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202화-잠룡대 (8)
설천위를 미행하던 다섯을 데리고 급히 숙소로 돌아온 설천강은 작게 이를 악물었다.
‘……안 좋군.’
묵고 있던 객잔은 이미 난장판이 된 지 오래였다.
불까지 질렀는지, 곳곳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눈치 빠른 일반인은 도망친 지 오래였고, 실력에 자신 없는 무림인 역시 도망친 듯 보였다.
하긴, 이런 시골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인이 우연히 이곳에 머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나마 건물 안에서 습격을 당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서로 뭉쳐 있던 덕에 어떻게든 버텨 낸 것 같았다.
거기에다.
‘대체 어떻게 뽑은 건지 모르겠군.’
개개인의 무력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제대로 달라붙어 교육시키니 그 성장 속도가 꽤나 놀라웠다.
거기에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유지하는 대응 능력까지 갖췄다.
학관을 졸업하고 무림맹에 들어가면 한가락 할 것 같은 떡잎들을 잘도 모아 놨다.
“전원, 뒷마당으로 모여라!!”
설천강의 고함과 함께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던 이들까지 재빠르게 뒷마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경상이 다섯, 중상이 셋입니다!”
여덟이면 쉬고 있던 인원의 거의 대부분이 다쳤다는 소리다.
아무리 뛰어나다곤 해도 아직 준비 중인 이들.
솔직히 말해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곳엔 쭉정이들만 왔거나.’
이렇게 대놓고 습격을 감행할 정도의 인원이 모였는데, 자신까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숙소에 쭉정이들만 찾아왔다?
“전원! 원진을 유지하라!!”
아무래도 동생 놈의 목숨이 꽤나 위험할 것 같았다.
‘최소 다섯 이상.’
잘못하면 화경급 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합류해야 한다.
부상자들을 가운데로 모으고 둥그렇게 원을 그린 상황에서 설천강은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위험한 행동이다.
무리와 떨어져 있으면 그 혼자 적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잠룡대의 부대주다!!”
그래야 한다.
부상을 입은 이들을 살필 틈을 만들어 주고,
여웅을 필두로 한 다섯이 적에게 적응할 시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이런 난전은 처음일 테니.
자신이 시간을 벌어 줘야 한다.
차갑게 식은 숨을 뱉어 내며 설천강은 검을 휘둘렀다.
닿는 것만으로 살갗을 얼리는, 냉기를 품은 검이 달려드는 적을 단숨에 베어 낸다.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드는 적들.
몸을 틀어 좌수를 휘두르며 설천강은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의 검을 왼손으로 받아 내고, 오른손에 쥔 검은 적의 가슴을 가른다.
검으로 찌르기를 하진 않는다.
냉기를 머금은 검이 신체에 박히면 그 냉기로 인해 피가 얼어붙어 빼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벤다.
베고, 또 벤다.
좌수는 방어에 치중하고, 하나씩 확실하게 적을 베어 나간다.
그렇게 적을 베던 어느 순간.
“아!”
작은 신음과 함께 설천강은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붉게 배어 나오는 피.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던 상태에서 강제로 빠져 나온 설천강은 주위를 둘러봤다.
완전한 난전.
그 속에서.
“미숙하구나.”
빈틈을 찌른 암살자 하나.
검은 야행복을 입은 살수가 비수를 비튼다.
끔찍한 고통에 절로 솟구치는 비명을 이를 악물고 삼킨 설천강은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신은, 설가의 자식이다.
나는.
“설천강이다.”
빠각!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암살자가 훌쩍 뛰었다.
“확실히, 사파에서 설가라고 하면 학을 떼는 이유를 알겠군.”
즉각 반응했는데도 오른팔이 부러졌다.
덜렁거리는 오른팔의 통증에 미간을 찡그린 암살자는 왼손으로 자신의 배에 박힌 비수를 붙잡는 설천강을 바라봤다.
비수를 뽑지 않는 건 당장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뜻.
뽑는 순간, 출혈이 심해지기 때문에 전투 중에는 몸에 박힌 무기는 뽑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허나, 설천강은 비수를 뽑기 시작했다.
“포기할 셈이냐?”
비웃음마저 담긴 그 물음에 설천강은 똑바로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그를 바라봤다.
“쪽팔린 행동은 살아오면서 충분히 했다.”
동생이 싫었다.
잘난 건 자신인데, 다들 하나같이 동생만 걱정한다.
더 잘 배우는 건 자신인데, 자꾸 동생을 가르치려고 한다.
어린 시절엔 그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동생이 미웠다.
그 녀석은 이젠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니 억지로 잊은 것 같지만.
자신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아니, 잊어선 안 된다.
자신은, 형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많은 죄를 동생에게 저질렀다.
어느새 훌쩍 커서 당당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선 동생에게 처맞기 전까진 그 죄를 인정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후회했다.
홀로 방에 처박혀 소리 없이 악을 쓰며 셀 수도 없이 후회했다.
그런데, 그런 모자란 형을 동생 녀석이 먼저 찾아왔다.
그러니.
“형 노릇 한번 제대로 해 보기 전엔 절대 안 무너진다.”
쩌저저적.
강렬한 냉기에 상처 부위의 피가 얼어붙으며 출혈이 멎는다.
혈을 눌러 지혈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방법.
그러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빙공을 익힌 고수들조차 잘 쓰지 않는 방법이다.
“그 녀석이 없다고 잠룡대가 무너질 거란 생각은 마라.”
손에 쥔 검을 상대에게 겨누는 설천강의 몸에서 위압적인 냉기가 몰아친다.
천재라고 불리던 형과 누나보다도 뛰어났던 재능.
혹한의 냉기를 품은 설천강의 두 눈이 북해의 빙하보다도 단단한 결의를 품고 빛난다.
“거, 말 참 잘했소.”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설천강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더 빠르네.”
“덕분이오.”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규학.
그 모습에 설천강의 배에 비수를 꽂았던 암살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결국 이렇게 됐군.’
설천강을 제외한 잠룡대의 저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 조금 조급하게 설천강을 공격했다.
그 탓에 설천강에겐 제대로 된 치명상도 입히지 못했고, 설천강의 기세에 올라탄 잠룡대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정파의 어린놈들이라고 얕볼 게 아니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독을 풀고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기습을 해야 했는데.
인원이 부족해 어설프게 진행한 것이 독이 됐다.
‘……뭐 됐어.’
어차피 이쪽의 역할은 설천강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꽉 붙잡아 놓는 것.
저쪽에서 확실하게 설천위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를 고립시키는 거다.
자신들이 맡은 의뢰도 아니고, 다른 놈들과 협업해서 하는 건데 이 정도면 잘했지.
고개를 끄덕인 암살자는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일단 남은 놈들을 싸우게 만들고 자신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
설천강까지 죽여 설가를 흔들면 좋았겠지만…….
‘그 냉혈한이 어차피 자식 둘 죽은 것 정도에 흔들릴 일은 없을 테니.’
일단은 흔적을 지우는 게 먼저다.
흔들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복수는 할 테니까.
최대한 이쪽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가면 그것으로 임무는 완료…….
“야.”
순간,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고개를 든 암살자는 달려드는 무인을 베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설천강과 눈이 마주쳤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일 거니까 알아서 잘 피해 다녀라.”
……다음에?
그 순간, 자신이 생각을 너무 오래, 그것도 깊게 했다는 것을 깨달은 암살자는 그제야 상황을 온전히 파악했다.
어느새 확연하게 줄어든 인원.
저쪽은 부상자를 전부 수습하고 움직일 준비가 끝난 상황.
“달라붙어라!!”
“잘 먹고 잘살아라! 새끼들아!!”
다급하게 암살자가 외쳤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잠룡대의 인원은 전부 담을 넘기 시작했다.
설천강이 소리까지 치며 뒷마당에 모은 탓에 주위엔 인질로 삼을 민간인도 없었다.
“……추적해라!!”
당했다.
그 생각에 이를 악무는 것과 별개로 암살자는 땅을 박찼다.
이대로 설천강이 설천위와 합류하면 임무는 실패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 * *
[크롸라라라라라라라!!]
숲 전체를 날려 버릴 것 같은 거대한 포효와 함께 패융이 거체를 휘둘렀다.
“괴물 놈!!”
패융의 꼬리를 거대한 도끼로 막아 낸 거한은 이를 악물었다.
주위의 나무들을 단숨에 초토화시키며 등장할 때부터 알았지만,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거력이다.
버티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낄낄낄! 진짜 괴물이로구나!!”
그리고 그 모습에 오히려 기쁜 듯 웃음을 터트린 노도사가 사방으로 부적을 뿌려 댔다.
“허나 결국 귀물(鬼物)! 그 한계는 뚜렷한 법이지! 클클클!”
노도사의 말에 주변의 이들은 단숨에 패융의 상태를 파악했다.
거대한 덩치에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긴 하지만, 결국 영적인 존재.
무인을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긴, 저 덩치로 무인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 수 있었다면 진즉에 꺼냈을 터.’
‘저 용은 도사에게 맡긴다.’
판단이 끝나자, 거한은 즉시 땅을 박찼다.
노도사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여기서 용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일단 물러서서 용을 노도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설천위를 상대하면 된다.
저만한 용을 부리면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쉽군.’
승기는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다만, 조금 전에 느꼈던 용의 묵직한 힘은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니 예상치 못한 공격에만 주의하면 별 무리 없이 설천위의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크워어어어어!!]
“뭣들 하나! 지금이 기회다!”
노도사가 던진 부적이 빛을 발하며 패융을 속박한다.
자신의 육체를 묶는 힘에 패융이 몸을 비틀자, 순식간에 결계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지만 무인들은 일단 달렸다.
패융의 공격을 못 막을 정도는 아니니 저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순식간에 설천위에게 도달한 무인들은 단숨에 자신의 절기를 쏟아 냈다.
노도사 덕에 거대한 용은 상대하지 않아도 됐지만, 지금 설천위가 뿜어내는 기세도 보통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빨리 정리를…….
“내가 왜 무공을 익혔는지 아나?”
키이잉.
담담한 목소리로 묻는 질문과 함께 본능적으로 목을 보호한 무인들은 강렬한 충격에 일제히 튕겨 나갔다.
“호오, 꽤나 뼈대가 있는 놈들이구나.”
[호오, 꽤나 뼈대가 있는 놈들이구나.]
그런 무인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설천위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목소리.
[참수(斬首)]
“구태여 넓게 펼쳤다곤 하나, 모두가 막아 낼 줄이야.”
[구태여 넓게 펼쳤다곤 하나, 모두가 막아 낼 줄이야.]
마치 노인이 칭찬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거한은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앞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왜 점점 뒤로 가지?
거한만 그리 느낀 것은 아닌 듯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끄륵.”
“이래서, 무공을 익히는 거야.”
피가래가 끓는 소리와 함께 몸이 허공에 뜬 노도사의 몸이 천천히 늘어진다.
설천위가 쥔 도가 그 목을 꿰뚫다 못해 허공으로 그 몸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찾아온 죽음.
“아무리 술법이 강해도 이 세계는 결국 무(武)가 주류인 세상.”
설천위가 가볍게 도를 휘두르자, 목이 반쯤 분리된 노도사의 시체가 땅으로 떨어진다.
“이만한 속도에 반응도 못 하면, 목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지.”
술사는 이렇게 물몸이다.
“내가 피똥 싸면서 무공을 익힌 이유이기도 하지.”
패융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이고.
단.
“뭐, 술법도 익히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긴 해.”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트는 것과 동시에 노도사의 술법에서 벗어난 패융이 그 몸을 비틀었다.
설천위를 공격하느라 모였던 이들을 단숨에 휩쓸어 버릴 듯 그 꼬리를 마구 휘두른다.
너무나도 강맹한 그 기세에 모두가 일제히 자리를 뜨려던 순간.
“무슨?!”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무인 하나가 제대로 방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패융의 꼬리에 직격을 당했다.
심지어, 그 발을 묶은 검은 관이 그 몸을 그대로 붙잡아 충격을 해소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끄아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을 내지르는 무인.
패융이 꼬리를 거두자, 양팔이 흉측하게 부러진 무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명백히 더 이상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없는 모습.
그 모습에 도를 쥔 설천위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이제 넷 남았네.”