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212화-돌아왔……. (1)
잠룡대가 처음 습격을 받았던 객잔.
수리비를 포함한 사죄 비용을 설가의 이름으로 달아 버리고 객잔의 별실을 통째로 빌렸다.
환자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자식이 둘이나 다쳤는데 아버지가 그 정돈 내줄 수 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충 객잔의 배상금에 대한 이야기를 서한으로 보내기 위해 붓을 놀리던 설천위는 문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상태는?”
“일단 목숨은 다 건진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문율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내가 손을 썼는데 죽을 리가 없지.]
신의까지 동원해서 치료했는데 죽으면 안 되지.
“다만, 회복까지 꽤나 시간이 걸릴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당장 청수만 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상이고, 양팔이 으스러진 설천강은 말할 것도 없다.
뛰어난 신의의 치료와 고수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감안해도 최소 한 달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터.
“앞으로 도적 토벌은 없으니 푹 쉬라고 전해. 한 달 휴식을 취하고 복귀한다.”
“예.”
문율의 대답에 다시 붓을 들고 서한의 내용을 적던 설천위는 얼마 못 가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왜? 하고 싶은 말 있어?”
“……예.”
우물쭈물하던 문율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설천위를 바라봤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갑자기?”
“……저만, 멀쩡해요.”
자신만 멀쩡하다.
그 말에 설천위는 아예 몸을 돌려 문율을 바라봤다.
자신만.
아마 잠룡대 전체를 말하는 건 아닐 거다.
상태가 괜찮은 친구가 두셋 정도는 더 있었으니까.
그가 비교하는 대상은 설천위가 직접 작은 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던 4인을 말하는 것일 거다.
여웅, 청수, 규학, 문율.
이 넷.
또, 좌백이라는 머리를 담당하는 친구도 있으나 그 친구는 애초에 무력으로는 조금 뒤처지는 편이라 조장이 아닌 참모로 삼았다.
전체적인 조율을 맡겼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설천위가 작은 조장으로 세운 이들은 저 넷.
그런데 그 넷 중 셋은 구마에게 큰 상처를 입은 상태다.
기습을 당한 청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머지 둘은 그 상황에 반응해 움직인 결과 부상을 당했다.
즉.
“구마를 향해 달려들지 못한 자신이 싫다, 이건가?”
“……예. 제 용기의 부족함이 친구들을 더 다치게 한 것 같아요.”
“흠.”
이건 참…….
[정파로구나.]
[훌륭한 아이야.]
“문율, 너답다고 해야 하나?”
“예?”
“아니, 별거 아니야.”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어리석게 달려든 그들을 비난했을 거다.
도망치는 선택을 한 자신이 옳다고 합리화했을 거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도망치는 것이 결코 틀린 답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합리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내는 무의식의 방어기제인데.
그런 방어기제 따위 없이, 스스로가 느낀 잘못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입을 연다.
“무량대해(無量大海)네.”
“무량대해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바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거대하게 성장하는 바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문율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강해지는 방법을 묻고 싶어서 온 거지?”
“네.”
“너는 냇물로 시작해 수많은 지류를 받아들여 강이 되고, 강이 되고도 수많은 지류를 흡수해 바다가 될 인물이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제가요?”
“그래, 네가.”
[참 기이하구나. 너는 가끔 놀랍도록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면이 있어.]
천마의 감탄에 설천위는 뜨끔한 마음을 감추며 다시 문율을 바라봤다.
“그러니 하나만 주의해.”
“경청하겠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바다라도 오물이 쌓이고 쌓이면 오염되어 더럽혀지는 법이야. 맑은 물만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나 과한 오물은 경계해야 해.”
뭔가 뻔한 조언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문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하나 더.”
입꼬리를 씩 올린 설천위는 문율을 바라보며 웃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녀석들은 전부 내일 새벽에 안뜰로 집합시켜.”
“알겠습니다.”
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문율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
그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듣고 싶은 말을 들은 문율 또한 문을 닫고 다른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너, 너, 너는 들어가. 어디 환자가 수련하려 그러냐.”
다음 날 새벽.
뒤뜰에 모인 이들 중 규학을 비롯한 몇 사람을 쳐낸 설천위는 끝내 남은 네 사람을 바라봤다.
굳은 결의를 다진 문율의 뒤로 마찬가지로 비장한 얼굴로 서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만한 격전을 치른 상황에서 몸이 멀쩡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고만고만한 실력의 잠룡대에서 그랬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약한 적을 상대했거나, 전선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용기가 부족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든.
우연히 적과 많이 조우하지 못했든.
“너희는 아마 한 걸음 혹은 반걸음을 내딛지 못해 이곳에 서 있는 것일 게다.”
“예.”
문율의 담담하기 그지없는 인정에 설천위는 웃으며 네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남보다 이 보(二步) 더 앞서는 이들이 되어라.”
검을 뽑으며, 설천위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그리 만들어 주마.”
그 몸에서 일어나는 기세가 서서히 공간을 삼키기 시작한다.
“해가 완전히 머리 위로 올라가기 전까지 내 앞으로 걸어와라.”
주위의 동료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적을 꿰뚫는 검이 되게 해 주마.
* * *
“후, 오늘도 평화롭네.”
“……유 언니는 평화의 기준이 상당히 낮은가 봐요.”
어떻게 이 꼴을 보고도 평화롭다고 하는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서하영은 너저분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어질러진 훈련장을 둘러봤다.
설천위가 도적 토벌을 위해 떠난 이후, 개인전 수련을 위해 모인 이들도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 몇 달만 지나면 친선전이니까.
황실의 중재까지 확실해진 지금, 아마 엄청난 규모로 열릴 친선전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이를 악물고 수련에 집중하던 시간.
“보고입니다.”
“보고요?”
휴식을 취하던 유예린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부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웬만하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호위의 기본인데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유예린은 부하가 내민 서한을 받자마자 펼쳤다.
그리고.
“꺅!?”
촤라락!
옆에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기세에 비명과 함께 창을 움켜쥔 서하영은 이내 진정하고 유예린을 바라봤다.
북해의 빙정이 떠오를 정도로 차갑게 굳은 얼굴.
그 모습에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서하영은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예린의 표정을 이렇게 크게 변화시킬 만한 사람은 단 하나뿐이니까.
“……설 공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응, 안타깝게도. 다만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아.”
아, 다행이네.
일이 끝난 다음에 보고가 온 거구나.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하영은 다시 창을 갈무리하고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일단 지금은 무사하다는 이야기잖아요?”
“이 서한, 나한테 온 게 아니거든.”
“……예?”
“이 인간, 또 나한텐 이야기하는 걸 까먹었다고.”
설가에 전해진 소식이 무림학관으로 왔고, 그 소식이 지금 유예린에게 닿았다.
‘아…….’
왜 섬뜩한지 깨달았네.
전에 그렇게 경고했는데 또 보고를 안 했네, 그 양반.
‘안 돌아오는 게 생존 확률이 더 높을 수도.’
응.
지금 옆에서 서한을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고 있는 유예린을 보아하니 그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차라리 무림 공적이 되는 쪽이 생존 확률이 더 높겠어.
‘……조심히 돌아오세요.’
* * *
한 달의 휴식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는 이검조(二劍組)가 된 네 사람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삭고 있네.”
“애들이 한 십 년은 늙은 것 같은데.”
설천위의 기세를 견뎌 내며 전진하는 훈련에 더해, 기초 체력 단련까지.
거기에다 수련이 끝나고 자발적으로 하는, 아픈 동료를 챙기는 일까지.
이러다가 멀쩡한 사람도 환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많이 달라졌네.”
“소극적이던 성격이 조금은 변한 거겠지.”
여웅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규학은 앞서서 걷고 있는 문율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객잔을 떠난 지 이제 하루째.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장시간을 걷기엔 썩 상태가 좋지 않은 청수와 설천강 외에도 중상을 입은 동료들을 위해 마차까지 빌렸다.
참고로 마부는 지금 떠들고 있는 여웅과 규학이다.
두 사람 다 내상을 많이 다스리긴 했으나 그래도 과한 운동은 금지라는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마부석에 올랐다.
따라서 이 쓸데없이 큰 마차는 고작 한 대여섯 정도의 인원만이 호위하고 있는데…….
“이놈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아, 나왔다.”
“벌써?”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헛웃음을 지은 규학과 놀랍다는 듯 고개를 드는 여웅.
과연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엔 누가 봐도 산적처럼 보이는 이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쪽은 왔던 길이 아닌지라 예상은 했으나 이리도 빨리 마주할 줄이야.
스릉.
“흐하하하! 한번 해 보겠다는 것이냐?”
말없이 검을 뽑는 문율의 모습에 호탕하게 웃은 산적 놈이 어깨에 걸친 큼지막한 도를 붕붕 휘두르며 도약했다.
이대로 단숨에 떨어져 그 무게와 속도로 상대를 베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냥 피하면 될 뿐인 단순한 공격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기습을 펼치면 대부분 이류에서 삼류 수준에 불과한 호위 무사들은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당하기 일쑤다.
죽일 생각까진 없다.
검을 잘라 내고 조금 깊게 베어 주면 알아서 겁먹고…….
산적 두목이 입꼬리를 비틀며 떨어지던 그 순간.
“시간 없다.”
짧은 목소리와 함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아니, 허공을 갈랐다고 생각했다.
“커헉!”
배부터 어깨까지.
단숨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인 산적 두목이 고통에 몸을 비트는 그때.
“비키십시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어느새 검집째로 휘두른 검이 산적 두목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뼈가 부러진 것 같은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산적 두목의 몸이 꼬꾸라진다.
단숨에 제압되어 바닥을 기는 산적 두목의 앞에서 검집을 그 머리 위에 올린 문율이 싸늘한 눈동자로 산적들을 바라봤다.
“저는 지금 여러분을 배려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무기를 놓고 해산하세요.”
나지막이 경고하는 그 몸에선 잠룡대의 이들에겐 아주아주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패도(覇道)를 걷는 자의 것과 같은 압도적인 기세.
누군가의 그것과 닮은 흉흉한 기세가 산적들을 단숨에 와해시킨다.
“으, 으아아아!”
“도망쳐!!”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하는 산적들을 짧게 바라본 문율은 이내 몸을 돌려 고삐를 쥐고 있는 규학을 바라봤다.
“바로 출발하죠.”
“어, 으응.”
뭐지, 얘 원래 귀여운 유형이었는데.
친구야, 참으로 적응 안 된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규학이 다시 말고삐를 휘둘러 마차를 움직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혼들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바다와 같은 아이구나.]
[허허, 저것을 흡수할 줄이야.]
그사이 반쯤 죽어 가는 산적 두목을 옆으로 치운 문율이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설천위는 떨떠름함을 감추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말한 물줄기가 그건 아니었는데.”
난 무공을 흡수하라고 했던 건데, 이게 아닌데?
당당하게 일검조를 이끌고 걸어가는 문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라, 모르겠다.”
뭐, 강해지면 좋은 거지.
설마 패도를 걷는다고 사파로 가기라도 하겠어?
살짝 불안해지는 마음을 속으로 누르며 설천위는 걸음을 옮겼다.
일단 돌아간 후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