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207화-구마(龜魔) (1)
공기가 일그러진다.
설천위의 앞에 서 있던 구마는 본능을 자극하는 느낌에 망설임 없이 거리를 벌렸다.
이 본능이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자신을 살렸음을 기억하고 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기물(奇物)인 것 같긴 하나, 짐작 가는 게 없군.’
넓은 땅만큼이나 역사도 긴 무림이다.
당연히 인간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은 수많은 물건이 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도 있다.
인위적인 것의 경우, 제한된 정보 속에서 가끔 태어나는 천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물건이 많다.
당연히 그 제작법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고, 그 자체로 고유한 물건으로 남게 된다.
명장이 만든 이름 있는 보검이 가장 흔하고, 술사가 특별한 의식을 통해 만든 물건들이 가장 귀하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의 경우, 그 대부분이 영약이지만 가끔 천잠사(天蠶絲) 같은 영물이 만들어 낸 물건도 포함된다.
빙정 같은 자연적인 결정체도 그러하고.
여하튼, 이런 물건들 중에서도 진정 뛰어난 위력을 가진 물건은 알음알음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갑자기 나타난 강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유들 중엔 기물 때문인 경우도 있으니까.
소문이야 퍼질 수밖에 없다.
미지는 곧 위험이다.
허나.
“미숙하구나.”
상대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지의 위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할 수 있다면 최후의 최후까지 숨겨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물이거늘.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대놓고 사용하다니.
여유를 되찾은 구마가 이죽거리는 순간.
“미숙하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가 망설임 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후.”
그리고 조금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양팔을 늘어트린 채 구마를 바라봤다.
“나도 쓰는 건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알아서 잘 버텨 봐.”
“……네놈?”
쓰는 건 처음이다?
묘하게 거슬리는 단어 선택에 구마의 미간이 깊게 파이는 순간.
[크르르르르르르.]
설천위를 휘감은 패융의 울음소리가 더욱 흉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압도하려는 듯, 위협적인 기세가 사방으로 뻗어 간다.
극지에서 얼음이 뻗어 나가는 것처럼.
그런데 서서히 울리던 울음소리조차 일순 자취를 감춘다.
완벽한 정적.
날아가는 새조차 완전히 사라진 듯한, 정지와 가까운 침묵 속에서 구마는 돌연 몸을 비틀었다.
뿌드드득.
허나 이미 늦었다.
미처 다 피하지 못해 왼팔이 찢겨 나가는 끔찍한 고통이 뒷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구마는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비명을 지를 여유?
없다.
‘……대체 뭐냐!’
당황한 나머지 입을 열 여유조차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무언가 움직인다고 느껴 피하긴 했으나, 왼팔이 완전히 찢겨 나갔다.
“쓰읍……. 역시 쉽지 않네.”
그 순간, 자신의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구마는 즉시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의 연륜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강맹한 힘을 머금은 공격이 설천위의 일격을 막아 낸다.
‘……검?’
자신의 손에 닿고 나서야 설천위가 무엇을 휘두른 것인지 확인한 구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아까 검을 검집에 넣었거늘, 언제?
내가 보지도 못할 정도로 뛰어난 발검술을 가지고 있단 소린가?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연달아 이어지는 설천위의 공격에 구마는 다시 오른팔을 휘저었다.
아니.
“……내 왼팔이?”
“쯧, 쓸데없이 빠르네.”
잘려 나갔던 왼팔이 어느새 다시 돌아와 있음을 확인한 구마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수라(修羅)의 길.”
그것은 수라도(修羅道)라고 불리는.
“끝없는 투쟁의 길.”
끝없는 투쟁을 반복하는 길이다.
그리고 끝없는 투쟁을 위해선 죽지 않는 육체가 필요하니.
“지금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몸을 비틀며 설천위는 다시금 구마의 팔을 베어 냈다.
공간에 작용하는 기이한 힘이 다시금 구마의 팔을 재생시킨다.
“허나, 전장에서도 동료는 있는 법.”
이를 악물고 반항하는 구마의 등에 채찍과도 같은 꼬리가 쇄도한다.
몸집을 적당한 수준으로 줄인 패융의 공격.
조금 전에 구마의 팔을 뜯어 낸 패융의 입엔 피가 흥건했다.
긴 몸을 이용해 퇴로를 막은 패융을 확인한 구마는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봤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 당연한 물음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죄인이 벌을 받는 곳인데, 한 놈이 너무 강해서 다른 놈들을 패고 다니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약화시켰다.
인지 능력, 육체의 강함 등등.
모든 것을 끌어내렸다.
일정 수준 이하로 끌어내린다.
그것이 수라도(修羅道)의 법칙.
수라가 만들어 낸 길의 원칙.
물론.
“물론, 나도 약해져.”
“……거짓을 말하지 마라. 네놈의 속도는 지금 내 상태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불신하며 부정하는 구마를 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구마는 부정하지만, 당연히 시전자도 내려간다.
일정 수준 이하로.
상대를 압도적으로 약화시키면서 양학 하는 스킬이라니, 너무 사기지.
파편 다섯 개를 전부 모은 것도 아니고 하나 모은 것 가지고 받기엔 너무 강한 스킬이다.
그런데 참, 이게 아이러니한 것이.
“나는 약한 싸움에 익숙한 것뿐이야.”
이쪽은 원래 몸이 약하다.
지금도 무림인의 기준으로 설천위의 육체 능력은 일류에 겨우 턱걸이를 할까 말까 한 수준.
구마가 100이 깎였다면 이쪽은 겨우 5 정도 깎인 수준이다.
그런데, 설천위는 애초에 10일 때의 능력으로 100인 구마의 목을 노릴 정도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좀 많이 유리한 것뿐이야.”
원래 초보자가 얻으면 상당히 고역을 치르는 스킬이긴 하다.
상대도 크게 약해지지만 어찌 됐든 이쪽도 약해지니까.
다루기 어려운 스킬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좋네.’
물론 온전히 살아 있는 무림인에겐 그 효과가 줄어들긴 하겠지만…….
‘화경급이라면 비벼 볼 수 있을지도.’
혼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할지 모른다.
뭐.
너무 손해라서 쓰진 않겠지만.
이 수라도는 영역 내의 모든 사람을 약화시킨다.
적과 아군 상관없이.
웬만하면 안 쓰는 게 상책이다.
다만.
‘……슬슬 힘드네.’
이게 상당히 힘들다.
[수라(修羅)]는 함정 스킬.
영역 내의 모든 존재의 회복력을 크게 증가시키기 때문에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해 버린다.
지금만 해도 구마의 팔을 두 번이나 잘랐는데 어느새 양팔 멀쩡히 서 있지 않은가.
수라도(修羅道)라는 지옥을 품은 스킬답게, 정녕 끝이 없는 투쟁을 강요하는 스킬이다.
하지만, 이건 반대로 말하면 그 영역 내의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수준의 치유 능력을 부여해 준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즉, 영력의 소모가 엄청나다.
그런데 이 스킬의 특징은 장기전을 유도한다.
한마디로 오래 싸워야 하는데,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스킬이란 소리다.
잘못 쓰면 이쪽만 지치고 적은 멀쩡한, 그야말로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
‘후, 해 보자.’
그래서 조금 꼼수를 부려야 한다.
다행히 지금 구마와의 격차 정도라면 우위를 점하기엔 충분한 수준.
무엇보다 이쪽에는 [수라(修羅)]의 영향을 거의 안 받는 패융이 있다.
호흡을 고른 설천위는 천천히 움직였다.
손에 쥔 검을 휘두르자 어느새 자신의 몸 상태에 익숙해진 구마가 침착하게 대응해 왔다.
볼 수 없으니 예측으로 방어한다.
본래라면 처참하게 무너져야 할 예측을 통한 방어이지만…….
‘미친 노괴 새끼!’
쉽사리 무너지질 않았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어 낸 예지에 가까운 예측.
검을 휘두르기 직전에 보이는 자세를 통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모든 공격을 예측해 내는 구마의 방어에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게 저 위에 다다른 자와 아닌 자의 차이인가.
혼들의 도움 없이도 이제 웬만한 초절정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군.’
역시 무(武)로는 한참 멀었다.
무(武)로는 말이다.
“흡?!”
어느 순간 나타난 [흑관(黑棺)]이 구마의 한쪽 팔을 묶어 방어를 무력화시키고.
그 빈틈을 찌른 설천위의 검이 구마의 팔 하나를 날린다.
자신의 팔이 잘린 것을 확인한 구마는 즉시 반응했다.
아예 몸을 낮춰 가며 방어에 집중한다.
팔이 재생하는 시간을 벌기 위한 발악.
이젠 이 약해진 몸에도 익숙해져 슬슬 전투의 흐름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이런 헛짓거리를 하는 저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 있을 터.
속으로 화를 삭이며 일보전진을 위한 후퇴를 감행하는 구마.
오른팔로 펼치는 방어가 그 몸을 지키…….
“허?”
없다.
분명 자신의 목까지 올라와 급소를 지켜야 할 오른팔이 없다.
[크르르르르.]
지척에서 들리는 낮은 울음소리에 구마는 헛웃음을 삼켰다.
눈앞의 놈에게 집중하느라 어느새 까먹고 있었다.
처음 자신의 팔을 뜯어냈던 것이 누구였는지.
순식간에 양팔을 잃은 구마는 끔찍한 고통을 삼키며 움직였다.
팔이 없다면, 다리로 하면 될 일이다.
왼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오른발을 차올리는 순간.
“허허허!”
살짝 올라가던 발이 허공에서 멈춘 것을 느낀 구마는 헛웃음과 함께 자신의 코앞까지 도착한 설천위를 바라봤다.
“정녕, 괴물이로구나!”
“뭐래.”
단숨에 휘두른 검이 그 목을 베기 직전.
‘……허?’
기이한 감각에 구마는 헛웃음을 삼켰다.
시간이 급격하게 느려지는 감각.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놈의 모습조차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
몸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느리다.
그 순간, 자신의 팔이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은 구마는 일단 몸을 틀었다.
허리를 비틀어 공격을 피하고 재생하기 시작한 이 손으로 그 목젖을 뜯어내 주마.
독기로 가득한 눈동자로 몸을 비트는 그 순간.
구마는 마주했다.
똑바로 자신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는 어린놈의 두 눈을.
두 눈을 마주하며 자신의 목을 향해 검을 틀고 있는 놈의 얼굴을.
그리고 느려졌던 시간이 돌아오고.
서걱.
목이 베인 구마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끄륵.”
거의 가죽 한 장 정도만 남고 잘려 버린 목을 어느새 재생된 팔로 붙잡은 구마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아니, 대체 왜?
“왜 마지막에 능력을 해제했냐고?”
“…….”
대답은 없으나, 그 눈에서 대답을 읽은 설천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도에선 죽어도 살아나거든.”
[수라(修羅)]가 함정 스킬인 가장 큰 이유다.
켠 상태로 백날 적을 잡아도 다시 부활하거든.
뭐, 나름대로 신(神)의 영역에 닿은 정말 미친 성능의 스킬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적을 못 죽이는 건 좀.
털썩.
무릎을 꿇고 서서히 무너지는 구마를 보며 설천위는 검을 집어넣고 빠르게 움직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말 상대가 도저히 반격할 수 없을 때까지 몰아붙여 스킬을 해제하는 것과 동시에 죽이는 것. 이게 이 스킬의 유일한 활용법이야.”
스킬이라는 이해하지 못할 단어에 구마는 미간을 찡그리며 서서히 쓰러져 갔다.
이젠 출혈을 막기 위해 목을 움켜쥘 힘도 없다는 듯 완전히 늘어져 쓰러진 구마.
거의 완전히 숨이 끊어져 가는 구마를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즉시 동료를 챙겼다.
경추를 베긴 했으나, 구마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 잠깐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빙의(憑依)]까지 활용해 신의의 손을 빌려 급한 사람부터 응급조치를 취한 설천위는 숨죽이고 이쪽을 바라보던 다른 잠룡대 대원들에게 그들을 넘겼다.
“도망쳐라.”
“예? 하지만…….”
“적을 죽인 거 아니에요?”
규학을 챙긴 잠룡대원의 물음에 설천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한 번 죽인다고 끝나는 녀석이 아니라서.”
“예?”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한 번 죽인다고 안 끝나는 사람이 어디에…….
[노오옴……!]
분노로 가득한, 기이한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진다.
영력이 없는 잠룡대원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가.
목이 잘려 쓰러졌던 육체가 서서히 일어난다.
다만, 그 전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일어섰다.
가슴과 어깨에 자리한 기이한 형태의 갑각.
치켜뜬 두 눈은 흰자위가 없이 오직 검은색만이 가득했는데, 그의 별호를 떠올리니 한 단어가 생각났다.
“……구마(龜魔).”
거북이 마귀.
생전에는 그의 독문 권법인 대라구권(大羅龜拳)에서 비롯된 별호였으나.
영생을 위해 짐승의 악귀를 받아들인 그는 진정 구마(龜魔)가 되었다.
[쳐 죽여 주마!!]
육체의 죽음으로 완전히 마귀화(魔鬼化)가 진행된 구마의 포효가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