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213화-돌아왔……. (2)
“생각보다 더 빠르네.”
고작 며칠.
무림학관에 도착한 설천위는 여전히 큼지막한 대문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몇 번 산적을 만나는 사소한 마찰이 있었지만, 훌륭하게 성장한 문율 덕에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뭔가 생각이 바뀐 듯 꽤나 손속이 엄해졌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다.
전투할 때나 표정이 바뀌지 평상시에는 예전의 둥글둥글한 문율 그대로이니까.
별문제는 없겠지.
그나저나.
“조용하네.”
“그러게요.”
뭐, 시끄러울 이유가 없긴 한데.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문율과 함께 무림학관 안으로 들어서며 설천위는 뒤따라오는 인원을 확인했다.
산적들이야 문율이 알아서 정리했지만, 부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오는 길 내내 신의의 조언대로 잘 챙겨 줬더니 악화된 사람 없이 잘 도착했다.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귀환이라고 할 수 있지.
“도착했군요.”
“화 교관님?”
“오랜만이네요. 최근엔 수업도 안 나오니 얼굴 보기가 참 힘들어요.”
“방학 중이잖아요.”
“그러니까요.”
뭐야, 이 교관 농담도 할 줄 알았나.
아니, 이게 농담이긴 한가.
정문을 지나자마자 만난 화영 교관의 농담에 어색하게 웃은 설천위는 그녀를 바라봤다.
교관들은 상당수가 방학 중에도 학관에 상주해 있지만, 이렇게 정문에 나와 있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즉.
“학관장님이 찾으시나요?”
“정답이에요. 바로 갈 수 있을까요?”
“예, 뭐 저야 멀쩡해서 괜찮아요.”
“그럼 설 학생만 따라오고, 나머지 학생들은 바로 약제당으로 가도록 하세요.”
“예.”
“부탁할게.”
“맡겨 주세요.”
문율에게 잠룡대를 맡긴 설천위는 그대로 화영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화경을 제대로 못 써 박치기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 성장했네요.”
“뭐, 성장하는 게 학생의 본분이죠.”
“그 본분을 다른 학생들도 좀 지켜 줬으면 좋겠네요.”
쌓인 게 좀 많으신가.
하긴, 여긴 흙수저도 많지만 금수저도 많아서 나태함이 기본으로 깔린 녀석들이 꽤 된다.
수련 자체는 하지만, 수업에 대해선 ‘굳이? 가문에서도 배울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깔린 놈들이 꽤 있다.
괜히 학관 주변에 객잔이 많은 게 아니란 소리다.
수업 째고 술 먹으러 가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나저나.
“이렇게 급하게 저를 부르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건 아무래도 학관장님이 직접 말씀해 주실 것 같네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학관장실 앞에 도착했고, 화영 교관은 웃으며 학관장실 문을 열었다.
아니, 왔다고 미리 알리고 난 다음에 열어야 하지 않아?
아무리 기척으로 느끼고 있을 거라곤 해도…….
뭔가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화영이 열어 준 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 설천위는 왜 화영이 굳이 도착을 알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다리다가 지쳤다는 듯한 강렬한 시선들이 자신을 향해 꽂히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왔군.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네.”
“호오, 이 친구가 그 설천위인가?”
뭐야. 누구야, 이 아저씨.
팽후의 옆에서 호쾌하게 웃음을 짓는 사내를 발견한 설천위는 속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일단 구단의 단주는 아니고.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하니 다른 재야의 고수 같은데…….
음.
팽후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덩치.
호쾌하게 자란 수염.
미남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대장부다운 이목구비.
꽤나 멋있는 중년의 풍모를 자랑하는데, 왼쪽 눈에 큰 상흔이 있다.
실명한 것 같진 않지만 꽤나 큰 상처인데.
거기에다 그 등 뒤에 가만히 기립해 있는 저 여자는…….
“아, 낭괴(狼怪)?”
“호오, 날 아나?”
“네. 모를 수가 없죠.”
왠지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더니.
낭괴(狼怪).
삼왕이괴(三王二怪)의 한 명이며, 정파의 인물은 아니다.
정사지간이라 불리는 회색지대에 속한 인물.
돈에 의해 움직이는 낭인이며, 의뢰 내용을 적당히 가리긴 하나 정파든 사파든 상관없이 의뢰를 받아들인다.
선을 지키는 방식 때문에 정파에서도 그럭저럭 인정받고 있고, 일 처리가 뛰어나 신뢰감이 높아서 사파에서도 인정받는, 말 그대로 낭인의 정점이다.
다만, 설천위가 바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이 인간, 잘 죽는데.’
화경급 고수면 알아주는 강자이긴 하지만, 강함이란 건 언제나 상대적인 법.
정파든 사파든 가리지 않고 의뢰를 받는다는 뜻은 반대로 말하면 의뢰주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용당하기 딱 좋다는 소리.
이용당해도 실력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신감만으론 안 되는 게 세상엔 많지.’
“응? 내 얼굴에 뭐라도 묻어 있나?”
“아뇨. 워낙 유명인이시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설가의 천위라고 합니다.”
“하하! 그런 이유라면 괜찮다.”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의아해하는 낭괴에게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여 대충 상황을 넘긴 설천위는 바로 자리에 앉았다.
낭괴는 중도의 인물.
딱히 과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여기에 온 목적이 궁금하긴 하지만…….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는데, 이리 불러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거야 뭐, 대화를 하다 보면 알겠지.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손짓으로 차를 권하는 팽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설천위는 찻잔을 들고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먼저 고생했다는 말부터 해 주고 싶군. 자네들의 명성이 지금 학관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으니.”
“수련을 위해서 한 것일 뿐이니 그리 칭찬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잘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하지 뭐라 하겠는가?”
훈훈한 분위기에 훈훈한 대화.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팽후치고는 공치사가 길었다.
웃으며 대꾸하던 설천위가 이제 슬슬 끝내 줬으면 하고 바라던 순간.
“자네의 활약상을 무림맹에서 전해 들었네.”
“제 활약상이요?”
웃으며 말하던 팽후의 눈빛이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초절정으로 보이는 고수가 최소 여섯, 신원 불명의 화경급 고수가 하나.”
답을 요구하는 팽후의 눈빛에 설천위는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그를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다고 초절정 고수 여섯을 죽일 수 없을뿐더러 화경급 고수는 더더욱 운만으론 절대 이길 수 없지.”
[맞는 말이구나.]
[화경급 고수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당연한 소리구나.]
씁, 당신들도 동의하면 어떡해?
“……무림맹에서 보내신 분들의 능력이 아주 뛰어나신가 보네요?”
“암은단(暗隱團)이 움직였다더군.”
아따, 장인어른 뛰어나시네.
부하분들도 눈썰미가 장난이 아니셔.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사이, 팽후가 본심을 꺼냈다.
“나는 지금 자네를 갑(甲)으로 올려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을 뿐이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
“그거라면 일단 보류하는 게 어떤가 싶은데요.”
“이유는?”
“무(武)로 이긴 게 아니니까요.”
“과연.”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의 손바닥에 땀이 스멀스멀 맺히기 시작할 때쯤.
“좋네. 일단 보류하도록 하지. 마침 친선전도 오고 있으니 그때 보고 결정하겠네.”
“감사합니다.”
“자네가 관심 받는 것을 싫어하는 듯하니 이쪽도 신중을 기하는 것뿐이네.”
자신은 할 이야기를 다했다는 듯 눈빛이 돌아온 팽후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낭괴를 바라봤다.
“자네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이리 찾아와 놓고 아직도 말해 주지 않으니 나도 궁금하군.”
팽후의 재촉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차를 홀짝이던 낭괴는 씩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본인 앞에서 해야 할 이야기이니 어쩔 수 없었지.”
본인 앞에서 해야 할 이야기.
그 말에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했고.
낭괴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설천위, 네 목에 걸린 현상금이 기어코 은자 만 냥을 넘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개 같은…….
“얼마 전 여러 개의 조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현상금을 걸어왔다. 그 결과, 만 냥을 가볍게 넘겨 버렸지.”
이런 미친?
은자 만 냥이라니.
금자로 천 냥이라는 소리잖아.
“참고로 전부 생사 불문이다. 귀족의 자식을 두들겨 팬 놈도 이렇게 화끈하게 현상금이 붙진 않을 텐데 말이야! 크하하!”
아니, 이 인간이? 자기 일 아니라고 이렇게 처웃어?!
설천위가 눈꼬리를 치켜세우는 순간, 그 눈빛을 읽은 낭괴는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걱정 마라. 우리 밑에 애들에겐 건드리지 말라고 해 놨으니.”
“우리 학관의 학생을 건드릴 생각이라면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래, 사실 그래서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건데…….”
흉흉한 팽후의 대답에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낭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훑어보곤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게 정답인 것 같군. 내 밑에 있는 녀석들은 자네에게 달려들었다간 줄초상이 나겠어.”
웃으며 설천위를 평가하던 낭괴는 고개를 돌려 여태껏 조용히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이를 바라봤다.
“창린, 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예.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솔직하군.”
부하의 대답을 듣고 웃으면서도 낭괴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만, 눈썰미가 아쉬워. 이 무림에선 겉으로 보이는 무공 실력만으로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를 수밖에. 일종의 감이거든.”
창린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린 낭괴는 말없이 앉아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저런 눈빛을 가진 녀석은 대체로 위험하니까 조심하도록. 싸우면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그 이빨을 상대의 목에 쑤셔 박는 독종이니까. 아, 칭찬이니까 화내지 말게.”
“……딱히 화는 안 납니다만.”
“그럼 다행이고. 뭐, 나는 내가 전하고 싶은 말도 전했고 보고 싶었던 녀석이 어떤 놈인지도 확인했으니 그만 일어나 보지.”
호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낭괴는 고개를 돌려 팽후를 바라봤다.
“가기 전에 부탁 좀 해도 되겠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줌세.”
“이 친구 좀 학관에서 받아 주게. 학생이든 사용인이든 저 녀석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조건으로.”
“……그건 당사자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양쪽 다.”
헛웃음을 지으며 되묻는 팽후의 말대로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설천위처럼 당황한 창린이 낭괴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린, 내 의뢰다. 이 녀석을 지켜보고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의뢰라는 말에 잠시 주춤한 창린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기요? 감시 대상 앞에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하시는 건…….”
“하하! 그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게! 이쪽도 정보를 모아야 먹고살 수 있는 힘든 직종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나름 실력도 뛰어나서 호위로도 쓸 수 있으니 양해 좀 해 주게.”
“아니…….”
……이 인간, 이래서 빨리 죽은 건가?
자기 할 말만 하는 꼴이 딱 칼 맞기 좋아 보이는데?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창린을 쓱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두 사람 다 동의했으니 사용인의 신분으로 넣어 주지.”
“크하하! 고맙군!”
팽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호쾌하게 웃은 낭괴는 거침없이 학관장실을 나갔다.
“바람 같은 건 여전하군. 그나저나 자네도 고생이 많아. 이 이상 딱히 할 말이 없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게.”
“예,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게 뭐 있나. 빨리 가서 쉬도록.”
“그럼 이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바로 학관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창린.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미모의 창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고작 정보를 조금 넘기는 거로 주인공급 인물 하나를 더 얻었으니 나쁘지 않을지도?
* * *
설천위 일파가 사용하는 훈련장.
여느 때처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어야 할 훈련장의 공기가 오늘따라 아주 미묘했다.
“……기쁜 걸까요, 화가 난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이유는 하나다.
유예린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참으로 묘했기 때문이다.
설천위가 돌아온 것이 좋으면서도 그를 향한 화가 풀리지 않아 감정이 오락가락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아니, 이럴 거면 차라리 마중이나 가지.
참 유예린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그래서 더 유예린다운 모습일 수도.
한숨을 내쉰 서하영은 순간 훈련장 문 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기척.
다른 사람들도 느낀 듯 훈련을 멈추고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엔 웬 여자와 함께 등장하는 설천위가 있었다.
그 사실을 서하영이 인지하고 설천위를 향해 경고하려던 그 순간.
“돌아왔…….”
한 줄기 섬광이 설천위의 말을 끊었다.
아니.
‘……목숨줄까지 끊은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