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214화-돌아왔……. (3)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
그야말로 번뜩이는 섬광이라고 불러 마땅한 일격이 설천위를 향해 쇄도했다.
단숨에 그 어깨를 꿰뚫을 것 같은 기세의 비수.
찰나의 시간 속에서 하던 말을 끊고 반응하던 설천위는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보다 먼저 반응한 사람이 있어서다.
캉!
순식간에 설천위의 앞에 도착한 창린의 도가 날아오던 비수를 쳐 냈다.
그리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 뒤로 찾아오는 묘한 정적.
그 정적 속에서 창린은 저릿하게 울리는 손아귀의 여운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것 같은 미모의 여인이라는 점을 시작으로 몇 가지의 특징을 읽어 낸 창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유예린이군.”
“그러는 당신은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평소의 유예린답지 않은, 조금 공격적인 목소리에 서하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둘 사이의 대화에 끼려던 그 순간.
“나는 창린이라고 한다.”
서하영보다 먼저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한 창린은 비수를 쳐 낸 도를 집어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괜찮나?”
“……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고민했다.
좌로 반걸음.
우로 반걸음.
어떤 것이 정답일까.
좌로 반걸음을 하면 지금 당장은 창린의 뒤에 숨어 유예린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우로 반걸음을 하면 유예린과 대면해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험난한 여정이 되겠지…….
길게 고민할 여유도 없이 오른쪽으로 반걸음을 옮긴 설천위는 평소와 같은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예린과 마주했다.
“……유 매?”
“네, 설 공자.”
평소와 같다는 게 너무 무섭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비수를 던졌다는 게 더 무서워!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은 설천위는 구태여 돌아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잘못이라……. 많이 했죠.”
“마, 많이 했어?”
그 정도야?
또 한 번 마른침을 삼킨 설천위가 어색하게 웃었으나, 유예린은 평소와 같은 미소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가문에는 편지를 쓸 여유가 있었으면서 저한테는 한 줄의 편지도 보내지 않아 서운했어요.”
“……미안.”
“하지만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구나.
그럼…….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창린을 바라봤다.
거친 무복을 입고 대충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모양새는 전형적인 낭인들의 모습과 같지만…….
‘못 숨기지, 이건.’
기본적으로 아름답다.
얼굴이.
뭐, 얼굴은 미남자의 경우 웬만한 여인의 뺨을 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곤 쳐도…….
‘어, 이건 못 숨기지.’
다른 부분이 도저히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본인도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 듯하고.
딱 보는 순간,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터.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이해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딱히 애인으로 데려온 건 아니잖아요? 같이 올 수도 있죠.”
“어, 그건 그렇긴 하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이젠 조금 가슴을 펴고 유예린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내가 미안해할 건 소식을 미리 안 전한 것밖에 없잖아?
그것도 이해해 준다고 했으니 그럼 굳이…….
“제가 화가 났던 건 소식이 없던 낭군님이 갑자기 웬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더군요.”
“죄송합니다!”
좋아! 여기선 빠른 사죄가 답이다!
전혀 이해한 표정이 아니잖아!
왠지 이상하더라!
잘못이 많은데, 다 이해한데!
이해 못 했구먼, 뭐!
다 잘못이구먼!
지금 이 순간, 이성적인 변론 따윈 필요 없다.
재빨리 창린에게서 떨어진 설천위는 유예린에게 다가갔다.
“자, 이건 유 매한테 주는 선물. 내가 또 안 잊고 챙겨 왔다니까?”
혈사련의 창고를 털 때, 뇌물용으로 모아 쌓아 두었던 패물 중 하나인 머리 장식.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매화 모양의 장신구였다.
선물을 건네며 어떻게든 넘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설천위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
그들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괜히 긴장했네.
그냥 사랑싸움이었잖아.
그렇게 모두가 각자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한 뒤.
혼자 뻘쭘하게 선 창린은 한참을 정문 쪽을 향해 있었다.
* * *
“미안하군. 저쪽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러니까요! 죄송해요!”
설천위의 보고를 위해 시작된 식사 자리.
철백과 서하영은 뻘쭘하게 서 있던 창린을 끌고 와 자리에 앉혔다.
“상관없다.”
무표정하게 젓가락을 집으며 고개를 저은 창린은 자신의 양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야기는 저쪽이 더 재미있을 텐데?”
“나중에 얼마든지 들을 수 있네. 그나저나 나는 자네가 궁금하군.”
“맞아요!”
철백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이내 질문 공세로 창린의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출신이 어디고.
대충 무슨 일을 하고.
왜 여기에 있는지.
“……그걸 허락했어요?”
“상관없다는 듯 말하더군.”
“이거, 유 언니가 알면 화내지 않을까 싶은데요. 창 언니도 미녀고.”
“호위 겸 감시로 있는 건데, 미녀가 무슨 상관이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긴 한데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또 모르는 법이니까요.
뒷말을 삼킨 서하영은 유예린의 곁에서 이야기를 풀고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하긴, 저 양반이면 걱정할 필요 없나.
맨날 아닌 척하는데 생각해 보면 다른 여자한테 접근한 적 자체가 없다.
주변에 미인이 꽤 있는데도.
“하하하! 그것도 그렇지!”
……나는 내 것이나 신경 써야지.
호탕하게 웃으며 탁자를 두드리는 철백을 바라보며 서하영이 새로운 다짐을 하는 사이.
식사를 계속하던 창린은 미간을 찡그리고 서하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화가 어색한데 이유가 뭐지?”
“예?”
“저쪽 말이다. 대화 중간중간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랑 떠드는 것 같은…….”
“아, 귀신분들이요.”
“……귀신?”
딱딱하게 돌아가는 고개와 함께 묻는 창린의 말에 서하영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귀신분들이오! 설 공자는 돌아가신 분들을 데리고…….”
히끅.
서하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에 띄게 안색이 창백해진 창린이 딸꾹질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드문드문 끊기는 대화.
자신은 보지 못하는 귀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소리다.
“어머! 할아버지도 참! 그게 무슨 소리세요!”
여기엔 할아버지가 없는데.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체 왜 허공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걸까.
서하영의 말에 이상함을 눈치챈 창린은 떨리는 손을 억지로 억누르며 심호흡했다.
귀, 귀신이 뭐냐.
나는…….
히끅.
“아, 걱정 마세요! 귀신이어도 딱히 우리를 해코지하거나 그러시는 분들은 아니거든요! 예? 아이! 이분 안심시켜 드리려고 하는 말이죠!”
아니, 왜 나랑 대화하다가 허공에 대고 말을 하고 그래.
서하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킨 창린은 심호흡을 했고.
[이 소저는 긴장을 많이 하는구먼.]
[냉철할 것 같더니 역시 사람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니겠소?]
갑자기 보이는 반투명한 사람의 모습에 창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창린과 서하영의 대화를 듣고 영역을 펼친 설천위의 배려다.
그렇게 혼과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서하영은 웃으며 혼들을 소개했다.
“이분이 천마 할아버지고요! 이분은……. 응?”
왜 눈이 안 움직이지?
보통 이렇게 소개를 하면 그 소개 대상을 따라서 시선이 움직여야 하는 법인데…….
묘한 느낌에 창린에게 다가간 서하영은 그녀의 앞에서 손을 몇 번 휘적거리고 나서야 그녀의 상태를 깨달았다.
“아, 기절했다.”
* * *
“호위가 귀신 좀 봤다고 기절하기 있긴가?”
“……낭인 생활을 하면서 귀신과 싸운 적은 없다.”
“뭐, 그건 당연하긴 하지.”
귀신이 나타나면 퇴마사나 도사를 부르지 낭인을 부르진 않으니까.
낭인들도 제 칼이 안 통하는 귀신과 싸우고 싶진 않을 테니 피해 다닐 거고.
“그래도 기절까지는…….”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지.”
“아니, 뭐 나는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나는 그쪽이 전문이라 앞으로 그런 쪽이랑 많이 싸울 텐데.”
“……괜찮, 다.”
대답이 많이 별론데.
흔들리는 동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창린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깨닫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지금 중요한 건 창린이 아니니까.
약제당.
거침없이 내부로 들어간 설천위는 빠르게 목표로 했던 곳을 찾아 도착했다.
“잘들 있냐!”
호쾌하게 문을 열어젖힌 설천위는 침상 곳곳에 누워 있는 이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학관에 도착했다고 안심하고 무리하게 수련을 감행한 놈은 없는 것 같다.
평대원들은 솔직히 이제 많이들 회복한 상태다.
조금만 더 쉬면 바로 훈련에 들어가도 될 정도.
문제는…….
“밥은 잘 먹고 있고?”
양팔이 부러진 설천강과 배때기에 구멍이 뚫렸던 청수다.
침상 중에서도 안쪽.
그곳에 자리한 설천강에게 다가간 설천위에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여 소저가 잘 챙겨 주고 있다.”
“오올?”
이건 설마?
“맞는다.”
“아니, 나는 사내 연애 환영…….”
쩌적.
“으억?!”
침상에 올려놓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재빨리 일어선 설천위는 엉덩이에 붙은 얼음을 털어 냈다.
“에이 씨, 내공 수련만 했다고 이렇게 느는 게 어딨어.”
“네가 할 말이냐.”
“나니까 하지. 진짜 억울해서. 나는 백날 수련해도 아직 강기도 못 쓰는구먼.”
“강기는 나도 못 쓴다. 그리고 넌 혼들 덕에 쓸 수 있지 않냐.”
“나 혼자 못 쓰면 못 쓰는 거지.”
히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살짝 얼음이 낀 침상을 털며 그곳에 다시 앉았다.
“그래서 어때? 친선전 전까지 회복 가능해?”
“충분하다. 지금도 움직일 순 있으나 혹시 몰라 사용을 자제하는 것뿐이니까.”
“그럼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다.
“일단 훈련은 우리가 이번 원정으로 얻은 것을 갈무리하는 방향으로 갈 거야.”
“그게 맞겠지. 모든 대원이 갈무리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테니.”
“그러니까. 여하튼 그렇게 알고 빨리 털고 일어나서 합류해.”
“흥, 문제없다니까.”
“그럼 됐고.”
설천강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어느새 이쪽의 대화를 듣고 모인, 훈련이 가능한 이들을 바라봤다.
복귀하는 길엔 혹시 몰라서 훈련을 시키지 않았지만…….
“자, 훈련 시간이다.”
“예!!”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놀 시간이 어딨어?
그렇게 설천위는 잠룡대를 이끌고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2주가 지난 뒤에 설천강이 합류했고.
그러자, 쉬는 시간마다 그를 챙겨 주던 여웅의 기세가 조금 더 좋아졌다.
거기서 2주가 더 지나고 나선 청수마저 합류했다.
청수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이를 악물고 훈련하던 송아의 움직임이 조금 더 좋아졌다.
어느 날은 개인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불러 대련을 하고.
어느 날은 수업을 위해 온 남궁선에게 죽이 되도록 처맞았으며.
어느 날은 설천위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 환호의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수련을 쌓고 성장해 나갔다.
이제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친선전을 위해 출전 인원들은 움직였다.
친선전은 이곳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니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황실이 준비한 무대로.
그렇게 무림학관의 학생들이 이동을 시작할 때.
흑룡학관의 정문.
출전하는 이들 외에도 구경을 위해 모인 수많은 군중 속에서 당당하게 선 백유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검은 무복 위로 흰색 바탕에 흑룡이 수놓인 장포를 어깨에 걸친 그녀는 군중을 바라보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용은 없으나, 용과 같은 기세가 사방을 메운다.
“우리는 흑룡이니!”
쿠릉, 쿠르릉.
기(氣)가 공기와 부딪히며 마치 용이 우는 듯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 경이롭기까지 한 광경 속에서 백유는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의 목을 물어뜯는 악룡이 될 것이다!”
“우오오오!!”
기세를 한껏 끌어올린 흑룡학관 또한 친선전을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친선전이 열리는, 작은 호수가 있는 연하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