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210화-구마(龜魔) (4)
한 걸음.
작게 옮긴 일보(一步) 덕에 사람의 목 따윈 간단하게 부러트릴 공격을 피한다.
대체 몇 번을 반복한 걸까.
걸음을 옮기고.
허리를 비틀고.
손을 뻗고.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몸을 움직였다.
매 순간순간이 죽음과 이어진다.
모든 순간, 찰나의 판단 속에서 죽음을 피하는 선택지를 고른다.
그리고 그 선택의 연쇄 속에서 설천위는 깨달았다.
자신도 한 가지를 잊고 있었음을.
“……성능 확실하네.”
바람이 깃들고 있다.
움직임은 조금 더 빠르고, 부드러워졌으며.
바람에 민감해진 피부는 적의 공격을 0.01초라도 더 빠르게 감지한다.
그야말로 찰나의 성장.
허나 그 찰나가 삶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설천위는 버텨 냈다.
그렇게 수십 합의 공격이 지나갔을 때쯤, 구마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네놈?]
이상하다.
놈의 실력을 생각하면 자신의 공격을 이리도 오래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술법으로 온갖 방해를 해야 겨우 일권을 피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격차다.
절대 좁혀질 수 없는 격차가 놈과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거늘.
[대체 어찌 피하는 것이냐!]
“그러게. 어떻게 피하고 있는 걸까.”
구마의 외침에 오히려 심드렁하게 고개를 꺾은 설천위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저리 말을 걸어오면서도 구마는 주먹을 멈추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뭐지.
그거 하나로 이렇게까지 된다고?
정말?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혹시……?
‘각성한 건가?’
드디어 재능이 꽃피는 건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武)의 재능이 드디어?
[망상을 하는 표정이구나.]
“……그딴 표정이 어딨어요?”
아니, 긴박한 순간에 이렇게 말 걸래요?
지금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중인 거 안 보입니까?
옆에서 초를 치는 천마의 말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이어지는 천마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네놈이 잠들어 있는 무(武)의 재능을 깨우친 것 같은 표정을 짓기에 그리 말해 봤다.]
“크흠, 아, 아니에요?”
[아니다.]
단호박이시네.
이걸 이렇게 단박에 끊어 낸다고?
[노옴! 어디서 잡담이냐!!]
분노한 구마의 외침에 설천위는 다시금 손을 뻗었다.
구마의 주먹 하나하나는 전부 날카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모든 순간, 급소를 노리며.
한 번 막히고 회수하는 과정에서도 갑자기 궤도를 틀어 공격이 들어온다.
끈질기게.
한번 문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듯 독하게 공격을 이어 나간다.
정말, 내가 이걸 어떻게 피하고 있는지 스스로 궁금할 정도로.
그런 의문과 함께 손을 뻗어 구마의 공격을 받아 낸 순간.
[네놈?!]
구마의 다급한 음성에 설천위는 자신이 처음으로 구마의 공격을 직접 막아 냈음을 깨달았다.
왜일까.
여태까진 닿는 것도 무서워 어떻게든 피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나는 왜 갑자기 막는 걸 선택했고.
어떻게 그걸 성공한 걸까.
그 답이 안타깝게도 지금 보였다.
안타까운 이유는 그 답이 증명임과 동시에 증거이기 때문이다.
휘오오오오.
양팔을 휘감은 기묘한 바람.
무려 태곤옥(颱鯤玉)의 공능인 풍(風) 속성 추가다.
게임에선 풍 속성의 내성이 크게 오르고, 공격에 풍 속성의 대미지가 더해지는 수준이었는데…….
“템도 재능에 따라 위력이 나오나?”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단어를 쓰는구나. 허나, 네가 말하는 템이 기물을 말하는 것이라면 정답이다.]
……정답이야?
아니, 템빨도 재능에 영향을 받아?
더러운 세상.
[세상이란 본디 불공평한 것이지.]
끊임없이 공격을 이어 나가는 구마를 보며 천마는 고개를 저었다.
[저 어리석은 놈이 자신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치다.]
[뭐라?]
[네놈은, 육신은 재능을 품었으나 혼은 재능을 품지 못했구나.]
육신은 재능을 품었으나, 혼은 재능을 품지 못했다.
그 평가에 구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예전의 것과 다른 육신.
갑각이 생겨 통증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둔한 몸뚱이.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약한가?
아니다.
온전히 마(魔)가 깃들었던 순간의 고양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조금 전의 일이니 당연히 생생할 수밖에.
그런데.
[어째서 닿지 않는 것이냐?]
대체 왜?
원래라면 단숨에 때려잡았어야 할 녀석인데, 나는 왜 이리도 오랫동안 허공에다 헛손질이나 하고 있는 것이지?
대체 왜?
가볍게 그 목을 취했어야 할 어린놈에게 대체 왜?
[그것이 네놈의 한계다. 애송아.]
어느새 손이 멈춰 버린 구마를 천마는 냉혹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살아 있을 때는 오만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고, 죽어서는 무지로 스스로의 존재를 내놓고 있지.]
[……개소리하지 마라! 나는, 나는……!]
[깨달아라.]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천마는 설천위의 등 뒤에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네놈은 인간임을 잃은 순간, 이미 패배한 것이다. 온전한 육체를 가지고 있던 순간만이 네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천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구마는 자신의 몸이 살짝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야, 이게 되네?”
그와 동시에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웃고 있는 설천위의 얼굴이 그의 두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손에 두른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한 설천위가 바람으로 그의 몸을 살짝 띄워 올린 것이다.
“참 이상해. 분명 처음 만난 순간엔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는데.”
왜 이렇게 할 만해 보이지?
설천위의 말에 담긴 속뜻을 헤아린 구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처음엔 위협적이었는데, 이젠 아니다.
이것이 조롱이 아니면 무엇인가.
[노오옴!]
참지 못해 분노를 터트리는 구마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봐, 화를 내는데 왜 이렇게 가소로워 보일까?”
입꼬리를 비트는 것과 동시에 상체를 비튼 설천위는 자신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주먹의 바람을 느꼈다.
이게 태곤옥의 효과구나.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크구나.
그리고 그 표정으로 생각을 읽은 천마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것이, 정점에 오른 자들이 느끼는 세계다.]
아주 미세한 바람의 변화.
그것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읽고, 나아가 그 생각조차 읽어 내는 것.
지고(至高)한 무(武)에 오른 존재는 그 불가능한 영역에 손을 뻗은 자들이다.
[저놈이 끝내 올라가지 못한 경지이자 그나마 있던 가능성마저 버린 경지이다.]
그것을 구마는 스스로 버렸다.
자신의 모든 것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영생이라는 명목으로 악귀를 받아들여 본인을 흐트러트렸고.
죽어서는 그 악귀와 융화되어 날카로운 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
설천위가 처음 구마에게 위협을 느꼈던 것은 그 시기의 구마에겐 그 감각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인(武人)으로 쌓아 온 뿌리.
그것이 있었기에 설천위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이다.
[놈은 강하다.]
그건 사실이다.
웬만한 악귀는 그냥 찢어발기는 설천위의 [수란(水亂)]을 거뜬히 견뎌 내고, 먹잇감을 무는 거북이처럼 끈질긴 권법은 그야말로 끔찍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웬만한 화경급 고수의 뺨을 후려칠 수 있을 정도의 무술 실력까지.
아마 이대로 무림에 나가면 꽤나 위협적인 존재가 됐을 거다.
그런데.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던 것뿐이다.]
진심으로 그러하다.
설천위라는 이 별종은 무림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녀석이기에 그렇다.
순수하게 무(武)를 논하면 이제 갓 초절정에 오른 고수에게도 이길까 말까 한 수준이나, 가진 기이한 능력을 전부 꺼내면 화경급 고수에게도 견줄 만하다.
그런데 또 영적인 존재라면 화경급에 해당하는 상급의 악귀라도 짓밟을 수 있는 수준이다.
[네 녀석은, 언제나 내 기대를 뛰어넘는구나.]
구마의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더욱 거세게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설천위를 보며 천마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느덧 집중 상태에 들어간 듯 거칠게 주먹을 휘두르는 구마를 밀어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거센 바람이 그 몸을 휘감는 것을 넘어 거대한 태풍으로 변해 간다.
태곤옥(颱鯤玉).
그것은 태풍을 품은 알이니.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바람이 구마를 들어 올리기 시작하자, 구마는 자신도 모르게 낮게 엎드렸다.
땅에 몸을 바짝 붙인 자세로 버티는 구마(龜魔).
그 거북이와 같은 모습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거북이는 바람에 뒤집히면 못 일어나지?”
노골적인 조롱.
[노오오오옴!]
그 조롱에 구마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왜 몸을 낮췄는지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거칠게.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그 모습에 탄식하며 천마는 고개를 저었다.
저것이 마(魔)에 물든 자의 최후다.
마(魔)에 먹혀 스스로를 잃는 광인의 최후.
마(魔)를 먹어 치워 그것을 버텨 내는 자는 극히 드무니.
마(魔)가 곧 악(惡)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느니라.
탄식하는 천마의 한숨과 별개로 구마는 거침없이 바람에 저항해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뭐 까먹고 있지 않아?”
설천위의 질문과 함께, 고개를 든 구마는 잊고 있던 존재를 마주했다.
[크롸라라라라!!]
바람을 타고 자신을 덮치는 거대한 용.
이것이 대체 무슨……!
“뒤집어 버려.”
뭔가 발악을 하기도 전에 용의 이빨이 갑각을 단단히 잡아챈다.
뚫리진 않았으나, 확실하게 잡힌 상황.
허나, 구마는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이 용에게 붙잡혔으니 더 이상 바람에 저항하기 위해 힘쓰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그 턱을 부숴 주마!
조금 전에 용의 안면에 꽂았던 주먹을 떠올리며 구마가 강기를 머금은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여기까지.”
설천위의 목소리와 함께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주변 전체를 가득 채우던 폭풍 소리도.
용의 울음소리도.
전부 사라진 세상.
구마는 들어 올린 자신의 팔에 기이한 것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건?]
“음, 태란(颱卵)이라고 할까?”
뭔가 미래적인 이름이네.
“태풍을 품은 알이야.”
[……언제?]
“인간은 가장 방비를 튼튼하게 한 곳엔 오히려 의식이 닿지 않지.”
예를 들어 왼손으로 가리고 있는 심장이라든가.
강기를 두른 주먹이라든가.
그런 부위들.
“그 맹점을 찌르는 것. 너도 자주 썼을 것 같은데?”
[…….]
설천위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한 구마는 말없이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바람이 너무 뭉쳐 옅은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주먹.
소리조차 빨아들이는 것 같은 압도적인 바람이 주먹을 헤집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라는 특성 때문에 많을 수밖에 없는 관절 사이를 파고들며 갑각을 갈라낸다.
베고 또 베어, 갑각에 길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끄윽!]
끔찍한 고통이 손을 타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살과 갑각 사이를 가르며 죽음이 다가온다.
처절한 고통이 육체를 잠식한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끝내 버티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구마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강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더 쉽게 이겼네.”
[갑각에 둘러싸여 네 녀석의 기세에 자신이 둔해졌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반푼이다. 마두(魔頭)로서는 일류였으나 마귀(魔鬼)로서는 반푼이에 불과했던 것이겠지.]
“……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기세에 둔해졌…….
“내가 빨라진 게 아니라?”
[네 녀석이 바람의 도움을 받아 조금 빨라졌다고 한들 현경에 근접했던 고수의 공격을 그리 쉽게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정말로?”
[정말로.]
……띠벌.
인생 더럽게 쓰네.
진짜 성장한 줄 알고 좋아했는데…….
갑자기 써진 침을 삼키며 설천위는 갑각 사이로 흥건하게 피를 흘리는 구마를 바라봤다.
“야! 빨리 끝내자!”
여기서 싸움이 길어지면 둘 다 슬퍼지기만 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