 얼굴을 확인한 청수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무학.
설천위가 경계하라고 했던 적랑대의 위험인물 중 하나다.
그 실력은 아마도…….
‘절정.’
초절정일 확률은 적을 거라고 했으나 결코 방심해선 안 될 인물이다.
아니.
전력을 다해도 이쪽이 질 확률이 높은 싸움이 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질 생각은 없다.
“혼자 왔소?”
“어. 여기엔 약한 녀석들만 보낼 것 같았거든. 정답인 것 같네.”
약한 녀석들.
그 말에 청수는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잠룡대가 5번 지역을 먹으면서 얻은 최대의 이점은 3번 지역을 먹은 적랑대보다 더 많은 지역에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적랑대가 잠룡대와 같은 거리를 이동해 갈 수 있는 지역은 2구역과 6구역 두 곳뿐.
즉, 자연스럽게 잠룡대가 더 넓은 지역에 소수의 인원만을 보내 쉽게 깃발을 뺏을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 간단한 이득에는 큰 함정이 있었으니.
많은 구역으로 인원을 나누면 당연하게도 2구역과 6구역이 뚫릴 위험성이 커진다.
잠룡대가 일곱 곳에 인원을 나눠 보낼 때, 적랑대는 두 곳에 인원을 보내는 거니까.
그렇게 뚫리면?
잠룡대는 전력이 깎인 상태로 적랑대의 적들을 맞이해야 한다.
심지어 2구역과 6구역에서 단숨에 중앙으로 진격하면 거점 깃발이 위험해질 가능성마저 높다.
그렇다면? 당연히 잠룡대는 뒤쪽에 있는 구역엔 약한 사람들을 보내고 2구역과 6구역에 강한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실이다.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2구역과 6구역을 뚫을 전력이 줄었다는 소리군.”
눈앞의 가무학이 이곳에 있는 건 저들의 실수다.
힘을 집중해 뚫기만 하면 유리해지는데 굳이 이렇게 인원을 나누다니.
정론을 말하는 청수를 바라보던 가무학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순순히 너희 뜻대로 흘러가 줄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애초에 자신들은 그냥 친선전을 이기러 온 것이 아니다.
짓밟고, 찢어발겨 버리기 위해 온 것이다.
한없이 살의에 가까운 강렬한 적의를 드러내며 가무학은 청수를 향해 검을 겨눴다.
“너희를 후딱 정리하고 합류할 예정이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자신감.
이쪽이 머릿수는 더 많은데 당당하게 빠르게 끝내자고 말하는 가무학을 보며 청수는 가슴 앞에 세운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부드럽게.
자신의 무(武)는 탈력(脫力)에서 시작되니.
“절대 그리되진 않을 것이오.”
이를 악물지 않고 버텨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