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211화-구마(龜魔) (5)
[크아아아아아아악!!]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괴성이 울려 퍼진다.
허나, 그 괴성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
끔찍한 고통에 금세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그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전부 갈아 내는 건 무린가.”
[후욱, 후욱, 네놈……!]
어깨를 으쓱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구마는 까득 이를 갈며 두 눈을 부릅떴다.
전부 갈아 내?
이놈은 방금 전의 공격으로 그런 걸 원했단 건가?
고작 한 수로 나를?
끔찍한 모멸감과 함께 뇌를 뒤흔드는 분노가 솟구쳤지만, 구마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삼켰다.
모멸감이고 뭐고, 지금 자신이 승기를 뺏겼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바람이 처음 깃들었던 오른손은 그 형체를 잃었고, 팔은 웬 누더기가 하나 걸려 있는 수준이다.
몸을 감쌌던 갑각은 베인 곳이 거의 없지만, 내부가 완전히 망가져 너덜너덜한 상황.
심지어 그 바람을 전부 해소한 것이 몸을 지나 목을 잠식하기 직전이었던 터라 오른쪽 가슴도 이미 난장판이 되었다.
천천히 회복되곤 있지만, 도저히 이번 싸움 중에 회복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자신은 주먹을 쓰는 권사(拳士).
무기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엄청난 실책이다.
거기에다…….
‘……괴물 놈.’
또 다른 죽음에 익숙해질수록 선명히 느껴졌다.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가공할 영력이.
혼(魂)을 짓누르는 무형의 무언가가.
자신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주변에 흩뿌려진 놈의 영력이 느껴졌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했던 검은 관.
그것의 시작점이 저 희미한 영력의 파편이란 것을 깨닫고 나니,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저 괴물 놈, 저런 희미한 영력만으로 그런 짓을 했던 건가.
아니, 희미하진 않은가.
그 강도를 생각하면…….
‘숨겼군.’
암경(暗勁)과 같은 이치겠지.
모르면 당한다는 결과도 똑같고.
“뭐야, 겁먹었어? 누가 보면 쫄아 버린 줄 알겠어?”
시답잖게 도발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구마는 화를 씹어 삼키며 왼팔을 가슴 앞으로 붙였다.
그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쯧, 남의 조언을 잘 못 알아먹는 양반이네.”
[마음대로 지껄여라.]
도발 따윈 무시한다.
상대가 강자라면, 그에 맞게 침착하게 싸우면 될 일이다.
실수를 최소화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해서 대응한다.
‘……이미 늦었으나 나는 그렇게 이 무림을 살아왔다.’
마(魔)라는 글자를 걸고 무림에서 버텨 온 것이 고작 운 때문은 아니란 말이다.
한껏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는 구마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러면 더 진다니까?”
말귀를 영 못 알아먹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 설천위가 뒷짐을 지는 순간.
쿵!
공간이 울렸다.
마치 거인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쿵!
쿵!
그리고 그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한다.
“하나, 당신은 둔해졌어. 나도 잘 몰랐지만, 여하튼 내 기세가 당신의 움직임을 제약한 것을 모를 정도로 둔해졌지.”
[확실하다.]
그건 씁쓸하지만, 천마 할배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아마 팩트겠지.
“그렇다면 그렇게 겁먹으면 안 되지. 내 힘에 더 짓눌리잖아.”
[겁먹은 것이 아니다. 신중해진 것이지.]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겁먹은 것과 신중한 것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아예 꼼짝도 안 하는 모습을 보니 그 말에 썩 믿음이 안 가긴 하는데.
그래도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내가 분명 말해 줬잖아? 친절하게 기술명까지 말해 줬는데, 왜 대비를 안 해?”
[……뭐라?]
의문.
그와 동시에 구마의 고개가 아래로 향한다.
걸레짝이 되어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팔.
그곳에서 아주 미약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른 곳은 갑각 때문에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바람이.
“태란(颱卵).”
어딘가의 우주 전쟁이 떠오르는 이름이지만 여하튼 이게 그냥 막 지은 이름이 아니라고.
“알(卵)이라면, 깨어나는 게 있지 않겠어?”
설천위의 질문과 함께 본능적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움켜쥔 구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단숨에 뜯어내려고 했거늘……!
[네노오오옴!!]
뿌득 뿌득.
무형의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한 팔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왼손의 악력조차 가볍게 이겨 낼 정도.
“설마, 네가 아파서 발광하는 동안 내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주변에 뿌린 영력은……?!]
“두 번째 장치지. 이러기 위한.”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트는 것과 동시에 요동치기 시작한 영력이 실체를 이뤄 구마의 몸을 속박한다.
왼손으로 오른팔을 붙잡은 모습 그대로 속박되는 구마.
몸을 비틀어 흑관들을 떨어트릴 여유조차 없어 그대로 속박된 구마가 이를 악무는 그 순간.
콰각.
무언가가 갑각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바람이 한 줌의 구슬 속에서 태풍이 된다.
“후, 그럼…….”
부러진 도를 대신해 검을 움켜쥔 설천위는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태란의 완성을 위해 녀석이 아파하는 동안은 공격하지 못했지만, 이젠 내 손을 떠났으니 다른 곳에 집중해도 된다.
[침착하게 그려 내는 것에 집중하거라.]
현태중의 조언을 들으며 검을 겨눈 설천위는 어느새 꽤나 능력에 적응했는지 오른팔 주위의 갑각을 모아 태풍을 막으려는 구마를 바라봤다.
훌륭한 시도다.
다만, 그 시작이 너무 늦었다.
[끄아아아아압!!]
괴성과 함께 억누르려 했지만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 태풍은 그의 어깨를 집어삼키고, 이윽고 가슴을 집어삼키기 위해 전진한다.
그리고.
“흡!”
준비를 끝낸 설천위가 한 걸음 내디딘다.
검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가진 않는다.
그것은 벤다는 행동이니까.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그려 내는 것.
[네놈?!]
태풍을 막아 내던 도중에 그 광경을 목격한 구마의 얼굴이 한 번 더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설천위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를 시험대로……!]
자신을, 고작 연습 중인 기술의 시험대로……!
그딴 방식으로……!
내 목을……!
치솟은 분노와 전신을 가득 채운 모멸감에 눈이 돌아간 구마는 왼손을 풀었다.
갑각으로 최소한 막아 내고, 왼손을 움직인다.
저놈의 오만함이 가득한 검을 비틀어 쳐 내고, 그 목을 꿰뚫어 버리리라.
이 몸뚱이가 바람에 갈려 나가 한낱 육편(肉片)으로 변해 산산이 흩어지더라도 이 손은 반드시 저놈의 목에 처박으리라.
악과 독기로 가득 찬 구마가 땅을 박차려는 그 순간.
설천위의 검이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깔끔하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단 한 번의 궤적을 그려 낸다.
검은 구마에게 닿지 않았다.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으니까.
허나, 확실히 그려 냈다.
구마를 베어 내는 궤적을.
[커헉!]
땅을 박차는 그 순간, 가장 앞으로 내밀었던 다리가 끔찍하게 잘라진 것을 느낀 구마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진다.
이윽고, 궤적 속에 있던 구마의 신체에 긴 선이 그려지고.
[……이건, 대체 무슨 검이냐?]
닿지 않음을 깨닫고 땅에 꿇은 구마의 물음에 설천위는 검을 납검하며 작게 대답했다.
“잔월(殘月).”
[선명하기 그지없는 달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우나, 영원히 닿지 않는 아름다움은 뼈에 사무치도록 잔혹한 법이지.]
……대체 왜 이름이 잔월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초식과 달리 온전히 궤적을 그려 내는 잔월은 검기를 활용한 검식이라 검으로 베는 것 이상의 범위를 가진다.
당연히 온전히 궤적을 그려 내는 데 집중하는 만큼 위력은 최상위권이고.
[좋은 이름이군.]
[이놈은 그 의미를 모를 것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뭐야, 왜 둘끼리 통해?
또 나만 모르는 이야기야?
서하영이 말하는 ‘촤라락 팍!’이랑 같은, 뭐 그런 건가?!
혀를 쯧쯧 차는 현태중의 모습에 삐쭉 입술을 내민 설천위를 보며 구마는 쓰게 웃었다.
[내 갑각은…….]
“어떻게 베었냐고? 뭐, 간단하지. 그런 영적인 방어는 대체로 죽어 가면 약해지거든.”
아마 처음부터 이 공격을 했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막혔을 거다.
갑각에 그저 생채기나 좀 내고 튕겨 나왔겠지.
물론, 그것을 알기에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온 거지만.
입꼬리를 올리는 설천위의 모습과 함께 구마는 눈을 감았다.
[……내 패배다.]
콰가가가가가각!
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전진한 태풍이 끝내 구마의 몸을 집어삼킨다.
모든 것을 분쇄하는 바람이 연약해진 갑각을 헤집고 들어가 그 존재를 찢어발긴다.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온 것은, 완전한 죽음.
하늘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털썩 주저앉았다.
“띠벌……. 더럽게 힘드네.”
진짜 있는 거 없는 거 다 쥐어짰다.
* * *
“……어떻게 된 거지?”
설천위가 싸우던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다른 대원들과 숨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규학은 하늘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바람에 이를 악물었다.
설천위가 바람을 다루는 것은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 바람은…….
좋지 않은 예감에 규학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내가 보고 올게.”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그럼!?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헷갈리지 마라.”
기절한 설천강을 대신해 지휘를 맡은 여웅은 목을 타고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며 규학을 말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보고를 위해 떠난 녀석들이 온전히 도착할 수 있게 이곳을 지키는 거다. 그러기 위해 부상자들까지 이곳에 둔 것이다!”
“그럼 지금 당장 대주한테 가서……!”
“대주가 진다면!”
규학의 말을 끊은 여웅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작게 읊조렸다.
“이곳에서 티끌만큼의 시간이라도 버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 전부가 죽더라도.”
“…….”
죽음을 각오한 그 대답에 규학은 이를 악물었다.
“……일각이 지나면 대주의 시체라도 찾으러 가겠어.”
“말리지 않으마. 다만, 우리는 네 시체를 찾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상관없어.”
검을 쥔 채, 다시 자리에 앉은 규학은 살기가 깃든 눈으로 앞을 노려봤다.
“내가 죽으면, 어차피 다 죽겠다고 달려들 거잖아?”
“……부정하지 않으마.”
규학의 흥분이 가라앉는 것과 함께 잠룡대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겁먹어서?
아니다.
각오했기 때문이다.
여웅 다음으로 몸 상태가 괜찮은 문율의 몸에선 보기 드물 정도로 흉흉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뭔 개폼을 이렇게들 잡고 있어?”
숲 쪽에서 들려온 느긋한 목소리.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던 문율의 표정이 일순 강아지와 같은 둥근 형태로 변하고.
벌떡 일어난 규학이 고통에 상체를 숙이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거, 살라고 도망치게 해 줬더니 왜 다 여기서 죽을상을 하고 있는 거야?”
“설 대주!!”
“살아 있었구나!”
“그럼 살아 있지 죽어 있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문율을 받았다.
아니, 사내놈이 달려드는 건 좀 싫긴 한데 넌 남동생 같은 느낌이니 한 번 봐주마.
“부상자 챙겨. 귀환이다.”
아무래도 이 이상 도적 토벌을 진행하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까.
* * *
[……죽었군.]
“누가? 설마 보낸 녀석이 죽은 거야? 누굴 보냈는데?”
[구마(龜魔)다.]
“그 반푼이를 보냈다고? 미쳤어? 아니, 잠깐! 죽었다고? 구마가?”
[그래.]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구마는 현경에 근접한 초고수다.
최소 천하 십대 고수는 돼야 그를 이길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인데…….
“……졌다고?”
순간 자신의 목 언저리에 있는 봉인의 흔적을 바라본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짜 괴물이 되어 가고 있네?”
녀석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봉인한 낙인(烙印).
그 일의 장본인이 이젠 천하 십대 고수급의 강자조차 쓰러트렸다고 한다.
물론, 구마는 악귀를 받아들인 만큼 설천위가 하는 영적인 공격에 취약했으니 빈틈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거기에다 구마의 성격을 생각하면 방심하다가 큰 손해를 보고 시작했을 가능성도 높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긴 것은 이긴 거다.
“얘가 진짜 누나를 흥분하게 만드네?”
혀로 입술을 핥은 언여휘는 휙 몸을 돌렸다.
[어딜 가나?]
“계획에 실패했으니 다음 계획을 준비해야지.”
[계획?]
“어. 아는 녀석들이 축제를 준비하고 있어서 선물을 보낼까 하거든.”
품에서 꺼낸 당과를 입에 문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주 커다란 놈으로 하나 선물해 줄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