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215화-단체전 (1)
연하촌(燕夏村)은 조용한 마을이다.
크지 않은 호수를 끼고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
농사와 어업이 주력인 이 시골 마을에 때 아닌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야,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의 싸움이라니……. 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런 구경거리를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말일세. 듣자 하니 이번에 양쪽 다 아주 이를 갈고 준비했다더군.”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의 친선전을 구경 온 인파로 작은 마을 안이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거기에다.
“확실히 황실분들은 대단하시네. 끝이 제대로 안 보이는구먼.”
“대체 어떤 식으로 경기를 치를지 궁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지경일세.”
사람들의 눈길을 끈 건 마을 외곽에 자리한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나무와 천을 이어 만든 울타리가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들 정도로 길게 뻗어 있었고, 드문드문 턱을 치켜들어야 겨우 보일 정도로 높디높은 망루도 있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경기를 진행하려고 저렇게까지 만드는 걸까.
묘하게 기대감을 자극하는 그 풍경에 사람들의 입이 다시금 시끄러워질 때.
“허허, 놈이 꽤나 큰 무대에서 싸우는구나.”
“괜찮을까요?”
손녀의 손을 잡고 시장 안을 걷던 곤괴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묻는 손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질 싸움을 할 놈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정말요?”
“암. 또한 설령 진다고 한들 이런 싸움에선 져도 제법 얻는 것이 많으니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는 법이니라.”
화색이 도는 손녀의 반응에 웃는 얼굴로 바라본 곤괴는 마을 내부를 돌아다녔다.
손녀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로 한 뒤부터 손녀와 때때로 이렇게 무림행을 떠났다.
무공만 배워선 이 거친 무림을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드니.
세상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사파 놈들도 꽤나 많이 왔구나.’
확실히 정파와 사파의 중간 지역에서 열리는 친선전이다 보니 사파의 인물도 제법 많이 보였다.
심지어.
‘사천맹 놈들도 많이 보이는군.’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아무래도 한 개의 단을 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사천맹이 한 개 규모의 단을 보냈다는 것은…….
‘호오, 무림맹은 적수단(赤手團)인가?’
주먹을 주로 쓰는 적수공권의 무인들이 모인 단.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맹주가 신경 좀 썼군.
뭐, 사실 무림에서 주먹만으로 싸운다고 하면 대개 무식하다는 인식이 많다.
실제로 두 주먹을 주력으로 쓰는 무인들은 육체야말로 그들의 무기이기 때문에 신체 단련에 좀 더 신경을 쓰는 편이기도 하고.
게다가 주먹이 닿는 범위까지 상대의 검을 뚫고 지나가 상대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 없인 어려운 일인지라 거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적수단 하면 거칠기 그지없는, 무식한 무인들의 모임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식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이성적인 단이다.
무기를 쓰지 않고 주먹을 쓴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살생보단 제압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주먹보다 날붙이가 살생에 더 특화돼 있으니까.
무엇보다 현재 적수단의 단주로 있는 무진은 소림의 일대제자다.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의 우두머리인 소림의 제자.
그리고 적수단은 웬만하면 소림의 제자가 그 단주를 맡아 왔다.
그 결과, 자비가 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인지라 단의 성격 자체가 부드러운 편이다.
서로 대놓고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하는 곳에서 중재를 맡기에 안성맞춤인 단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지금도 사파 놈들은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지만, 적수단 녀석들은 그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넘기며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시키고 있었다.
뭐, 그래도 싸움이 일어나는 건 못 피하겠지만.
‘단주는…… 일단 안 보이는군.’
무진 정도 되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안 보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젊은 고수를 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낀 곤괴는 이내 그 아쉬움을 털어 버렸다.
길가에 있는 꼬치집에 정신이 팔려 할아버지를 끌고 가는 손녀를 보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
지들끼리 싸우다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여기 이 손녀만 멀쩡하면 됐지.
“허허, 얼마인가?”
“할아부지!”
“예입! 철전 닷 냥 되겠습니다!”
닷 냥이라.
조금 비싼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런 시기에 이런 곳에서 장사하면서 이 가격이면 그래도 상당히 양심적이다.
하긴 무림인도 많은데 과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칼 맞아 죽고 싶진 않은 거겠지.
흔쾌하게 돈을 낸 곤괴는 남혜의 양손에 꼬치를 쥐어 주고 흐뭇하게 웃었다.
손녀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만, 뭐 어떤가.
이리 좋아하니 됐지.
그나저나 슬슬 점심을 먹을 때가 됐는데…….
‘꼬치를 괜히 사 줬나.’
이거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을 수도 있겠구먼.
귀여운 손녀에게 정신이 팔려 너무 성급하게 간식을 사 줬다고 생각한 곤괴는 속으로 반성하며 남혜를 이끌고 근처의 객잔으로 향했다.
그렇게 객잔에 도착해 소면을 시키고 꼬치 양념이 잔뜩 묻은 손녀의 손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던 그때.
“웬 거지가 객잔에 들어오느냐!”
술기운이 있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소리치자, 객잔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문 입구로 향했다.
과연 사내의 말대로 오는 길에 꽤나 고생을 했는지 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청년 하나가 객잔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먼지를 좀 뒤집어썼을 뿐 도저히 거지라곤 볼 수 없는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사내가 그냥 술김에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이 미간을 찡그렸다.
거기에다.
“쯧쯧, 명을 재촉하는구나.”
“명을 재촉해요? 그럼 빨라져요?”
“빨라지다 못해 순식간에 지나가느니라. 무림에 사는 사람이라면 결코 해선 안 될 행동이지.”
“뭐야?!”
딱히 목소리를 줄이지 않은 곤괴와 남혜의 대화는 술 먹고 시비를 거는 사내의 귀에도 들려왔고, 그 사내는 거칠게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얼굴로 술병을 꼬나쥐는 모양새가 영 심상치 않았다.
관광 삼아 놀러온 손녀와 노인이 혹 해코지를 당할까 봐 몇몇 사람들은 미간을 찡그렸고.
정파 쪽 인물로 보이는 이들 몇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야!”
나지막한 부름과 함께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청년의 행동에 사내는 거칠게 몸을 돌렸다.
이대로 단숨에 놈의 머리통에 술병을 내리치고 곧바로 저 늙은이를 그냥……!
“야!”
‘……어?’
왜 이놈이 멀쩡하지?
몸을 돌렸는데도 멀쩡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모습에 사내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 그때.
“거지한테 맞아 뒈지고 싶냐?”
사내와 마주친 청년의 두 눈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공기가 한바탕 요동쳤다고 느낀 직후.
털썩.
그대로 기절한 사내가 쓰러졌고, 그런 사내를 가볍게 발로 차서 옆으로 치운 청년은 곤괴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오냐. 그나저나 조금 못 본 새에 아주 괴물이 됐구나.”
“괴물이라뇨.”
거, 섭섭한 말씀을 하시네.
곤괴의 평에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가 객잔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의 뒤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소란과는 명백하게 다른 느낌의 소란.
“갑자기 아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따라왔더니, 곤괴 어르신을 말하는 거였나요?”
“그럼 같이 갔어야죠!”
“맞는 말이다.”
“어! 저도 뵙고 싶었는데!”
미남미녀.
그런 말이 어울리는 일행의 등장에 소란스러웠던 객잔이 한층 더 웅성거려졌다.
“쯧, 조용히 밥이나 먹으려고 했거늘 너 때문에 다 망했구나.”
“오빠!”
곤괴의 불평과 달리 상대가 설천위라는 것을 안 남혜가 그를 향해 달려갔다.
먼지투성이인 자신에게 거침없이 달려드는 남혜를 보고 작게 웃은 설천위는 달려오는 남혜를 가볍게 들어 자신의 옷에 닿지 않게 했다.
“혜는 잘 지냈어?”
“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달려올 때의 속도가 심상치가 않던데, 벌써 무공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가?
하긴 천음지체면 그 재능이 거의 천무지체급이니까 무공을 빠르게 익힌다고 해서 이상할 건 전혀 없지.
게다가 게임에서보다 훨씬 빨리 치료했으니.
시간만 지나면 할아버지의 경지에 닿을지도.
남혜를 내려놓고 그 머리를 쓰다듬은 설천위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곤괴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건강한 거 빼면 딱히 자랑할 것도 없는데 건강해야지.”
“그것도 그러네요.”
“이놈이?”
곤괴는 자신의 말에 농담으로 응수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살짝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
그러곤 서하영의 품에 안겨 꺄륵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손녀를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갑작스러운 만남은 이 정도로 하고, 아까부터 널 기다리던 아이랑 얘기나 하러 가거라.”
“……그럴까요?”
“네? 갑작스러운 만남이요?”
곤괴와 설천위의 대화에 이상함을 느낀 서하영이 고개를 갸웃했고.
이내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유예린의 모습에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유예린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서하영도 그제야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곤괴 어르신의 기척을 설 공자가 그리 멀리서부터 느낄 리가 없었는데요.”
훈련이란 명목으로 잠룡대를 이끌고 오는 내내 여러모로 구른 설천위다.
먼지를 한가득 뒤집어쓴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수련으로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져서 눈치챘나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당신을 만나러 이곳에 온 것 같군요.”
“하핫! 처음 보네?”
검은 무복에다 크게 대비되는 흰색 바탕에 흑룡이 수놓인 장포를 걸친 여인, 백유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감추고 있던 그녀의 기세가 맹렬하게 객잔 내부를 채웠다.
“끄륵!”
심신이 약한 이들 중엔 기절하는 이가 나올 정도의 강렬한 기세.
일반인도 있을 객잔에서 그런 기세를 내뿜는 백유의 모습에 반발하려던 서하영은 이내 이상함을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무인밖에 없네요.’
약하긴 해도 전부 무인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렇게 무림인이 바글바글한 시기에 이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이런 객잔을 찾을 리가 없지.
여긴 딱 봐도 사파의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보이니까.
“이건…… 얘기와 다르군요.”
그런 백유의 기세를 마주한 유예린은 고개를 돌려 뻘쭘하게 서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분명, 잘해야 초절정 정도의 수준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흠흠, 그러게? 생각보다 수련을 더 열심히 한 모양이네?”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성큼성큼 걸어 백유를 향해 다가갔다.
“무림학관의 유예린이라고 합니다.”
“아하, 은검(隱劍)?”
“과분하게도 그런 별호로 불리고 있죠.”
“이야, 반갑네! 나는 흑룡학관의 백유야.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웃으며 대화하고 있지만, 무림의 기본 인사인 포권도 안 하고 있다.
그 사실에 이상함을 감지한 서하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남혜를 자신의 뒤로 숨기는 사이, 백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리 천위는 무슨 생각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여기로 온 걸까?”
유예린을 지나 빼꼼 고개를 내밀어 묻는 말에 설천위가 대답하려는 순간.
“……우리요?”
유예린의 서늘한 음성이 그 입을 다물게 했다.
왠지 지금은 말하면 안 될 것 같네.
조용히 합죽이가 된 설천위가 존재감을 지우는 사이, 다시 유예린을 바라본 백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천위.”
“그건 썩 듣기 좋은 단어 선택이 아니군요. 정혼자인 제가 버젓이 있는데 외간 여자가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흐응, 그게 불만이야?”
날카로운 유예린의 반응에 턱을 쓸며 그녀를 바라본 백유는 이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럼 내기를 할까?”
“……내기요?”
“이번 친선전에서 이기는 사람이 천위를 가지기로. 나, 솔직히 말해 천위가 정말 마음에 들거든. 전신으로 꽉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묘하게 야릇한 목소리로 말하며 웃는 백유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설천위에게로 향했다.
일행은 물론이고, 곤괴와 대충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구경꾼들의 시선까지 전부.
[노옴! 대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은 것이냐!]
[이노옴! 하늘이 노할 것이다!]
아니, 할배들은 입 닥쳐 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일단 여기선 강한 부정으로 한 번 선을 긋는…….
“좋아요.”
“응?”
그걸 왜 수락해?
“아무래도 당신과는 한 번 결착을 짓을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백유의 눈동자에서 광기를 읽은 유예린은 확신했다.
이번에 안 눌러 놓으면 앞으로 꽤나 귀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친선전 시작 이틀 전에 간단한 내기가 성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