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206화-태곤옥 (4)
천하 십 대 고수가 바뀌는 주기는 일정하지 않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한 세대가 몇십 년이나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전란의 시대에는 십 년을 겨우 넘기고 바로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단, 이 교체의 경우 죽어서 사라지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은퇴하면서 십대 고수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구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공을 사용하는, 마교 출신이라고 자처하는 고수.
천하 십대 고수에 이름을 올린 것도 자신을 추적해 온 무림맹의 단주 하나를 죽여서일 정도로 그 무력은 확실했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아예 활동하지 않았고 때마침 새롭게 부상한 열 명의 강자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밀리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잊혀 간 고수인데…….
[어찌 당신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오?]
과거 그가 천하 십대 고수이던 시절에도 그 세수(歲數)가 일흔에 가까웠다.
그로부터 거의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인간이라면 마땅히 살아 있어선 안 되는 나이가 됐을 터.
아니, 무공이 높아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저리 멀쩡하게 중년의 모습으로 살아 있어선 안 된다.
[마공이구나.]
“마공이지.”
천마의 말에 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몸뚱이를 회춘시키고 유지하는 데 든 수고가 얼마인지…….”
짜증 나는 기억을 떠올린 듯 혀를 찬 구마는 다시금 설천위를 바라봤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다 이 몹쓸 몸뚱이 때문이니라.”
“손속에 사정을 둔 것도 그래서고?”
“눈치가 빠르구나, 애송이.”
청수의 경우, 복부가 꿰뚫리긴 했지만 급소를 찔린 건 아니었다.
뛰어난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과다 출혈로 죽기 전에 의원에게 가야 하겠지만.
그 외의 세 사람도 크게 다치긴 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즉, 애초에 죽일 생각 없이 공격을 했다는 소리다.
만약 죽일 생각으로 공격을 했다면 자신이 오기 전에 최소 반 이상은 죽었을 거다.
‘……전멸했을 수도 있고.’
전멸했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
이 빌어먹을 세상은, 절대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은 똑같은 절대 강자의 폭력으로밖에 막을 수 없는 곳이니까.
인간이라는 틀을 벗어난 존재들이 휘두르는 폭력이란 게 그렇다.
문제는.
‘구마(龜魔)라…….’
이 이름을 설천위가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이만큼 강하다면 게임에서도 나름 네임드로 나왔을 가능성이 큰데 이름도 못 들어 봤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원래라면 소백진처럼 게임 속 스토리에 등장하지 못하고 사라졌을 존재이거나.
구부주귀(久腐洲鬼)가 되는 후도(朽塗)처럼 게임에선 등장하지 않았던 과거의 상태이거나.
전자라면 그나마 나은데…….
‘……감이 안 잡히는군.’
후자라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귀(鬼)가 심어졌다.
아까 상대가 말한 이 문장이 문제였다.
귀(鬼)가 심어졌다는 말인즉슨 악귀화가 진행됐다는 소리다.
살아 있는 상태로.
청랑이 악귀와 악귀의 싸움에 침식되어 절반의 죽음을 맞이하며 반쯤 영체가 된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진정으로 인간을 벗어난 자들.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영생, 젊은 육체, 영적인 재능 등등.
세월이라는 한계에 가로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인간에겐 그야말로 천운이나 다름없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악귀화다.
문제는.
‘……하나같이 더럽게 강하지.’
악귀화가 진행된 인간은 악귀랑 달리 마(魔)라고 구분지어 부른다.
육도(六道)에서 무림의 대표 세력 중 하나인 마교(魔敎)가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이 마(魔)와 헷갈리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마(魔)는 그 존재감이 매우 크다.
초절정이나 절정에 머무르던 녀석들이 마(魔)가 되면 거의 화경급의 무력을 뽐내게 된다.
물론 강해진 만큼 술법에도 취약해지기 때문에 조합만 잘 짜면 오히려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긴 하다.
그래서 게임에서도 중반을 넘어가면 술법을 쓰는 동료를 꼭 집어넣는 거고.
문제는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던 자가 마(魔)가 됐을 경우다.
‘……아직 진행은 덜 된 것 같은데.’
살인을 억제하고, 내부의 악귀를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면 분명 완전히 침식된 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한참 젊은 육체를 보면 분명 악귀의 혜택을 받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육체가 반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젊음일 테니까.
“생각이 길구나, 애송이.”
“……습관이라서.”
“좋으면서도 나쁜 습관이다. 상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은 좋으나…….”
구마가 말을 흐리는 것과 동시에 설천위는 도를 휘둘렀다
도가 구마의 손에 부딪치는 순간,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강력한 굉음이 사방을 휩쓴다.
“생각이 길어 상대의 의중을 읽어 내는 데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크나큰 실책이다.”
손으로 설천위의 도를 움켜쥔 구마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목을 비틀었다.
깡!
너무도 허무하게 도가 부러진다.
“무(武)에 대한 자질이 부족하다더니 사실이구나.”
이 무림에도 맨손으로 날붙이를 붙잡아 부러트리는 인간은 거의 없다.
즉, 그런 경우에 대한 대처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훈련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이런 공격을 취한다면 거의 무조건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상대의 자질을 어느 정도 읽어 낼 수 있다.
“하(下) 수준의 대응이니라.”
부러트린 도의 날을 뒤로 던지며, 구마는 설천위를 평가했다.
도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기를 집중해 도를 강화하여 빠져 나가기 위해서 도를 움직이는 것까지는 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반응이다.
무(武)를 배웠다면.
무(武)를 이해하고 있다면.
상대가 힘을 쓰는 방향을 읽어 내고 그 흐름에 순응해 도를 지켜 냄과 동시에 자신의 몸도 지켰어야 옳았다.
“이건 조금 실망스럽구나.”
“개소리.”
혀를 차는 구마의 팔을 [흑관(黑棺)]이 나타나 붙잡았지만, 구마는 태연하게 그 흑관을 흘겨보곤 이내 다시 설천위의 두 눈을 바라봤다.
“허술하구나. 눈이 나를 보고 있질 않아.”
“뭐래.”
“쯧쯧, 이래서 정파 놈들은.”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팔을 묶은 흑관을 힘으로 부숴 깨 버린 구마는 뒷짐을 진 채 설천위를 바라봤다.
“이 녀석들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느니라.”
살인이 싫으면 아예 공격을 안 하면 되었다.
어차피 설천위와 싸울 때 저놈들은 방해도 되지 않는 버러지들이니까.
그런데, 왜 굳이 손을 썼는가?
“그리 시간이 길게 남지 않았느니라.”
까득.
노골적으로 입꼬리를 비트는 구마의 모습에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구마의 말대로다.
시간이 얼마 없다.
청수의 경우,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고.
그건 여웅이나 규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다 설천강은 팔의 부러진 형태를 보아 제대로 조치를 안 하면 영원히 불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즉, 시간이 없다.
[말려들었구나.]
“그것이 연륜이라는 것이지.”
천마의 감상에 웃으며 대답한 구마는 그대로 뒷짐을 진 채 설천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 시간이 별로 없느니라. 어서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
“…….”
구마의 재촉에 설천위는 말없이 부러진 도를 내던졌다.
[……지금이라면 내가 나서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엄청난 부담을 짊어져야 하지만 단시간에 싸움을 끝내야 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부담이다.
천마의 나지막한 제안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천마의 조력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못 버텨.’
정신력도, 육체도 못 버틸 가능성이 높았다.
소백진의 전력을 끌어냈던 빙의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몸 곳곳이 삐걱대는 지금, 무리하게 천마의 힘을 썼다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맛이 가 버리면 그땐 정말로 동료들을 잃게 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 해 봅니다.”
이 악물고 해 보자.
상대는 악귀가 심어진, 반인반령(半人半靈)의 존재.
즉, 술법이 통하는 상대란 소리다.
“후…….”
[크르르르르르르르.]
“호오? 네가 아까부터 녀석이 품고 있던 바로 그놈이구나.”
설천위의 다짐과 함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패융을 보며 구마가 감탄했다.
“확실히, 보통의 인간이라면 다루기는커녕 품는 것조차 불가능할 용이로구나.”
“솔직한 평 고맙네.”
여유로운 구마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설천위는 영력을 끌어올렸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아까 살짝 깨워 놓긴 했지만, 제대로 깨어난 게 아니었다.
태곤옥(颱鯤玉).
이 녀석을 깨우고, 어떻게든 술법으로 밀어붙이면…….
‘가능할 수도 있어.’
가진 거 전부 꺼내자.
차라리 다행이다.
상대가 악귀를 품은 존재라서.
보통이라면 상대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버거운 존재이지만, 자신에겐 이게 훨씬 좋다.
구마의 상태를 살피며, 설천위는 품에 있는 태곤옥으로 영력을 밀어 넣었다.
구마가 쉽사리 눈치채지 못하게 몸 전체에 영력을 두르며.
그런데, 조금 조급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새 영력이 늘어난 걸까.
우웅.
우웅.
‘……왜 두 개?’
품 안에서 요동치는 진동이 하나가 아니었다.
태곤옥을 향한 영력이 그 옆에 있던 주황색의 돌에도 흡수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이상한데?’
영력만을 흡수하는 태곤옥과 달리 주변에 가득한 패기와 살기까지 흡수하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아!”
철귀를 죽이고 받은 보상에 껴 있던 색이 묘했던 둥근 돌.
무림맹에 향하기 전에 챙겨 다니는 주머니에 넣어 놓고 깜박했었는데…….
우웅!
우웅!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것과 별개로 이미 품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한 두 구슬은 서로 앞다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기물이라도 품고 있는 것이냐?”
그 모습에 뒷짐을 진 채로 살짝 자세를 낮춘 구마.
상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설천위는 더욱 거세게 영력을 밀어 넣었다.
뭐가 됐든,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라면 깨우는 게 맞다.
철귀 정도를 잡고 얻은 보상에서 엄청난 물건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또 모르지.
인생이란 꼭 원인에 합당한 결과만을 맞이하는 건 아니니까.
걸신들린 것처럼 온갖 기(氣)를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구슬과, 그 옆에서 마치 경쟁하듯 영력을 빨아들이는 태곤옥.
어느새 설천위를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힘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광경.
“쯧.”
그 모습에 혀를 찬 구마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구마의 손이 망설임 없이 설천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는 공격으로 설천위의 행동을 단숨에 끊어 내겠다는 심산이다.
막든가 죽든가.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상황.
구마의 노골적인 공격에 설천위는 전자를 선택했다.
아니, 패융이 전자를 선택했다.
[크롸라라라라라!!]
거친 포효와 함께 패융의 거체가 구마를 덮친다.
그 몸에 두른 살의와 패기가 존재 자체를 짓누르며 혼에 그 이빨을 들이민다.
인간이라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공격이지만 악귀와 섞인 구마에겐 아쉽게도 아니었다.
그냥 버티면,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두고 방어를 택한 구마가 패융의 거체를 막아 내며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저 용을 뚫으려면 그냥 무작정 달려드는 거로는 안 될 것 같다.
‘……귀찮군.’
위협적이진 않지만, 뚫고 지나가는 게 영 번거롭다.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빠른 속도로 단숨에 돌파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조금 전에 손으로 느꼈던 패융의 힘을 가늠하며 구마가 패융을 뚫을 고민을 하던 동안.
후웅.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사방으로 퍼지던 진동의 여파가 사라지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침묵이 공간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헛웃음을 지은 설천위가 구마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기묘한 침묵이 깨지며, 그 몸을 기이한 바람이 휘감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게 여기에 있는지 몰랐네.”
어느새 손을 꺼낸 설천위는 헛웃음을 지으며 흩어지는 가루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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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도(修羅道)의 파편을 흡수하였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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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예상도 못 했다.
이게 여기에 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수라도라…….”
진짜 초반에 얻으면 가장 다루기 힘든 놈으로 먹어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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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수라(修羅)(上中)를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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